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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된 회암사
 재현된 회암사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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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정기답사지로 경기도 양주가 정해졌다. 주제는 '양주에 뼈를 묻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양주에서 살았거나, 죽어 이곳에 묻힌 인물들의 흔적을 찾으러 나섰다.

양주는 과거 한양의 동북쪽에 있던 커다란 고을이었다. 그래서 현재 양주, 남양주, 의정부, 구리가 모두 양주 땅이었다. 이번 답사는 현재 양주가 아닌 과거 양주를 찾아가는 여행이다.

우리는 먼저 서계 박세당 고택과 그의 무덤을 찾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박태보 무덤과 그를 기리는 서원인 노강서원도 찾아보았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백사 이항복의 묘와 그를 기리는 화산서원이다.

세 번째로 우리는 회암사지로 가서 그곳에 주석했던 나옹화상과 무학대사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그곳에 회암사지 박물관이 생겼고, 생각지도 않던 회암사지 박물관을 둘러보게 되었다. 그 때문에 계획했던 남양부부인 홍씨묘는 보지를 못 했다.

설명을 듣는 우리 회원들
 설명을 듣는 우리 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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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지 박물관은 2012년 7월 회암사지 입구에 세워졌다. 경기 문화재연구원에서 1997년부터 2012년까지 10차에 걸쳐 발굴·조사한 유물을 보관하고 연구하며 전시 교육할 목적으로 설립했다.

대표적인 소장품으로는 건축과 관련이 있는 토수(土獸), 용두(龍頭), 잡상, 기와가 있다. 그리고 왕실용으로 사용된 그릇과 도자기류가 있다. 또한 회암사의 불교 역사를 보여주는 가치 있는 불상, 불화, 불구도 있다.

우리는 문화유산 해설사의 안내에 따라 박물관을 한 바퀴 둘러볼 예정이다. 박물관은 1층 상설전시실과 회암사 모형전시실을 거쳐 2층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 1층 상설전시실에는 왕실 사원 회암사의 역사를 보여주는 패널과 문헌이 있다.

그리고 절 건축과 관련이 있는 유물과 향완, 동탁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들을 보고 경사로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 2층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 문화체험관을 둘러볼 수 있다. 2층 전시실에는 기와, 토기와 자기, 불화와 조사 영정 등이 있다.

회암사의 역사를 살펴보고

여주 신륵사에 있는 나옹화상 진영
 여주 신륵사에 있는 나옹화상 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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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는 <고려사절요> 우왕 2년(1376) 4월 나옹화상과 관련해 언급된다. 그곳에 보면 나옹화상이 정치적인 이유에서 경상도 밀성군 영원사(瑩源寺)로 하방을 당하게 된다. 이때 나옹은 양주 회암사에서 문수회를 열어 대중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었다. 왕명에 의해 그는 현재 밀양인 밀성군으로 가게 되었고, 중간에 여주 신륵사에서 죽게 된다는 내용이다.

"중 나옹(懶翁)을 밀성군(密城郡)으로 내쳤다. 이때 나옹이 양주(楊州) 회암사(檜巖寺)에서 문수회(文殊會)를 베풀었는데, 중앙과 지방의 남녀들이 귀한 사람, 천한 사람 할 것 없이 다투어 포백(布帛)·과실·떡을 싸 가서 보시하기 위하여 서로 먼저 이르려고 절의 문이 메워질 지경이자, 추방한 것이었는데, 가다가 여흥 신륵사(神勒寺)에 이르러 죽었다."

천보산 회암사 수조기
 천보산 회암사 수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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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가지는 목은 이색이 쓴 '보제존자선각탑명'이다. 이곳에 보면 나옹화상은 1372년 가을 송광사(松廣寺)에서 회암사로 거처를 옮긴다. 그리고 전란으로 불탄 전각과 집들을 넓히고 중수한다. 그리고 1376년 4월에 낙성식을 열면서 크게 법회를 열었다. 그러나 왕명으로 영원사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는 호송관 탁첨(卓詹)의 호위를 받으며 여주 신륵사에 이르렀고, 5월 15일 진시에 입적한다.

그리고 목은이 쓴 '천보산 회암사 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에는 회암사의 역사뿐 아니라 규모까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전각이 262칸이나 되며, 15척(尺)이나 되는 부처님이 7분이나 모셔져 있다. 절의 크기는 동국(東國) 제일로, 중국에서도 보기 어려울 정도로 크고 웅장하다. 대표적인 전각으로는 보광전, 설법전, 대장전, 조사전, 향적전 등이 있다.

무학대사
 무학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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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무학대사가 이곳 회암사에 머물렀고, 그 때문에 왕실의 원찰로 그 사세를 더욱 확장할 수 있었다. 특히 태조 이성계는 불사와 법회에 참석하느라 회암사에 7번이나 행차했다. 1402년(태종 2년)에는 태상왕이 되어 회암사에서 무학대사에게 계를 받고 수도생활을 하기도 했다. 1405년 무학대사가 입적하자 태조는 그의 탑비를 회암사에 세웠다.

그후에도 효령대군, 정희왕후, 문정왕후 등이 불사를 후원하는 등 회암사와 관련을 맺었다. 김수온(金守溫)이 쓴 <회암사중창기>에 보면, 1472년(성종 3년) 세조비인 정희왕후가 회암사 중건에 많은 지원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리고 명종의 어머니였던 문정왕후는 승려 보우(普雨)를 중용해 불교중흥을 꾀했다. 이때 회암사가 전국 제일의 수선도량으로 그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정왕후 사후 회암사는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1566년(명종 21년)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1595년(선조 28년) '회암사 옛터에 불탄 종이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를 통해 회암사는 1500년대 후반 훼손되거나 불탔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이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네

청동금탁
 청동금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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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 역사를 공부한 다음 나는 유물을 하나하나 살펴본다. 가장 먼저 전각의 지붕 끝 처마나 추녀마루에 설치되었던 토수, 용두, 잡상을 살펴본다. 토수는 흙으로 만든 짐승이고, 용두는 용머리며, 잡상은 사람 모양, 동물 모양, 반인반수형의 세 가지 잡다한 형상이다. 그런데 이들이 굉장히 큰 편이다. 아마도 이들이 보광전 등 중심전각 보호용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청동금탁(靑銅金鐸)이 보인다. 금탁은 건물 추녀 끝에 매다는 풍경 또는 풍탁을 말한다. 지름과 높이가 30㎝가 넘을 정도로 큰 편이다. 이것은 보광전 터에서 4개 발견되었다. 그 중 한 점이 이곳에 전시되고 있는 것이다. 금탁에는 추녀에 매달 수 있도록 쇠못이 붙어 있다. 몸체의 상단에 왕사 묘엄존자, 조선국왕, 왕현비, 세자 같은 명문이 보인다. 이를 통해 왕실에서 금탁을 후원했음을 알 수 있다.

분청사기 향완
 분청사기 향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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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또 청기와가 있다. 청색 또는 녹색의 유약을 바른 기와를 말하는데, 이곳에 있는 것은 녹색이다. 청기와는 기와의 아름다움보다는 색의 선명성이 돋보인다. 이곳 전시실에서 예술성이 가장 뛰어난 것은 백자와 분청사기 향완이다.

이 중 백자는 분원이 설치되기 이전에 생산된 것이어서, 생산지와 생산과정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향완은 높은 받침대에 향로가 붙어있는 형태로 도자기로 만들었다는데 의의가 있다. 왜냐하면 향완 대부분이 청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2층으로 올라가면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기와가 전시되어 있다. 이들 기와를 통해 우리는 회암사의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기와는 평기와, 막새기와, 서까래기와, 마루기와로 여말선초에 제작되었다.

이들 기와에는 연화문, 범자문, 용문, 봉황문 등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이 중 가장 예술성이 뛰어난 것이 막새기와다. 이 막새기와에 명문이 있을 경우 학술적 가치는 더욱 높아진다.

봉황문 수막새
 봉황문 수막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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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명문기와는 대부분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들이다. '홍무삼십년정축삼월일(洪武三十年丁丑三月日)'이라고 새긴 수막새는 1397년에 제작된 것이다. '천순경진(天順庚辰)'이라고 쓴 봉황문 수막새는 1460년에 만들어졌다. 봉황의 날개와 꼬리가 상당히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천순경진오년(天順庚辰五年)'명 용문 암막새도 훌륭하다. 상단에 양각으로 표현된 용의 모습이 역동적이다.

용문 암막새
 용문 암막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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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령대군(孝寧大君)이 시주한 범자문 수막새도 눈에 띈다. 범자문은 대개 6자 진언인 옴마니밤메훔을 썼다. '효령대군 선덕갑인(宣德甲寅)'이라는 명문을 통해 효령대군이 1434년 시주했음을 알 수 있다. 효령대군은 1436년에도 기와를 시주했다. 효령대군 명문기와에는 훔자를 썼다. 태종의 둘째 이들로 왕이 될 수 없었던 효령대군은 친불교적이어서 회암사 중수 등 여러 군데 불사에 참여했다. 그리고 <반야심경>, <원각경> 등을 언해해 간행했다.

우리는 이곳에 전시된 도자기를 통해서도 회암사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고려시대 청자, 조선시대 백자, 분청사기, 도기 등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이들 도자기는 생활용품과 제례용품 두 가지가 있다. 특이한 것은 대부분의 백자 바닥에 글씨가 써져 있다는 사실이다. 정각, 음각, 묵서 등의 방식으로 글씨를 써 넣어 조선 전기 백자 연구에 아주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 한 가지 특이한 것은 한글 명문도 있다는 사실이다.

백자 동자상
 백자 동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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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도자기 외에 용도 미상의 백자 동자상이 눈에 띈다. 높이가 16.2㎝나 되는 큰 백자상으로, 머리 양쪽으로 올린 머리, 얼굴 표정, 옷주름 등을 통해 동자임을 알 수 있다. 눈과 입의 표현해서 정교함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순하고 착한 인물로 표현되고 있다. 보광전 터에서 발굴되었기 때문에 전각 내부 불전 옆에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들 유물을 소개하는 설명판에는 모두 국립중앙박물관이라는 문구가 들어 있다. 이를 통해 이곳에 있는 물건 모두가 복제품임을 알 수 있다. 진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기 때문이다.

이게 요즘 지방박물관이 갖는 한계다. 국내에서 출토된 모든 유물은 국립박물관에 전시 또는 보관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지방에서 출토된 유물을 그 지방 박물관에 전시 보관하도록 법률과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 왜냐하면 문화유산까지도 중앙집권화가 너무 심하기 때문이다. 

이익도 구하지 않고 이름도 구하지 않고 살라했던 나옹 스님

중앙박물관 소장 약사삼존도
 중앙박물관 소장 약사삼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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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박물관 2층 전시실에서 마지막으로 불화와 조사들의 진영을 살펴본다. 불화는 다섯 점으로, 약사삼존도가 네 점 석가삼존도가 한 점이다. 이들 중 약사삼존도 한 점은 중앙박물관에 있고, 세 점은 일본에 있으며, 한 점은 미국에 있다. 이들 불화는 문정왕후의 발원으로 1565년(명종 20년)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 비단에 금칠을 한 중앙박물관 약사삼존도가 인상적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의성 대곡사에 있는 삼화상 진영이 걸려 있다. 이 그림은 1782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삼화상은 지공, 나옹, 무학대사를 가리킨다. 이들 세 스님은 사제관계로 연결되며, 회암사와 연을 맺은 큰 스님들이다. 그 중 간화선을 바탕으로 임제종의 선풍을 도입해 선불교의 중흥을 꾀하려고 했던 나옹화상의 이야기가 가장 많이 전해진다. 그 중 나옹화상의 노래(歌) 세 수 완주가(翫珠歌), 백납가(百衲歌), 고루가(枯髏歌)에 나오는 의미 있는 구절을 소개하고 싶다.

삼화상 진영
 삼화상 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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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데 없이 입을 열어 미타염불 할 것 없고                不勞開口念彌陀
이익도 구하지 않고 이름도 구하지 않으며                不求利不求名   
누더기 옷 입고 마음 비웠으니 무슨 생각 있으랴.       百衲懷空豈有情
때로는 어리석음과 애욕으로 때로는 탐욕과 분노로    或癡愛或貪瞋
곳곳이 혼미해서 허망한 티끌을 뒤집어쓴다네.          處處昏迷被妄塵


태그:#회암사지 박물관, #나옹화상, #무학대사, #천보산 회암사, #왕실의 원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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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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