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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관덕정 '돌하루방 연작'에 대해 설명하는 강요배 작가. 현무암으로 만든 제주 수호신 돌하루방(할아버지)의 소묘 속 부릅뜬 눈이 강직해 보이면서도 한편 씩 웃는 여유를 보이는 것 같다
 제주 관덕정 '돌하루방 연작'에 대해 설명하는 강요배 작가. 현무암으로 만든 제주 수호신 돌하루방(할아버지)의 소묘 속 부릅뜬 눈이 강직해 보이면서도 한편 씩 웃는 여유를 보이는 것 같다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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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배 소묘전(1985-2014)'이 지난해 '강요배 회화전'에 이어 학고재갤러리 본관에서 3월 30일까지 열린다. 이번 소묘전은 흔치 않은 작가의 속살까지 들어다볼 수 있는 전시다. 4·3항쟁을 다룬 작품을 뺀 1985년부터 2014년까지 30년에 걸쳐 그린 소묘 53점을 비롯해 아크릴작품 4점도 선보인다. 그중엔 '금강산 답사기'도 있다.

그의 소묘는 '민중'을 테마로 하는 리얼리즘의 근간과 토대가 된다. 그가 이름이 난 건 물론 80년대 후반 '제주4·3역사화'지만 이미 80년대 초반부터 삽화가로 활동했다. 하지만 그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제주의 지난한 역사보다는 제주의 바다와 바람, 풀꽃과 자연 등 수려한 풍경을 더 많이 그린다.

그에게 소묘는 도대체 뭔가?

강요배 I '봄(Spring)' 종이에 연필(Pencil on paper) 33×23cm 1985. 80년대 중반에 그린 초기 소묘작
 강요배 I '봄(Spring)' 종이에 연필(Pencil on paper) 33×23cm 1985. 80년대 중반에 그린 초기 소묘작
ⓒ 강요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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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소묘(데생, 드로잉)는 그에게 뭔가. 그는 가벼운 마음으로 일필휘지로 그리다보니 실수도 있고 밀도가 떨어질 수 있으나 그런대로 싱싱한 맛이 있단다. 맨 낯을 보여주며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솔직하게 그린 거라 부담없이 보면 된단다.

'소묘'는 회화의 밑그림에 활용하는 '스케치(에스키스)'와 다르다. 회화처럼 하나의 독립 장르이다. 그가 소묘를 좋아하는 건 붓보다 연필이나 목탄, 콩테(소묘용 굵은 연필)로 그리기 때문인데 그 중 목탄이 감촉이 좋아 가장 만족스럽단다.

강요배 I '바람 타는 나무(The Wind in the Tree)' 종이에 콩테(Conte on paper) 54×39cm 2013. 소용돌이치는 제주바람에 휘감긴 나무의 모습이 신령하고 숭고하다
 강요배 I '바람 타는 나무(The Wind in the Tree)' 종이에 콩테(Conte on paper) 54×39cm 2013. 소용돌이치는 제주바람에 휘감긴 나무의 모습이 신령하고 숭고하다
ⓒ 강요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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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소묘는 작가의 외모처럼 겉멋이나 꾸밈이나 과장이 전혀 없다. 잘 그려야지 하는 생각보단 중간과정을 보여주고 대상을 자연스럽게 포착하고 객체를 정직하고 덤덤하게 그린 것이다. 작품의 완결성보다는 연결성을 더 중시한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우찬규 학고재 대표는 "작가의 바탕을 살피는 덴 소묘보다 더 좋은 게 없다"며 "중국명나라 도륭의 '고반여사(考槃餘事)'를 보면 작가를 이해하는 데 그 바탕이 되는 건 밑그림이고, 거기에서 화가의 '천진함'이 드러나게 마련이라고 했는데 이번 소묘전도 강 작가의 그런 점을 볼 수 있는 호기"라고 부연설명한다.

그의 소묘는 사소한 개인적 정서만이 아니라 그 이면에 응축된 사회적 정서까지도 담긴 것 같아 미묘한 분위기를 낸다. 제주의 빼어난 풍광이 뿜어낸 기운과 제주출신 작가의 독특한 체질이 합쳐져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게 한다.

제주도 토박이 작가의 기질

강요배 I '호박(Pumpkin)' 종이에 콩테(Conte on paper) 39×54cm 2014
 강요배 I '호박(Pumpkin)' 종이에 콩테(Conte on paper) 39×54cm 2014
ⓒ 강요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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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6년간 창문여고에서 교사생활도 했지만 그런 조직생활이 그에게 맞을 리 없다. 서울생활이 길어질수록 고향이 더 사무쳤고 일찍 어머니를 여위고 홀로 살던 그가 누구에게 명령을 하거나 받아보지 않았으니 학교생활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낙향한다.

위 '호박'은 제주 토박이작가가 그린 그림답게 투박한 향토색이 강하게 풍긴다. 제주 돌의 온기도 느껴진다. 그는 인고의 세월 속에서 자생하는 법을 터득하며 뭐든 잘 참고 견뎌내는 자연의 의연함과 늠름함에서 삶의 태도를 배운단다.

"언제 작업을 하느냐"는 기자 질문엔 상대를 한방에 날려야 하는 권투선수처럼 집중하지 않으면 그림이 안 되기에 새벽명상 후 아침시간에 한단다. 어쩌다 저녁에 흥이 나면 지인들과 밤새 술에 취해 현대미술이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하고, 즉흥시와 작곡놀이도 하면서 서울작가들이 누릴 수 없는 즐거운 시간도 보낸단다.

날로 추상성이 강해지는 그의 작품

강요배 I '우럭(Rock Cod)' 아크릴물감(Acrylic on canvas) 162×97cm 2013. 그림에 여백이 많은 건 마음을 비워놓고 자유분방하게 그린 탓인가
 강요배 I '우럭(Rock Cod)' 아크릴물감(Acrylic on canvas) 162×97cm 2013. 그림에 여백이 많은 건 마음을 비워놓고 자유분방하게 그린 탓인가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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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근작은 날로 추상성이 강해진다. 형태와 현상은 뭉개거나 지우고, 구름처럼 기운과 흔적만 남긴다. 하긴 구상의 기초가 누구보다 단단한 그가 추상으로 간다고 해도 전혀 문제될 게 없고 오히려 잘 된 일이다. 추상은 그림에서 생략과 압축 등 암시와 은유의 요소가 강하기에 오히려 그 수준이 높아진단다.

"왜 추상화로 가느냐"는 질문엔 지금과 같은 '디카'시대, 80~90년대 카메라로 찍은 것 같은 소위 '사실의 발견'을 강조하는 리얼리즘 작업은 이제 그의 몫이 아니란다. 그런 그림은 지긋지긋하게 많이 그려 이젠 정말 더 이상 그리고 싶지 않단다.

강요배 I '오하(五荷, Five Water Lilies)' 캔버스에 아크릴물감(Acrylic on canvas) 97×162cm 2013. 이번 전시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으로 60대 이후, 작품의 변모를 엿볼 수 있다
 강요배 I '오하(五荷, Five Water Lilies)' 캔버스에 아크릴물감(Acrylic on canvas) 97×162cm 2013. 이번 전시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으로 60대 이후, 작품의 변모를 엿볼 수 있다
ⓒ 강요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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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화 경향을 지적하는 것에 대해 그는 'Less is More(적은 게 많은 것)'로 한 문장으로 대신한다. 누군 이걸 '빈자의 미학'이라고 하고 또 누군 "더 이상 보탤 것도 뺄 것이 없는 상태"라고 했지만 사실 현대미술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주제이다.

글은 논리이고 그림은 비논리라고 볼 때, 추상은 그림의 그림으로 구상보다 더 빼고, 더 지워야 하기에 더 비논리적이다. 글쓰기도 그렇지만 그리기도 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추상은 해석의 여지가 많아 그만큼 더 자유롭고 더 창조적이다.

그림에 대한 그만의 독특한 해석

강요배 I '여인' 종이에 목탄(Charcoal on paper) 77×52cm 2005. 몽롱한 분위기 속에 피어난 미인도 같다
 강요배 I '여인' 종이에 목탄(Charcoal on paper) 77×52cm 2005. 몽롱한 분위기 속에 피어난 미인도 같다
ⓒ 강요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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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번 도록에도 작가는 "그림은 미술과 다르다, 그림은 미술의 한 방식이지만 보다 특수하다"라고 적고 있다. 그에게 그림과 미술은 구분된다. 미술은 많지만 그 원형이 되는 그림은 없다는 뜻인가. '글·그림·그리움'은 우리말 어원이 같다는데 그렇다면 그림은 그리움을 그린 것인데 서양 개념인 '미술'과 다를 수도 있겠다.

추상성이 강한 위 미인도를 봐도 그렇다. 미인 그 자체의 사실적 아름다움을 그렸다기보다는 가슴에 오래 묵혀둔 미인에 대한 깊은 그리움을 끄집어내 그린 것 같다.

그런 면에서 그는 그림에서 순수한 혈통주의자라고 할까.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말하는 뒤죽박죽이 된 미술개념이 언짢은가보다. 너무 정교하게 번지르르하고 개념적인 걸 싫어하고 사람의 땀 냄새와 대지의 흙냄새가 나는 걸 더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

"난 머리를 시원하게 하려고 그린다"

강요배 I '젖먹이' 160×130cm 아크릴물감 2007. '제주4·3(1947-1954)'을 주제로 북촌마을에서 한 부인이 학살당하자 그 죽은 엄마의 젖을 빨고 있다는 증언을 바탕으로 그린 2007년 작. 이번에 전시된 건 아니나 그가 민중화가임을 보여준다
 강요배 I '젖먹이' 160×130cm 아크릴물감 2007. '제주4·3(1947-1954)'을 주제로 북촌마을에서 한 부인이 학살당하자 그 죽은 엄마의 젖을 빨고 있다는 증언을 바탕으로 그린 2007년 작. 이번에 전시된 건 아니나 그가 민중화가임을 보여준다
ⓒ 강요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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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들과 대화 말미에 "화가도 돈을 많이 벌지 않냐"는 질문엔 "그럴 수 있지만 화가는 역시 고달픈 구도자나 사상가에 가깝다"며 "난 머리를 시원하게 하고, 답답하게 살지 않기 위해서 그림을 그린다, 그게 내 모토다"라고 간명하게 대답한다. 또 그림이 좋은 게 작업을 하다보면 자신의 부족함이 드러나고, 본인같은 좀팽이(?)도 대담하고 호방해질 수 있고 사물에 대한 관찰력도 생겨 세상을 더 넓게, 더 깊게 보게 된단다.

"민중미술이 소멸된 게 아니냐"란 기자 질문엔 "그게 사라진 게 아니라 모두 흩어져 한국미술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또한 그는 그림을 개인과 사회, 역사와 세계를 공부한 결과를 보여주는 '사상보고서'라고 말한다. 이를 보면 강요배 작가가 그림을 대하는 태도가 매우 학구적이고 철학적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예술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인간을 최고의 가치로 두면서 그림 속에 삶과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것이다.

제주토박이 작가 강요배(1952-) 그는 누구인가

전시장 앞에서 만난 박재동 화백과 강요배 화백을 사진 찍다. 두 작가는 자취방을 같이 쓴 '서울대 회화과' 동기라 그런지 다정하게 두 손을 꼭 붙잡고 있다. 80년대 민주화과정에서 박 화백은 언론계에서 시사만화가로, 강 화백은 미술계에서 민중화가로 괄목할만한 활동을 보였다
 전시장 앞에서 만난 박재동 화백과 강요배 화백을 사진 찍다. 두 작가는 자취방을 같이 쓴 '서울대 회화과' 동기라 그런지 다정하게 두 손을 꼭 붙잡고 있다. 80년대 민주화과정에서 박 화백은 언론계에서 시사만화가로, 강 화백은 미술계에서 민중화가로 괄목할만한 활동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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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강요배는 1952년 제주에서 태어난 토박이로, 1979년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와 1982년 동 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1981년 <현실과 발언> 동인이 된 이후 주로 사회의 모순에 대해 발언하는 작품을 발표해왔다. 87항쟁 이후 제주4·3은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1989년부터 4·3을 주제로 소름 돋는 사실화를 그려왔다. 이 연작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충격과 감동을 주었다.

문학계에서는 1978년 소설가 현기영이 사회금기를 깨며 4·3항쟁을 소설로 다루기 시작했고, 미술계에서는 1992년 강요배가 최초로 이 항쟁을 소재로 하는 '동백꽃 지다'라는 전시를 열어 제주학살을 고발했다. 그는 1998년에는 <민족예술상> 수상했고 현재는 제주에서 거주하며 작업하고 있다.

[전시소개] 최근 전시부터 보면 2013년 '강요배전'(서울 학고재갤러리), 2008년 '스침'(서울 학고재갤러리), '4·3 평화기념관 개관기념 특별전: 강요배_동백꽃 지다'(제주4·3기념관), 2007년 '섬 빛깔전'(제주문화진흥원), 2006년 '땅에 스민 시간 강요배전'(서울 학고재갤러리와 제주 아트스페이스)이 열렸다.

그리고 그 이전 전시로는 2003년 '강요배'(서울 학고재갤러리), 1998년 '4·3 50주년기념 동백꽃 지다 순회전'(서울 학고재, 제주, 광주, 부산, 대구), 1995년 '섬 땅의 자연' 조현화랑(부산), 1994년 '제주의 자연'(서울, 제주), 1992년 '제주민중항쟁사'(서울, 제주, 대구) 1976년 각(角)(대호다방, 제주) 등이 있다.

[관련기사] 2013년 강요배 학고재 회화전 http://bit.ly/YSYImo

덧붙이는 글 | 전시기간 중 갤러리신관에서는 강요배 소장전이 열린다. 그의 회화작품도 볼 수 있다.



태그:#강요배, #소묘화, #제주 4·3항쟁, #학고재갤러리, #민중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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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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