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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爲刀
▲ 무위도 無爲刀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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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이 마지막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남아 있고 장문인과 관조운은 내실의 거탁으로 돌아왔다. 장문인은 무림맹의 온철빈과 요명에게 짤막하게 대인의 운명을 전했다. 그때 바깥채 쪽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리더니 비영문의 집사가 뛰어들어 왔다.

"장문인 나으리, 웬 협사들이 여기로 들어오겠답니다. 소인들이 막았으나 막무가내로…."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경장차림의 건장한 사내 둘이 안채의 장지문에 벌써 들이닥쳤다. 한 사내의 어깨엔 은술이 달린 장검을 메고 있고, 다른 사내는 짧은 도(刀) 두 자루를 양 허리에 교차해 차고 있었다. 그 도에도 은술이 달려 있다.

"뭐 하는 놈들이냣!"

혈기방장한 비영문 제자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챙! 하고 검을 뽑고는 두 사내를 향해 나는 듯 뛰어가 검을 뻗었다. 젊은 기운과 혈기방장한 기세가 합쳐지니 검의 기운이 제법 매서웠다. 그러나 두 사내는 슬쩍, 능란한 기녀의 춤사위 같은 놀림으로 비영문 제자의 검을 가볍게 피했다.

혈기방장 젊은이는 자신의 일격에 살의가 실려 있기보단 무례한 자들에게 대한 위협의 성격이 강했는데, 상대가 하찮은 듯 아무렇지도 않게 피해버리자 혈기가 치솟았다. 이번에는 비영문의 절기인 은망지세(銀網之勢)의 자세로 검을 겨누었다. 한 번 공격에 은빛 칼날이 그물처럼 사방에서 쏟아진다는 초식이다. 그러나 두 사내는 검을 뽑기는커녕 어디 네 놈이 해보고 싶은 만큼 해보라 식으로 오히려 팔짱을 끼고 서 있다.

초연히 서 있는 방문자들의 태도에 더욱 분기가 솟은 비영문 제자는 은망지세의 제일초식 장유관일(長幼貫日)로 오른쪽 장검을 멘 사내의 가슴을 정면으로 찔렀다. 장검을 멘 사내는 이번에도 기녀의 춤사위와 같은 보법으로 살짝 피하더니 뒤로 물러섰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검이 쥐여져 있다.

그의 발검(拔劍) 솜씨에 좌중의 인사들은 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일초가 빗나간 비영문 제자는 제이초식으로 공격하기 위해 방향을 트는 순간 목에 차가운 기운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그의 목젖 한 치 앞에 사내의 칼끝이 매의 눈처럼 꼬나보고 있는 것이다. 상대가 어떤 동작도 취할 수 없는 완벽한 찰나의 제압이었다.

"대협, 본 비영문의 대접이 소홀했소이다. 어리석은 제자의 무례를 용서해주시고, 검을 거두어주시길 바랍니다."

연 장문인이 포권을 하며 방문자들에게 예를 취했다. 그들도 초대받지 않는 손님인 이상 한 번은 무(武)로써 그들의 존재감을 나타내야 함을 각오하고 있던 터인데, 예를 갖춰주는 장문인 덕분에 드잡이질을 멈출 수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 같았다. 사내가 칼끝을 내리고 검을 거꾸로 쥐고는 포권의 예를 취했다.

"귀협의 뜻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오연하게 좌중을 돌아보며 천천히 검을 검집에 집어넣는다. 다시 검을 빼지 않겠다는 의사도 되지만 언제든지 검을 다시 뽑아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배어든 동작이다.

이로써 서로 간의 기세 싸움은 끝났다. 방문자의 무공이 좌중의 어느 누구보다도 만만치 않음이 쉽게 증명이 된 것이다.

"협사들께서는 본 장문인에게 무슨 용무가 있으신지요."

연 장문인이 부드럽게 말했다.

장검을 멘, 얼굴이 길고 코가 뭉특한 사내가 품에서 조그맣고 네모난 패를 하나 꺼내 들었다. 패는 나무재질에 양각을 새겼고, 그 문양 위에 반짝이는 은(銀)을 입혔다. 자세히 보니 나무들이 빼곡히 서 있는 그림이다.

"우린 은화사(銀樺司) 소속이올시다."

"……은, 화, 사, 라면?" 사내들이 내민 패를 들여다 본 장문인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떠올리는 바로 그 은화사입니다."

사내들의 태도가 갑자기 거만해지는 것에 비해 다른 사람들의 어깨는 한층 쳐졌다.

연발연은 소문으로만 듣던 은화사가 진짜로 있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가 들은 은화사의 내력은 이랬다. 대명(大明)에는 감찰기관이 많았다. 천민 출신으로 대명을 건국한 태조 주원장은 철저하게 힘에 의지했다. 꺼질 듯 말 듯 작고 희미한 불씨에 불과했던 그가 마침내 천하를 태우기까지에는 힘이라는 바람이 절대적이었다. 그래서 그의 연호까지도 무(武)를 크게(洪) 사용한다는 홍무제(洪武帝)라고 지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힘에 의한, 힘을 위한, 힘의 정치를 동경했다. 이런 통치철학은 원(元)을 몰아내고 중원을 장악한 이후에는 역으로 자신의 제국에 위협이 될 만한 힘의 요소를 배제하게 만들었다. 먼저 황실의 권위를 위협할 수 있는 개국공신들을 척결하기 위해 숙청을 담당할 금의위(錦衣衛)를 창설했다. 그후 영락제 때에는 환관이 지휘하는 동창(東廠)이 감찰기관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이에 일상적으로 민심을 살피고 권력기관을 감찰하는 도찰원(都察院)도 있으니, 명나라는 이 세 감찰기관이 경쟁하고 견제하는 가운데 황실의 권력이 이어지는 구조로 짜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권력의 추가 동창으로 기울었으니, 이는 각신(閣臣, 내각대학사)을 통해 보고해야 하는 도찰원이나 상주문(上奏文)을 작성해야 하는 금의위에 비해 동창은 황제에게 직보(直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제(先帝) 성화제(成化帝) 때에는 환관 왕직(王直)의 농단이 극에 달해 동창을 능가하는 서창(西廠)이 설립되기도 하였으나, 현제(現帝) 홍치대제(弘治大帝)가 황상으로 즉위하면서 서창을 폐쇄하고 예전의 동창으로 복귀시켰다. 새로운 황제 밑에서 환관들은 전대만큼 세를 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누렸던 권력에의 향수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첩형관(貼刑官)은 동창에서 태감(太監) 다음 이인자이다. 첩형관 노순광은 선대에 누렸던 서창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전면에 나섰다가 타 기관의 견제를 받고는 첩형관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상대부라 불리우며 동창의 숨은 실력자로 행세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런 노순광이 막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 은화사를 만들었다고 한다.

처음에 은화사는 명칭만 알려져 있을 뿐 그 역할에 대해선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에 완벽한 비밀이 어디 있겠는가. 새외(塞外) 오랑캐 우두머리의 눈썹 개수까지 파악하고 있는 강호인들이고 보면, 은화사에 관한 소문은 조금씩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은화사는 강호의 일에만 정보를 수집하고 관여하는 비선조직으로, 강호의 고수들을 포섭하여 황제폐하의 칙령이라는 미명 하에 동창의 명을 은밀히 수행하는 임무를 맡기기도 하고 혹은 동창의 비밀경호 요원으로 발탁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소문일 뿐 그들의 실체를 제대로 아는 강호인은 거의 없었다.

덧붙이는 글 | # 다음 회에 나올 장면

“아니 되오. 저희가 가자면 가는 수밖에 없소이다.”
그러더니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면서 허리에 찬 도 하나를 스르렁, 뺐다.
날이 넓은 파풍도(坡風刀)다.
날에서 뻗친 음산한 기운이 실내를 압도한다.

월, 수, 금, 주3회 연재합니다.



태그:#무위도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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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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