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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 모여든 새들의 지저귐을 들으며 태양이 떠오르는 시간을 짐작한다. 살구 빛 햇살이 방문으로 스며들면 나는 문을 연다. 갖가지 색으로 피어난 튤립이 눈에 들어오고 마당 한쪽에 피어난 배꽃이 뽀얀 얼굴을 내밀고 있다. 풍경을 바라보며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때가 많다.
 
         사방에 피어 난 튤립을 찍어 사진으로 모았다.
▲ 튤립 사방에 피어 난 튤립을 찍어 사진으로 모았다.
ⓒ 김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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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읽고 제제를 부러워했었다. 나 또한 제제만큼이나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고, 자주 말썽을 일으켰으며, 아버지에게 벌을 받거나 매를 맞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다른 점이 있었다. 제제에게는 뽀르뚜까라는 친구가 있고 내게는 그런 친구가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은 뒤로 백발에 나이가 지긋한 친구가 생기기를 바랐다. 그 바람을 가지기 전, 나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해 준 아저씨가 있었다. 나의 아저씨는 우리 옆집에 살았으며 고물을 수집하는 일을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나를 보면 하늘 높이 들어 비행기를 태워주고, 많은 소소한 질문들을 해주던 사람이었으며, 내가 세상에서 가장 예쁜 아이라고 말해주었다. 사실 나는 겉으로 드러나기에 예쁜 아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날 아저씨가 사라졌다. 어디로 갔는지, 왜 떠났는지 알지 못했고 알 수도 없었다. 나는 제제처럼 너무나 많이 아파했었다. 매일 울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1학년, 선행학습을 한 적이 없던 나는 매일 나머지 공부를 해야 했다. 그 일로 아저씨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우는 일도 잦아들었다. 1학년 2학기가 다 지나갈 무렵에야 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처음 읽은 동화책이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였다. 책을 읽고 아저씨를 다시 떠올렸고 또다시 울기 시작했다. 그 후로 제제에 대한 부러움을 갖고 성장했다.

누군가가 사랑하는 사람은 가슴에 묻는 거라고 말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가슴 속에 만들어둔 상자속에 아저씨를 담아두었다. 어른이 된 후에도 뽀르뚜까 같은 친구가 찾아오기를 바랐다. 이제는 누군가의 뽀르뚜까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어르신들은 묻는다 "근디 뉘기여?"

시골로 내려와 마을을 자주 돌아다녔다. 마을의 지리도 익히고 나의 뽀루뚜까를 찾을 수도 있다는 기대를 품고서 말이다. 그러나 길을 오가는 사람은 거의 없고 먼 논밭에서 일을 하시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 것이 다였다. 매일 집에만 있을 수가 없어 논두렁 사이를 오가고 밭고랑 사이를 돌아다녔다. 그러면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어엉, 근디 뉘기여? 내가 아는 사람인감?"
"저기 회관 뒷집으로 이사 왔어요."
"아, 거시기!"

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나면 무조건 인사부터 했다. 나의 인사에 그들은 놀람과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낯선 젊은이가 다가오니 놀라고 알은체를 하니 기쁜 것이다. 그런데 어른들은 항상 내게 묻는다. 나를 아냐고? 나는 이 말을 들으면 환한 미소와 묵례로 답하고 다시 길을 걸었다.

이제 어르신들은 나를 알겠지, 하고 반갑게 인사를 하지만 '누구냐?'라는 물음을 여전히 내게 던진다. 기억이라는 것이 그리 오래 가지 않기도 하고 나란 사람이 두드러진 특징이 없어서 그런 것이리라. 그렇다고 그냥 스쳐 지나가버릴 수는 없다. 가다가 발병이 날 것 같아서 무조건 '안녕하세요!'라고 먼저 인사한다. 그렇게 몇 달을 보내고 나서 어른들은 달라졌다. 인사를 하면 내가 누구인지 묻지 않으며 인사 잘한다고 칭찬도 하신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웃음이 절로 난다.

나에게도 뽀르뚜까가 생겼다. 나이, 중요하지 않아 묻지 않았다. 그녀가 내게 웃어주고 손을 잡아주며 건네는 말들을 통해 내 마음이 그녀를 '뽀르뚜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는 매일 아침 밭을 살피기 위해 내가 살고 있는 집을 지나간다.

'또각. 또각. 또각.'

그녀가 나타났다. 나는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본다. 지팡이가 내게 말을 전한다.

"나 밭에 일 가. 넌 뭐혀? 쪼까 나와 보셩. 얼굴 좀 보장깨. 또각. 또각."

그녀가 등을 십오도 각도로 굽힌 채 힘겹게 걸어가고 있다. 곡선을 그리는 주름은 웃을 때마다 사랑스럽게 파도친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면 볼을 쓰다듬고 싶어진다. 나는 황급히 대문으로 달려나간다.

"안녕하세요? 어딜 가세요?"
"밭에 가. 아이고 이뻐 죽것네."

나의 뽀르뚜까는 나만 보면 이뻐 죽겠단다. 그 말을 남기고 또각 소리를 내며 앞으로 걸어간다.

"내가 그녀의 뽀르뚜까가 되는 거야"

우리 집 마당에는 온갖 꽃들이 무작위로 피어난다. 이것은 무작위 농법으로, 모든 것은 자연스러워야 하며 여러 가지 것들이 공생을 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집주인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꽃을 매우 사랑하는 그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꽃들을 보며 살고자 했다. 그의 바람 덕분에 내 오감이 호강을 하고 있다.

그가 혼자 살고 있는 집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없다. 말수가 적은 그를 사람들이 편안하게 대하기 힘이 들것이고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집이라 쉽사리 들어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사람의 발길이 뜸하던 그의 집에 또각이 할머니가 찾아왔다. 또각 소리가 나는 지팡이를 짚고 다녀서 내가 붙인 별명이었다.

사진을 찍어달라는 아주머니들의 말에 머쓱해하는 주인장
▲ 꽃밭을 둘러보는 아주머니들 사진을 찍어달라는 아주머니들의 말에 머쓱해하는 주인장
ⓒ 김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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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밭일을 도와주는 아주머니 두 분을 데리고 나를 찾아왔다.

"워메, 우찌 이리도 꽃이 많다요?"
"이리 소풍이라도 와야 쓰것소."

두 아주머니는 사방에 피어난 꽃들을 보고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마당 곳곳을 돌아다녔다.

"너무 이뻐서... 꽃도 이쁘고 야도 이뻐서 이리 와 봤소."

내 친구 또각이 할머니는 꽃들을 뒤로 하고 그와 내가 서 있는 곳으로 다가오며 집을 찾아온 이유를 말했다. 그리고 아주머니들을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나는 야가 이뻐 죽것어. 우쩨 이리도 이쁠까이."

내 입이 헤벌쭉해졌다. 보조개가 쑥 들어가고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웃음을 지으며 그를 그녀를 번갈아 바라봤다. 할머니의 말에 아주머니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꽃도 이쁘고 기분도 좋고 소풍 온 것 같으네. 사진이라도 한 방 찍었으면 좋것구마."

지팡이를 던지시며 젊어보이게 찍으라고 사인을 보낸다.
▲ 또각이 할머니 지팡이를 던지시며 젊어보이게 찍으라고 사인을 보낸다.
ⓒ 김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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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나오려다 테이블 위에 놓아둔 다트 초콜릿을 보았다. 그것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아주머니들에게 초콜릿을 나누어주고 그녀에게 다가가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는 내 친구니까 많이 받아요. 요거, 우울할 때 드셔요. 기분이 좋아져요."

그녀는 고맙다며 내 볼을 쓰다듬어 주었다. 나는 그녀의 손등을 잡고 온기가 느껴질 정도로 문질러댔다. 그리고 그녀를 꼭 껴안았다. 

'작다. 너무 작다. 작은 나보다 더 작다. 아이같이 내 품에 속 들어온다.'

그녀에게도 뽀르뚜까가 필요하겠지. 그래, 내가 그녀의 뽀르뚜까가 되는 거야.


태그:#할머니, #뽀르뚜까, #사진,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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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경의로움에 고개를 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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