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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 피닉스 파크에 있는 웰링턴 기념비. 높이 63미터로 유럽에서 가장 높은 오벨리스크다.
 더블린 피닉스 파크에 있는 웰링턴 기념비. 높이 63미터로 유럽에서 가장 높은 오벨리스크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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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한 역사학자에 따르면 인류가 문자기록을 남긴 이후 5560년 동안 1만4531차례나 전쟁이 일어났다고 한다. 해마다 평균 2.6건의 전쟁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무려 36.4억 명이 사망했다는 것이다.

이 기간 동안 전쟁이 없었던 해는 겨우 296년간뿐이었으니 인류사는 곧 전쟁사라 할만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프가니스탄·이라크·시리아 등 전 세계 20곳이 넘는 곳에서 전쟁과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한가롭게 남의 일이라고 말할 수 없는 까닭은 바로 우리가 전쟁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군인 약 170만 명이 사망해 20세기에 벌어진 전쟁 가운데 1·2차 세계대전 다음으로 사망군인이 많았던 한국전쟁. 한반도에서 벌어진 이 전쟁에서 민간인을 포함하면 약 300만 명이 사망했다. 군사전문가들이 20세기에 치러진 가장 비극적인 전쟁 중 하나라고 꼽고 있는 참극이다.

더욱 끔찍하고 슬픈 것은 그 비참한 전쟁이 정전이 아닌 휴전 상태로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서로간의 전면적 도발이 잠시 멈췄을 뿐, 끝나지 않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하루하루 보이지 않는 전쟁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훈련상황'이 아닌 '실제상황'이다.

평화는 노래나 동화 속에서만 나오는 꿈같은 일인가. 성경 미가서의 한 구절처럼 "칼을 녹여 쟁기를, 창을 녹여 낫을 만드는" 날은 멀고 아득하기만 한가. 

더블린 피닉스 파크엔 무기를 녹여 만든 농기는 아니지만 무기를 녹여 만든 기념비가 있다. 영국 총리에까지 오른 웰링턴(Arthur Wellesley, 1st Duke of Wellington) 장군의 업적을 기념해 만든 '웰링턴 기념비(Wellington Monument)'다.

높이 62m로 유럽에서 가장 큰 오벨리스크인 웰링턴 기념비의 네 면에는 부조물이 새겨져 있다. 웰링턴이 참가했던 인디아 전쟁·워털루 전투 등을 묘사한 것이다. 프랑스와의 숱한 전투에서 노획한 총과 칼의 쇠붙이를 녹여 부조를 만들었다.

웰링턴 기념비가 영국 런던이 아닌 아일랜드 더블린에 세워져 있는 까닭은 그가 더블린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런던의 정적들은 "더블린의 마구간에서 태어난 주제에!"라고 웰링턴을 비아냥거리곤 했다. 그는 예수의 탄생을 빗대 "마구간에서 태어났다고 다 소나 말은 아니다"고 맞받아쳤다.

맞수였던 웰링턴과 나폴레옹, 운명처럼 닮았구나

더블린 시내에 있는 웰링턴 장군의 생가. 그 어떤 영웅 못지 않은 세계적 영웅이 태어난 곳이지만 한국처럼 생가를 성역화하기는커녕 작은 안내표지 하나로 역사적 사실을 알리고 있을 뿐이다.
 더블린 시내에 있는 웰링턴 장군의 생가. 그 어떤 영웅 못지 않은 세계적 영웅이 태어난 곳이지만 한국처럼 생가를 성역화하기는커녕 작은 안내표지 하나로 역사적 사실을 알리고 있을 뿐이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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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링턴이 국민적 영웅의 반열에 오른 것은 1815년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을 격퇴하고 나서다. 이 승리는 웰링턴이 후일 영국 총리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데 있어서 큰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따지고 보면 웰링턴과 나폴레옹은 운명처럼 닮은꼴이 많다. 1769년 두 사람 모두 제국의 식민지 섬에서 태어났다. 웰링턴은 영국 식민지였던 아일랜드에서 태어났고, 나폴레옹은 프랑스 식민지 코르시카 섬에서 태어났다.

동갑내기였던 그들은 4남매 중 3명을 누이로 둔 것까지 일치했다. 두 사람 모두 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군인의 길을 걸었고, 수많은 전투를 통해 지도자로서 신망을 얻었다. 그리고 마침내 46세에 워털루에서 운명의 대회전을 벌인다. 결국 한 사람은 져서 모든 것을 잃었고, 한 사람은 이겨서 창창한 앞날을 보장받았다.

세기의 군사지략가였던 나폴레옹을 격퇴시킨 웰링턴. 워털루 전투를 의회에 보고하면서 그는 "아슬아슬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전쟁은 진 전쟁이며, 설령 이긴 전쟁이라 하더라도 비참하긴 마찬가지"라는 말을 후세에 남겼다.

웰링턴이 남긴 것은 이뿐이 아니다. 그와 관련된 일화 하나쯤은 알고 있을 정도로 웰링턴은 숱한 일화를 남겼다. 웰링턴과 소년, 웰링턴과 5분, 웰링턴과 늙은 하사관 등등이다. 일화 중엔 '용서'와 관련된 것도 있는데 이야기인즉 이렇다.

웰링턴에겐 죄를 짓고도 도무지 반성할 줄 모르는 병사가 한 명 있었다. 가르쳐도 안 되고, 영창에 집어넣어도 안 되는…. 결국 그는 병사를 사형시키기로 했다. 이때 한 병사가 뛰어와 웰링턴에게 읍소한다.

"장군님께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셨습니다. 다만 저 병사에게 안한 것이 딱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입니다."

그 말을 들은 웰링턴은 바로 사형을 멈추고 병사를 용서해준다. 구제불능이었던 병사가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 것은 물론이다. 용서는 힘들지만 용서의 열매는 아름답다는 것을 웰링턴의 일화를 인용해 강조하는 것이다. 

21세기에도 살아있는 웰링턴 장군

웰링턴 기념비의 부조물은 프랑스군의 총과 칼 등 무기를 녹여 만들었다.
 웰링턴 기념비의 부조물은 프랑스군의 총과 칼 등 무기를 녹여 만들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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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링턴 기념비의 네 면엔 웰링턴 장군이 참가했던 인디아 전쟁 등을 주제로 부조를 만들었다.
 웰링턴 기념비의 네 면엔 웰링턴 장군이 참가했던 인디아 전쟁 등을 주제로 부조를 만들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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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명언을 남긴 웰링턴은 심지어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교향곡과 요리와 부츠를 남기기도 했다.

그 유명한 베토벤의 <전쟁 교향곡>은 웰링턴으로 인해 탄생했다. 베토벤은 1813년 비토리아 전투에서 웰링턴이 프랑스군을 물리치고 승리한 것을 기념해 15분짜리 교향곡을 만들었다. 1·2부로 구성돼 차라리 교향시에 가까운 이 교향곡의 원제는 <웰링턴의 승리>다.

세월이 흘러 스웨덴 출신 팝 그룹 아바(ABBA)는 <워털루 Waterloo>를 세계적으로 히트시켰으니 웰링턴은 클래식과 팝 영역에서 모두 자신의 흔적을 남긴 '장군'이 됐다.

웰링턴의 이름을 딴 요리도 있다. 소의 안심에 거위 간과 버섯 졸인 것을 함께 넣고 페이스트리(pastry) 반죽으로 싸서 구운 요리인 '웰링턴 비프'다. 웰링턴 비프는 영국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 중 하나다.

웰링턴 비프의 유래와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아일랜드 출신인 웰링턴이 집에서 즐겨 먹던 '아이리시 요리'라는 설도 있고, 전장에서 웰링턴 장군의 영양 부족을 우려한 병사들이 빵 속에 쇠고기 스테이크를 넣어둔 것이 유래라는 설도 있다. 분명한 것은 웰링턴이 그 요리의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웰링턴은 21세기에도 사랑받고 있는 부츠를 남겼으니 무릎까지 올라오는 장화 '웰링턴 부츠'가 바로 그것이다. 이 부츠에 웰링턴의 이름이 붙은 까닭은 그가 처음 이 신발의 제작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전쟁터에서도 편하게 신을 수 있는 군화를 궁리하던 웰링턴은 목이 긴 장화를 만들 것을 제안했다. 웰링턴이 제안해 만들어진 목이 긴 장화는 궂은 전장에서 신고 다니기 안성맞춤이었다. 또 평시에 깨끗하게 닦아 실내에서 신고 있어도 보기 좋았다. 장화에 대한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번졌다. 소재를 고무로 바꿔 제작하자 여성들도 즐겨 찾는 부츠가 됐다. 

전쟁 영웅에서 대중문화트렌드까지 아우르는 웰링턴. 그는 기념비도 남기고, 부츠도 남기고, 요리도 남기고, 노래도 남겼지만 '평화'는 남기지 못했다. 어쩌면 평화는 처음부터 유산으로 상속받을 수 없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왜냐면 평화는 철저하게 관계의 산물이어서 관계를 맺어가는 것들이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니 말이다.

Thomas Lawrence가 그린 웰링턴 장군 초상화.
 Thomas Lawrence가 그린 웰링턴 장군 초상화.
ⓒ 런던 웰링턴 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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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평화지수 47위'가 의미하는 것

그래서 평화를 힘으로 지킨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남보다 더 큰 무력이 있어야 평화가 지켜진다는 것은 끝도 없을 덩치 키우기 게임을 하자는 얘기와 다를 바 없다. 상대가 군사기지 하나 세우면 나도 하나 세우고, 그러면 상대는 또 기지를 짓고 무기를 사들이고, 그것에 놀란 나는 또다시 기지를 파고 신무기를 사들이고….

영국의 비영리기구인 경제평화연구소(IEP·Institute for Economics and Peace)가 발표한 '2013 세계평화지수(GPI·Global Peace Index)'에서 한국은 47위를 차지했다. 세계평화지수는 세계 162개국을 대상으로 사회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지표 등 12개 분야에 걸쳐 이뤄지는 조사다.

이 조사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평화지수가 높은 나라는 아이슬란드였고, 덴마크, 뉴질랜드, 오스트리아, 스위스가 그 뒤를 이었다. 평화지수가 가장 낮은 나라는 아프가니스탄이었고, 소말리아, 시리아, 이라크 순이었다.

눈여볼 것은 한국의 순위 변동이다. 한국은 참여정부 시절인 2007년엔 32위를 기록했다. 이명박 정부 초기인 2008년, 2009년에는 32, 33위를 기록하더니 2010년엔 43위로 무려 열 계단이나 곤두박질치고 만다.

급기야 2011년에는 50위로 떨어졌다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던 2012년 42위로 올라섰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지 1년도 안된 2013년 조사에서 47위로 다시 다섯 계단이나 하락하고 말았다. 평화를 '주어'로 삼는 정권과 평화를 '단서'로 다는 정권의 차이인가.


태그:#웰링턴, #나폴레옹, #노무현, #이명박근혜, #워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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