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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조국강산(2005. 7. 23.).
 백두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조국강산(2005. 7. 23.).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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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전화

나는 미국에서 돌아온 다음날 내셔널아카이브에서 수집해온 제3차 한국전쟁 사진과 문서자료 546컷을 이호선 출판사 대표에게 넘겼다. 그러자 그는 2007년 6·25 한국전쟁 57돌 기념일 날에 맞춰 <지울 수 없는 이미지·3>이란 제목으로 한국전쟁 사진집을 펴냈다. 나는 그 책과 함께 이전에 나온 <지울 수 없는 이미지> 1, 2권 등 세 권을 한꺼번에 포장하여 워싱턴 용문옥 김준기 아저씨에게 특급으로 우송했다. 그 보름 뒤인 7월 10일 아침에 국제전화를 받았다.

"이 보라우, 박 선생! 내레 농문옥 김준기야."
"네, 아저씨! 반갑습니다."
"보내준 책 잘 보구 이서."
"벌써 도착했습니까?"
"기럼, 메칠 됐디. 아주 잘 만들어서."
"감사합니다."
"언제 한번 미국으로 오시라우."
"네. 여건이 마련되면 가겠습니다."

나는 그동안 펴낸 한국전쟁 사진집 <지울 수 없는 이미지> 시리즈가 좀 나가서 여비가 마련되면 다시 미국으로 갈 계획이었다. 그 며칠 뒤 고용우도 전화했다. 내가 보낸 책을 잘 받았다는 얘기와 당신이 알아본 바에 따르면 미국 의회에도, 트루먼기념관에도 한국전쟁 사진이 꽤 있다고 귀띔했다. 하지만 <지울 수 없는 이미지> 2, 3권은 초판 일천 부조차 두 해가 지나도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 일을 당분간 중단한 채 준기 아저씨의 이야기를 얼개로 삼아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소설 창작에 매달렸다.

모름지기 작가는 평생을 두고 꼭 쓰고 싶은 작품이 있다. 나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찾은 한국전쟁 사진 이야기와 워싱턴에서 만난 김준기 아저씨의 인생역정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여 <어떤 약속>이라는 가제의 장편소설을 집필하기로 했다. 작품 구상을 마친 뒤 이곳저곳에서 자료를 모으고 작품 배경이 되는 현장을 일일이 답사했다. 그런 뒤 산골 내 글방에서 두문불출한 채 그야말로 젖 먹던 힘을 다해 집필에 몰두했다.

서귀포에서 바라본 한라산(2013. 9. 16.)
 서귀포에서 바라본 한라산(2013. 9. 16.)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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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음

애초에는 일천여 매로 쓰려고 했는데 막상 쓰다 보니 이천 매 가깝게 늘어났다. 기필한 지 두 해를 넘겼다. 몇 번이나 퇴고 끝에 막 탈고를 앞둔 겨울날 아침 집 전화의 긴 벨소리에 잠이 깼다. 사실 이즈음 집 전화는 거의 울리지 않았다. 대부분 소통은 손전화 문자나 음성으로 오갔다. 어쩌다가 일본이나 미국 등지의 해외 지인들이나 시골에 사는 일가친척들이 집 전화로 연락했다. 나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긴 신호의 전화를 받았다. 내 예상대로 국제전화였다.

"네, 박상민입니다."
"워싱턴 용문옥 최순희입니다."

그런데 최순희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순간 나는 그 목소리에서 왠지 불길함을 느꼈다.

"네, 최 여사님. 그동안 별고 없으세요?"
"네. 염려 덕분에 …."
"준기 아저씨 안녕하세요?"
"……."

수화기에서 최순희가 조용히 흐느꼈다. 

"… 실은 일주일 전에… 우리 집 영감님이."
"네에?"
"… 갑자기 뇌일혈로 쓰러져 이틀 만에 돌아가셨어요. …."
"네에!…."
"……."

한 전우의 장례식에 조총을 쏘고 있다(1953. 5. 16.).
 한 전우의 장례식에 조총을 쏘고 있다(1953. 5. 16.).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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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념

다시 수화기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함께 흐느꼈다. 2~3분 대화가 없었다.

"오늘 삼우제를 지내고 온종일 영감님 유품을 정리하다가 수첩에 박 선생님 전화번호가 있기에 알려드리는 게 도리일 것 같아…."
"감사합니다. 어디에 모셨습니까?"
"워싱턴 디시에 있는 공원묘지에…."
"아, 네."

"미국에 오시면 우리 영감님 없다고 그냥 가시지 마시고 꼭 들리세요."
"네. 그럼요. 아저씨가 잠든 공원묘지에도 꼭 들러야지요. 최 여사께서도 한국에 나오시면 꼭 알려주십시오."
"그러지요. 근데 이미 여든을 넘긴 나이라…. 아무튼 박 선생님, 좋은 작품 많이 쓰세요. 특히 지난 한국전쟁 이야기를.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그 시절 이야기를 잘 몰라요.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 지도 물론 모르고요."
"지금 그때 이야기를 장편소설로 쓰고 있습니다."

"우리 영감님이 그 작품 보시고 돌아가셨으면 좋았을 텐데…."
"하늘나라에서 보시고 계시겠지요."
"아마 그러시겠네요. 미국에서 박 선생님 만난 뒤 우리 영감님이 무척 좋아하셨어요. 당신 가슴속에 묻힌 이야기를 다 쏟자 마치 한바탕 신원 굿으로 그동안 쌓인 한을 죄다 씻어 버린 사람처럼…."
"저도 미국에서 뜻밖에도 준기 아저씨를 다시 만난 걸 일생일대의 대단한 행운이라 생각합니다. 아저씨 때문에 제가 늘그막에 고향을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을 쓸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셨다면 무척 다행입니다. 그럼, 부디 건강하세요."
"전화 고맙습니다. 최 여사님도 건강 조심하십시오."

나는 수화기를 제자리에 놓은 뒤 그 자리에서 김준기 아저씨가 영원히 잠든 미국 쪽을 향하여  깊이 고개 숙이며 오래도록 묵념을 드렸다.  

"준기 아저씨, 부인에게 어머니에게 약속 지키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제는 편히 눈 감으십시오."

백두산의 아침(2005.7. 23.)
 백두산의 아침(2005.7. 23.)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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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약속 1, 2부 전편 끝]

* 다음 회는 [후기]로 한 회가 더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여기에 실린 사진은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들과 조국강산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한 것입니다.



태그:#<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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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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