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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개월 동안 남편(미국인)과 인도·네팔·동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한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여자와 미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남자가 같이 여행하며 생긴 일, 또 다른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며 겪은 일 등을 풀어내려고 합니다. - 기자 말

인도의 상징인 아그라의 타지마할 (그림 : 더스틴)
 인도의 상징인 아그라의 타지마할 (그림 : 더스틴)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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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하게 내리쬐는 아그라의 하얀 햇빛 아래에는, 구멍 난 천 그늘에 숨은 사람들이 산다. 도시에서 쓸려 나온 쓰레기 더미 사이사이 나무를 세우고, 그 위에 천을 얹어 만든 집. 관광객을 보고 밖으로 달려 나왔다가 아무것도 얻지 못한 어린아이가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인도의 상징인 타지마할을 배경으로, 아그라 슬럼가의 풍경, 그리고 인도의 여느 도시에 지지 않을 소음과 공해가 시야를 가린다.

타지마할을 본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렌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라던데. 타지마할의 입장료는 인도의 관광지 중 가장 높은 수준인 750루피(약 1만 5000원)다. 멀리서 뿜어져 나오는 아름다운 자태의 아우라를 보니, 비싼 입장료를 치를 만도 하겠다 싶다. 하지만 인도 사람이라고 단돈 10루피(한화 약 200원)를 내고 들어가는 꼴을 보고 있자니, 주머니에 든 돈의 무게가 다른 건 알지만 심술이 나고 배가 꼬인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인 타지마할. 타지마할의 입장료는 인도의 관광지 중 가장 높은 수준인 750루피(약 1만 5천원)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인 타지마할. 타지마할의 입장료는 인도의 관광지 중 가장 높은 수준인 750루피(약 1만 5천원)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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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입장료가 비싸다고 타지마할을 과감히 지나쳐 버릴 수도, 이미 낸 돈이니 잊어 버리고 즐길 수도 없는 소인배다. 750루피면 더스틴과 나 두 명이 종일 먹고, 이동하고, 밤에 따뜻한 곳에서 몸을 뉘일 수 있는 돈이다. 하루 예산을 훌쩍 넘는 입장료를 거듭 생각하고 있자니 꼬였던 마음이 이제는 쓰라리기까지 하다. 입구 저 멀리 작게 반짝이는 타지마할은, 10루피를 내고 들어와서 내 앞을 가로막은 관광객 덕에 잘 보이지도 않는다. 누구를 탓할 일도 아니다. 오후에는 사람이 많이 몰리니 아침 일찍 방문하라고 수많은 사람이 충고하지 않았던가. 게으르고 나태하고 남의 말이라곤 도대체 들어먹지 않을 양이라면, 원망도 그만하고 심술도 내려놔야지.

'타지마할'이라는 이름은 무굴제국의 5대 황제였던 샤 자한의 아내 이름 '뭄타즈'에서 따 온 것이다. 샤 자한은 델리의 붉은 요새(Red Fort)와 자마 마스지드(Jama Masjid), 파키스탄 라호르에 있는 라호르 요새(Lahore Fort) 등, 인도 대륙 전역에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지은 왕이다.

아그라 성 내부. 아그라 성은 16세기말 무굴 제국의 악바르 대제가 수도를 델리에서 아그라로 옮기면서 건축하기 시작한 것으로, 악바르 대제의 손자인 샤 자한이 완성하였다.
 아그라 성 내부. 아그라 성은 16세기말 무굴 제국의 악바르 대제가 수도를 델리에서 아그라로 옮기면서 건축하기 시작한 것으로, 악바르 대제의 손자인 샤 자한이 완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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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라 성은 타지마할과 야무나 강을 사이에 두고 2.5km 떨어진 곳에 마주보고 있다.
 아그라 성은 타지마할과 야무나 강을 사이에 두고 2.5km 떨어진 곳에 마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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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 자한의 건축물 중 가장 유명한 타지마할은, 샤 자한이 끔찍이도 사랑한 뭄타즈를 위해 지은 그녀의 무덤이다. 15세에 페르시아의 공주였던 아르주만드 바누 베금과 결혼한 샤 자한은, 아내가 된 왕비를 모든 여성 가운데 가장 빼어나다고 칭송하며 '뭄타즈 마할,' 번역하면 '황궁의 보석'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어준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와 한시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결혼 19년 동안 14명의 아이를 출산한다.

사랑하던 아내가 죽자 슬픔에 빠진 샤 자한은 식음을 전폐하다 머리가 하얗게 세 버린다. 그리고 아내에 대한 사랑으로, 22년에 걸쳐 외국의 온갖 값비싼 장식재를 들여와 크고 화려한 묘역인 타지마할을 짓는다.

요약하면 '샤 자한과 뭄타즈는 서로를 너무나 사랑했고, 그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로 타지마할이 완성됐다'이다. 이야기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꼬임 없고 직선적인, 해피엔딩 스토리를 듣고 감동하기엔 때가 너무 탔나.

"뭄타즈랑만 결혼한 게 아니네. 뭐야 숭고한 사랑 어쩌고 하더니."

다행히 결점을 찾았다. 물론 샤 자한이 아내를 여럿 거느렸다고 해서 뭄타즈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결론짓기는 어렵다. 그건 그렇다 쳐도, 그렇게 사랑하는 여인이라면 출산의 고통도 조금 생각해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19년 동안 14번의 출산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뭄타즈는 결국, 14번째 아이를 밴 만삭의 몸으로 샤 자한을 따라 고원 지역으로 원정을 나갔다가 눈을 감는다.

순수하고 고결해 보이는 샤 자한과 뭄타즈의 러브스토리에 찬물을 끼얹고 나니 조금 마음이 풀린다. 이야기도 슬슬 마음에 들기 시작한다. 뭄타즈가 죽은 지도 오래. 샤 자한도 늙어 병에 들자 왕위를 노린 아들들의 권력 다툼이 심해진다. 권력을 잡은 셋째 아들 아우랑제브는 형 다라 시코를 공개 참수형에 처하고 아버지인 샤 자한을 아그라 성에 감금한다. 샤 자한은 뭄타즈의 무덤 타지마할이 멀리서 바라보이는 아그라 성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다.

아그라 성에서 바라본 타지마할. 샤 자한은 말년에 그의 아들인 아우랑제브에 의해 아그라 성으로 유폐된다. 샤 자한은 타지마할이 가장 잘 보이는 무삼만 버즈(Muasamman Burj)에 갇혀 있다가 생을 마감했다.
 아그라 성에서 바라본 타지마할. 샤 자한은 말년에 그의 아들인 아우랑제브에 의해 아그라 성으로 유폐된다. 샤 자한은 타지마할이 가장 잘 보이는 무삼만 버즈(Muasamman Burj)에 갇혀 있다가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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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로 비극적일 필요는 없었는데. 순수한 사랑에 결점을 내겠다고 작정을 하고 자료를 읽어본 내 탓인 것 같아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든다.

"멋있다. 그렇지?"

샤 자한과 뭄타즈를 상상하며 타지마할을 한 바퀴 돌아본 우리는 무덤 건물이 정면으로 보이는 다리 아래 작은 공간을 아지트로 삼아 자리를 잡았다. 샤 자한이 뭄타즈를 사랑한 방식은 잘못되었다고 시니컬한 소리를 지껄여 놓던 참이었지만, 밸런타인 데이에 더스틴과 함께 오묘하게 빛나는 타지마할을 바라보고 있자니 로맨틱한 감정이 들기도 하다.

타지마할의 내부. 신발을 벗고 타지마할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외국인들에게는 신발을 감쌀 수 있는 비닐 주머니를 제공한다.
 타지마할의 내부. 신발을 벗고 타지마할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외국인들에게는 신발을 감쌀 수 있는 비닐 주머니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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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뭄타즈를 위해 건설한 묘역인 타지마할은 22년에 걸쳐 완공되었다.
 아내 뭄타즈를 위해 건설한 묘역인 타지마할은 22년에 걸쳐 완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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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멋있는데. 좀 깨름칙해. 무덤에 새겨진 글씨 봤지? 세상이 멸망하면 샤 자한과 뭄타즈가 부활할 거라는 내용이래. 멸망한 세상에 둘만 부활해서 뭘 하려는 걸까?"

"신하들이 뒤치다꺼리 다 해 주고 먹고 잘 걱정 없으니까 좋은 세상이다 싶었겠지. 둘만 살아남아 봐. 허구한 날 사냥하랴 잠자리 구하랴 얼마나 힘들 거야. 그래도 인구는 빨리 늘겠네. 19년 동안 14명 낳았으니까 30년이면.."

타지마할의 꼭지를 잡는 듯한 포즈를 취하는 사람, 정 중앙에 자리를 잡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사람, 같이 온 친구들의 조합을 5번 정도 바꿔 사진을 찍은 후에야 겨우 다음 관광객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사람. 타지마할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의 행렬이 슬라이드쇼처럼 흘러간다.

인도에서 가장 유명한 명소인 타지마할에는, 타지마할을 배경으로 온갖 포즈를 취해 사진을 찍는 관광객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인도에서 가장 유명한 명소인 타지마할에는, 타지마할을 배경으로 온갖 포즈를 취해 사진을 찍는 관광객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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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틴. 너에게 여행이란 무엇이냐."
"음... 스스로를 새로운 상황에 놓고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
"에이.. 그런 식상한 거 말고. 예를 들면.. 여행이란, 길거리에서 코를 파도 하나도 창피하지 않은 나라에서 사는 것. 내가 요새 그렇거든."
"더러워! 음... 여행이란, 무엇을 먹더라도 마살라가 들어있는 악몽을 경험하는 것."
"여행이란, 동전 대신 사탕 한주먹을 잔돈으로 받는 것."
"여행이란, 고기 없이 근 한 달을 살아도 살 만하구나 깨닫는 것."
"여행이란, 오늘 몸을 뉘일 방 한 칸을 찾는 것이 하루의 가장 중요한 미션이 되는 것."
"여행이란, 짜이 한 잔 마시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일 수도 있구나 깨닫는 것."

한 시간여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동안, 수많은 관광객이 똑같은 표정과 포즈로 사진을 찍고 지나갔다. 샤 자한이 타지마할을 건축한 것. 관광객이 그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것. 사라진 것들, 그리고 사라질 것들에 대한 아쉬움 때문일까. 뭄타즈를 그리워하던 샤 자한 또한 이제는 없다. 샤 자한이 소망하던 부활의 꿈이 이루어질지는 모르겠다.

샤 자한은 부활을 원할 정도로 뭄타즈와의 재회를 소망했지만, 뭄타즈는 그렇게 사는 것이 끔찍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샤 자한도 부활한 뭄타즈와 재회해 봤자 이게 아닌데 싶을지도 모른다. 어쨌건 모두 지나간 일. 다시는 없을 일. 다시는 없을 사랑. 샤 자한이 뭄타즈를 얼마나 사랑했건, 그들은 세상이란 무대를 떠났고 더스틴과 나는 이곳에 있다.

측면에서 본 타지마할. 타지마할은 무굴제국의 황제 샤 자한이 끔찍이도 사랑했던 아내, 뭄타즈를 위해 지은 무덤이다.
 측면에서 본 타지마할. 타지마할은 무굴제국의 황제 샤 자한이 끔찍이도 사랑했던 아내, 뭄타즈를 위해 지은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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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마할과 아그라 성을 다녀온 탓에 예산에 큰 타격이 있었지만, 밸런타인데이라는 명목하에 조금 더 무리를 하기로 했다. 우리는 가이드북에 있는 식당 리스트 중 가장 비싸고 분위기 좋아 보이는 식당을 찍었다. 좀처럼 지갑을, 아니 복대 속의 지퍼를 잘 열지 않는 우리지만, 오늘만큼은 둘만의 축연을 열 것이다. 서로를 위해 보석 박은 큰 무덤은 세워주지 못할 테니, 오늘 하루, 찰나를 진하게 함께 하는 데 집중해야지.

우리가 고른 식당은 무굴식 요리를 이 근방에서 가장 잘한다는 곳이다. 향신료에 절여 화덕에 구운 코끝 찡한 고기와 난! 하지만 사다르 바자(Sadar Bazaar) 입구 바로 맞은편에 있다던 식당은 그곳에 있지 않았다. 골목 구석구석을 뒤져 봐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현지인들에게 인기가 많다던, 건물이 커서 한눈에 찾을 수 있을 거라던 그 식당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한 시간여를 헤맸다. 무굴음식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싶다. 배가 고프면 성질이 포악해지는 나의 배꼽 폭탄이 터져 낯선 거리에서 광기를 부리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저거다!"

아그라 호텔방의 만찬. 여행이란, 타지마할을 바라보는 최고급 호텔 식당 보다, 차가운 바닥에 음식을 늘어놓고 먹는 저녁 식사가 더 로맨틱해질 수 있는 마법이다.
 아그라 호텔방의 만찬. 여행이란, 타지마할을 바라보는 최고급 호텔 식당 보다, 차가운 바닥에 음식을 늘어놓고 먹는 저녁 식사가 더 로맨틱해질 수 있는 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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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진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바라던 무굴 식당이 아닌, 'TIME 2 EAT!'이라고 쓰여 있는 노란색 간판이었다. 'MAMA CHICKEN,' 'FRANKY HOUSE' 'TIME 2 EAT!' 같은 이름을 덕지덕지 붙여 놓은 간판 아래에는, 화덕에서 갓 나온 짜릿한 고기와 뜨거운 난을 먹고 있는 마초스러운 인도 남자들이 밤을 즐기고 있었다.

화덕에서 피어나는 자욱한 연기에 홀린 듯 들어갔다 나온 우리 손에는 먹음직스런 버터치킨과 탄두리 치킨, 난이 든 검은 봉다리가 양손 가득 들려 있었다. 이걸로 끝낼 순 없다. 우리는 건너편에 있는 주류점으로 가서 차갑게 빛나는 킹피셔 맥주 두 캔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인도에서 유일하게 마살라가 들어있지 않은 음식, 피자도 한판 사서 날아갈 듯 숙소로 향했다.

침대 옆에 얼마 남지 않은 작은 공간에 은박지로 싸여있던 음식을 펼쳤다. 무굴식 고급 식당의 테이블 대신 차가운 타일 바닥에 앉았다. 옷을 잘 차려입은 웨이터 대신 얼굴이 새카맣게 탄 더스틴이 캔맥주를 따준다.

여행이란, 타지마할을 바라보는 최고급 호텔 식당보다 차가운 바닥에 음식을 늘어놓고 먹는 저녁 식사가 더 로맨틱해질 수 있는 마법이다.

타지마할은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색이 시각에 따라 다르다. 신비로운 푸른빛을 보고 싶다면 밤에, 오묘한 붉은 빛을 보고 싶다면 석양 무렵에 찾는 것이 좋다.
 타지마할은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색이 시각에 따라 다르다. 신비로운 푸른빛을 보고 싶다면 밤에, 오묘한 붉은 빛을 보고 싶다면 석양 무렵에 찾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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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타지마할, #아그라, #뭄타즈, #샤 자한,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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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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