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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남 전재국씨가 10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앞에서 전 전 대통령의 미납 추징금 1672억원에 대한 자진납부 계획을 발표한 뒤 고개숙여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 대국민 사과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남 전재국씨가 10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앞에서 전 전 대통령의 미납 추징금 1672억원에 대한 자진납부 계획을 발표한 뒤 고개숙여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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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대국민사과성명을 통해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남인 전재국씨는 "부모님이 현재 살고 계신 연희동 자택도 환수에 응하겠다, 다만 저희 자녀들은 부모님께서 반평생 거주하셨던 자택에서 남은 여생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연희동과 관련된 조선시대 역사를 살펴보면 이 집안이 연희동 자택에 집착하는 게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 왜냐하면, 조선 초기부터 연희동은 '좋은 동네'였기 때문이다.

무학대사가 추천한 연희동

조선 건국의 주역 중 하나인 무학대사는 무악산(지금의 안산) 서쪽 지역에 도읍을 세우자고 주장했다. 무악산 서쪽은 지금의 서대문구 연희동과 신촌동이 있는 곳이다. 동교동과 상도동도 이 지역에 포함된다. 만약 무학대사의 제안이 채택됐다면 연희동이나 연세대학교 같은 곳에 경복궁이 세워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수도가 된 곳은 정도전이 추천한 북악산(청와대 뒤편) 남쪽이었다.

조선 왕실은 무악산 서쪽을 수도로 선정하지는 않았지만, 이곳을 꾸준히 이용하고 관리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곳을 신성한 땅으로 받들었다. 그중에서도 연희동이 특히 그러했다. 구한말에 영의정을 지낸 거물이자 법전 <대전회통>의 편찬 책임자인 이유원이 지은 <임하필기>라는 책이 있다. 일종의 백과사전에 가까운 이 책의 제13권에 이런 문장이 있다.

"연희궁은 경성 서쪽 15리의 양주 땅에 있다. 정종 임금이 왕위를 물려준 뒤 가끔 이 궁에 왕림하였다고 한다."

연희동에 상왕을 위한 별궁인 연희궁을 지었다는 이야기다. 서울 서쪽에 양주가 있었다는 표현이 이상할 수도 있지만, 지금의 양주가 서울 북쪽에만 있는 것과 달리 과거의 양주는 서울과 한강 이북을 포함하는 꽤 넓은 지역이었다.

그런데 <임하필기> 기록에는 약간의 오류가 있다. <임하필기>에서는 연희궁이 상왕 정종(태종 이방원의 형)을 위한 궁이라고 했지만, 세종 2년 1월 2일자(음력) 즉 1420년 1월 16일자 <세종실록>에 따르면 이 궁은 정종이 죽은 이듬해인 1420년 이후에 건설됐다. 이 궁을 지을 당시의 상왕은 태종이었으므로, 연희궁은 정종이 아닌 태종을 위한 별궁이었을 것이다. 

왕실에서 연희동에 별궁을 설치한 것은 이곳이 명당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위의 <세종실록>에서는 연희동을 두고 '무악의 명당'이라고 했다. 이곳은 상왕이 항상 거주하는 곳이 아니라 '상왕이 한양 서쪽에 있는 게 풍수학적으로 좋다'는 판단이 들 때 체류하는 곳이었다. 위의 <세종실록>에서 연희궁의 규모가 100칸 미만이었다고 한 점을 보면, 700칸이었던 임진왜란 이전의 경복궁에 비해 7분의 1이 안 되는 크기였음을 알 수 있다. 

1720년대에 제작된 <도성도>에 표시된 연희궁(별표). 연희궁은 연희동에 있었던 별궁이다. 가운데의 직사각형 공간은 한성이다.
 1720년대에 제작된 <도성도>에 표시된 연희궁(별표). 연희궁은 연희동에 있었던 별궁이다. 가운데의 직사각형 공간은 한성이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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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연희궁이 처음부터 연희궁으로 불린 것은 아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연희궁이란 명칭은 세종 7년 8월 30일 즉 1425년 10월 11일부터 사용되었다. 그 전에는 서쪽에 있는 별궁이나 행궁이란 의미에서 서이궁(西離宮)으로 불렸다. 연희궁이란 궁궐이 있다는 이유로 연희동은 궁동(宮洞) 혹은 궁말로 불리었다.

연희궁은 처음에는 명당에 상왕의 거처를 제공할 목적으로 지은 곳이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용도가 점차 불어나기 시작했다. 다목적 용도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 뒤에 세종은 한양 서쪽에 행차할 때 잠시 들렀다 쉬는 곳으로도 연희궁을 활용했다.

세종은 재위 13년부터는 연희궁에 잠실을 설치하고 뽕나무와 과수나무를 심도록 했다. 잠실을 설치한 목적은, 왕실이 직접 양잠을 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국가의 핵심 산업 중 하나인 양잠업을 권장하기 위해서였다. 이른바 친잠(親蠶)의 목적으로도 연희궁을 활용했던 것이다. 이런 잠실은 연희동뿐만 아니라 지금의 서울 서초구 잠원동과 송파구 잠실동에도 있었다.

연희궁을 나쁜 용도로 활용한 연산군

세종의 아들인 세조 때는 연희궁의 용도가 좀더 확장됐다. 세조는 직접 농사를 지어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고자 이곳에 농경지까지 조성했다. 이른바 친경(親耕)의 기능이 연희궁에 더해진 것이다. 왕실이 이곳을 별궁으로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여기서 친잠과 친경까지 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곳을 중요시했음을 보여준다.

연희궁을 가장 나쁜 용도로 활용한 군주는 연산군이었다. 쿠데타로 쫓겨나기 전년도인 1505년에 그는 이곳에 궁중 연회장을 만들었다. 그가 한창 술과 여자에 빠져 있을 때의 일이었다. 그는 이곳을 먹고 마시고 노는 장소로 활용했다.

연산군이 나쁜 전례를 만들기는 했지만, 조선의 역대 임금들은 연희궁을 비교적 신성한 용도로 사용했다. 그들은 왕의 안전 혹은 행차와 산업의 발전을 위한 목적으로 이곳을 활용했다. 연희동을 포함한 무악산 서쪽에 수도를 세우자는 무학대사의 제안은 채택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이곳은 수도에 버금가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셈이 되었다.

무학대사가 지목한 무악산 서쪽은 조선의 상왕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전직 대통령들과도 인연이 깊다. 김대중·김영삼·최규하 전 대통령의 사저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저가 이곳에 있다. 이곳은 대한민국판 '상왕의 도시'가 되었다. 

연산군이 연희궁의 신성성을 훼손시킨 것처럼, 전두환도 연희동의 역사적 의미를 매우 크게 훼손시켰다. 그는 이곳에 사는 동안에 국민적 단죄를 받고 전직 대통령의 권위를 상실했다. 그가 1995년에 연희동 골목에서 검찰의 소환 통보를 무시하는 '골목 성명'을 발표한 일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그는 이곳에서 전혀 '상왕' 답지 않게 살다가 결국 검찰 수사와 여론의 힘에 못이겨 연희동에서 쫓겨날 운명에 처해 있다.


태그:#연희동, #연희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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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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