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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하는 유엔군 수송선(LST)을 타고자 부두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피난민들(흥남, 1950. 12. 19.).
 철수하는 유엔군 수송선(LST)을 타고자 부두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피난민들(흥남, 1950. 12. 19.).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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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 키스

이튿날 아침 준기는 전화로 엘에이병원에 휴가를 연장했다. 시카고에 며칠 더 머물며 순희를 돌보기 위해서였다.

"그만 돌아가세요. 그러다가 해고당해요. 저 이제 혼자 지낼 수 있어요."
"아니오. 무슨 병이든 회복기가 중요하디요. 내레 이 세상에서 당신이 가장 소둥(소중)합네다. 직당(직장)이야 해고당하면 다시 구하면 되디 않수."
"배려해 줘 고마워요."
"내레 요기 오기 전에 이미 시민권을 신청했디요. 아마 이제 곧 미국시민이 될 거야요."
"잘 하셨어요. 당신 미국시민이 되는 것 미리 축하해요."

순희는 준기에게 다가가 축하의 긴 키스를 나눴다.

"사람이 아프면 병상에서 별 생각을 다하나 봐요."
"기래 무슨 생각?"
"당신 이번에 엘에이 돌아가시거든 이참에 퇴직하세요. 사실 미국에서는 직장에서 받는 돈은 아무리 모아도 부자가 되기는 매우 힘들어요. 그동안 미국에서 살아봐서 알겠지만 이곳에서 월급으로는 큰돈을 모을 수가 없어요. 급료에서 각종 세금과 연금을 칼같이 떼어 가니까요."
"덩말 기렇더구만요."
"이참에 아주 내 사업을 시작하세요. 서양 사람들은 '돈을 가지고 노크하면 문은 저절로 열린다'고 했어요. 당신이 부자가 되면 아마 고향에 계신 어머니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덩말?"

인천시민들이 플랫폼을 가득 메운 채 피난열차를 기다리고 있다. 선로 위의 무개화차에도 피난민들로 가득 찼다(인천, 1951. 1. 3.).
 인천시민들이 플랫폼을 가득 메운 채 피난열차를 기다리고 있다. 선로 위의 무개화차에도 피난민들로 가득 찼다(인천, 1951. 1. 3.).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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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권

"그럼요. 두고 보세요. 아마 내 말이 귀신처럼 맞을 겁니다. 당신 솜씨라면 미국에서 한국식당을 내도 성공할 수 있을 거예요. 나도 당신 덕분에 늘그막에는 여왕처럼 우아하게 살고 싶어요."
"나두 당신을 언젠가는 귀부인으로 맨들고 싶습네다. 하지만, 내레 이 솜씨로?"
"말씀 고맙습니다. 당신 솜씨로 충분해요. 세계 일류 요리사는 모두 남자들이에요."
"사실은 우리 오마니 솜씨가 아두 돟아시요(좋았어요). 어린 시절에 오마니가 만들어 준 냉멘이나 만둣국 맛이 아직도 내 입에 남아이시오(남아있어요)."
"그 오마니의 맛을 되살리세요. 재료는 한국에서 부쳐오면 돼요."
"알가시오."
"냉면이나 만두 재료를 적어보세요. 내 순옥이한테 중부시장이나 동대문시장에서 구해 보내라고 할 테니."
"이참에 아주 냉멘 뽑는 틀도 하나 사 보내라고 하라요."
"그러지요.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어요. 우리 이 자리에서 아주 가게 이름도 지읍시다. 당신 고향을 정확히 말해 보세요."
"펭안북도 넹벤군 농산(용산)면 구당동(구장동)이디요."
"출신학교는 어디예요."
"농산소학교와 농문중학교를 다녀서요(다녔어요). '농문'이란 학교이름은 우리 고향에 농문산(용문산)에서 땄디요. 또, 고향 마을 앞에는 청천강이 흐르디요."
"그럼, '영변' '용산' '구장' '용문' '청천' 다섯 개 지명을 후보로 좁힌 뒤 이 가운데서 결정합시다."
"좋은 생각이야요. 내레 매사 당신 아이디어를 따를 수 없구만요. 당신이 결정하시오. 그대로 따르가시오(따르겠어요)."

"음 … '용문옥'이 좋겠어요."
"좋습네다. 농문산(용문산)은 묘향산맥에서 우뚝 솟은 멧부리디. 이 산에는 천연동굴도 많구. 앞으로 개발만 하면 아마도 세계적인 관광디가 될 거야요."
"그럼, 우리가 '용문옥'으로 먼저 용문산을 알립시다."
"돟습네다."

시카고의 한 교회
 시카고의 한 교회
ⓒ 재미동포 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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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1983년 가을, 마침내 준기는 엘에이에서 병원을 퇴직했다. 준기는 엘에이생활을 정리하고 추수감사절 휴가에 맞춰 아예 시카고 순희 집으로 봇짐을 싸서 왔다. 준기는 순희를 만나자마자 시민권을 보여 주었다.

"내레 이 시민권을 받은 건 오로디 당신 때문이야요. 이걸 받을 때 기분 참 묘하더구만. 내레 소시적 한때 미제를 타도하겠다구 조선인민군으로 붉은 머리띠를 둘렀던 사람이 미국에 충성을 하겠다고 성조기 앞에서 선서를 하구 미국국가를 부르는데 만감이 교차했디."
"왜, 억울하세요?"
"기런 게 아니라 내레 인생이 천박한 듯해서…."
"자학하지 마세요. 아직 다 산 게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는 일만 남았어요. 언젠가 당신이 찰스 다윈의 말을 했지요. 살아남는 종은 변화에 가장 빠른 종이라고요. 우리가 미련스럽게 살았다면 아마 그때 유학산 구더기 밥이 되었을 거예요. 너무 심각하게 생각지 말아요. 건강에 좋지 않아요."
"알가시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게 인생이지요. 앞으로 우리가 조국을 위해 살게 될 날도 있을 거예요. 그러기 위해 지금 우리가 열심히 사는 거예요. 사람이 죽은 뒤에는 그가 한 일만 남지요."
"당신은 늘 나보다 한두 수 앞을 내다봅네다."

그들은 존과 수잔이 결혼식을 올린 뒤 한 달이 지난 다음 시카고의 교회에 가서 조용히 결혼식을 올렸다. 증인 겸 하객은 존 부부였다.

한인교회 이용준 목사님은 주례 말씀으로 행복하고 원만한 결혼생활을 하려면 "한 눈만 뜨고 살라"고 했다. 곧 상대의 장점만 보고 살라는 말씀이었다. 이웃에 사는 재미동포들이 뒤늦게 알고서 두 사람의 늦은 결혼을 축하해 주었다.

임시로 마련한 미 해병대 전사자 묘지(함흥, 1950. 12. 13.).
 임시로 마련한 미 해병대 전사자 묘지(함흥, 1950. 12. 13.).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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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들과 재미동포가 보내준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태그:#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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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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