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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보> 1987년 5월 25일자 11면. 사진 아래 "都心 路上 聯合 예배…光州기독교선교자유수호위원회가 주최하는 범교단 '나라를 위한 연합예배'가 5천여 명의 목사와 신도가 참석한 가운데 錦南路 YMCA 주변 일대에서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나라를 위한 연합예배> 기도하는 사진(1987년 5월 24일, 광주 금남로) <광주일보> 1987년 5월 25일자 11면. 사진 아래 "都心 路上 聯合 예배…光州기독교선교자유수호위원회가 주최하는 범교단 '나라를 위한 연합예배'가 5천여 명의 목사와 신도가 참석한 가운데 錦南路 YMCA 주변 일대에서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광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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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언론에서 두 장의 사진을 보았다. 한 장은 '국가정보원 선거개입 진상규명 개신교 목회자 1000인 시국선언' 사진이었다. 나는 목사가 아니기 때문에 그 선언에 동참할 수 없었지만, 그 선언을 가슴으로 뜨겁게 지지한다. 그리고 또 한 장은 김병균 목사님을 비롯하여 광주 전남의 세 목사님이 국정원의 불법 대선개입을 규탄하면서 삭발한 사진이었다.

세 목사님은 국정원 광주지부 앞에서 "하나님의 正義를 실현하라!"는 종이를 가슴에 붙이고 계셨다. 삭발하신 김병균 목사님의 얼굴을 보는데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지난 1987년 6월 항쟁에서 생명을 걸고 헌신하신 노(老) 목사님이, 그로부터 26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이렇게 삭발하면서까지 저항하실 수밖에 없는 이 현실 때문이었다.

나는 김병균 목사님을 직접 뵌 적이 없다. 다만 1987년 봄에 광주 금남로에서 개최된 <나라를 위한 연합 예배> 관련 자료를 최근에 검색하다가, 우연히 김병균 목사님의 짧은 인터뷰가 수록된 기사를 읽게 되었다. 1987년 봄, 그 도심 노상의 연합 예배는 3만 명의 광주 기독교인들이 진보 교단과 보수 교단을 가리지 않고 하나로 연합하여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한 집회였다. 그 연합 예배는 역사적으로는 광주에서 6월 항쟁을 여는 중요한 도화선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개인적으로는 내 인생과 신앙의 방향을 결정지었다.

이 사진은 광주에 사는 양림교회 친구인 고영국 형제가 당시 사진이 유일하게 한 장 남아있다며 필자에게 스캔해서 보내 준 것이다. 앞에서 네번째, 오른쪽에서 세번째 짧은 머리의 얼굴이 반쯤 가려진 사람이 필자이다. 사람들의 표정이 힘들어 보이는 것은 최루탄 때문에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 <나라를 위한 연합예배> 시작 전 사진(1987년 5월 24일, 광주 금남로) 이 사진은 광주에 사는 양림교회 친구인 고영국 형제가 당시 사진이 유일하게 한 장 남아있다며 필자에게 스캔해서 보내 준 것이다. 앞에서 네번째, 오른쪽에서 세번째 짧은 머리의 얼굴이 반쯤 가려진 사람이 필자이다. 사람들의 표정이 힘들어 보이는 것은 최루탄 때문에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 박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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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5월 24일 일요일이었다. 5·18 7주년 기념일이 바로 엿새 전 월요일에 있었다. 당시에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1980년 이후 해마다 5·18이 돌아오면 녹색 군복을 입은 전경들이 중무장을 하고 시내 요소요소를 장악한 채 계엄령에 준하는 분위기를 만들며 시민들을 감시하고 위협했다. 나는 학교로 가는 버스 안에서 창밖의 전경들을 분노를 삭이며 말없이 노려보곤 했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내가 다닌 교회는 광주 양림 교회(예장 개혁)였는데, 보수 교단에 속했다.

그날 오전 주일 예배 후에 광고가 있었다. 전 교인이 <나라를 위한 연합 예배>에서 성가대로 섬기기 위해, 오후에 금남로에 있는 광주 YMCA 강당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나는 친구들과 선·후배들, 그리고 교회 어른들과 함께 그 연합 예배에서 부를 찬송가 521장에 있는 '어느 민족 누구게나'를 열심히 연습했다. 모든 성도들이 성가대복을 입고 금남로로 걸어갔다. 경찰 오토바이 몇 대가 소리를 내며 우리 옆을 따라왔다.

우리는 집회 시작 시간보다 훨씬 이른 시각에 YMCA 강당 앞에 도착했는데, 전경들이 출입구를 몇 겹으로 에워싸고 아무도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전경들과 격렬한 몸싸움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거칠게 항의하며, 몸으로 밀었다. 전경들이 방독면을 쓴 채 최루탄 몇 개를 눈앞에서 터뜨렸다.

몸싸움을 하던 나는 최루탄과 긴 성가대복 때문에 전경들 바로 앞에서 넘어지고 말았는데, 전경들의 군홧발이 나를 짓이길 수 있는 위험한 순간이었다. 다행히 젊은 전경 지휘자 한 명이 최루탄을 그만 터뜨리라고 흥분한 전경들을 제지했다. 나는 방독면 너머 전경들의 눈을 노려보았다. 지금도 한 전경의 당황한 눈빛이 기억난다. 그는 나와 같은 고등학생들까지 함께 한, 그것도 성가대복을 입은 기독교들의 저항은 아마 처음이었을 것이다.

전경들은 끝까지 출입구를 열어 주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당시 전남 도청 앞 분수대 앞에서 도청 쪽을 보면서 금남로의 차도 위에 앉았는데, 집회에 참석한 인파의 맨 앞이었다. 분수대와 우리 사이에는 전경들이 몇 겹으로 진을 치고 서서 분수대 광장으로 진입하지 못하게 막았다. 그 분수대 광장은 1980년 5·18 당시에 민주 성회가 열렸던 곳으로, 5·18의 상징적 중심지였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노상에 앉았는데, 분수대 바로 앞에서 광주 은행 사거리까지 차도 위에 빼곡하게 앉았고, 전경들은 전면인 분수대 앞과 후면인 광주은행 사거리에 서서 집회가 확산되는 것을 막았으며, 왼쪽과 오른쪽의 측면은 수많은 광주 시민들이 인도에 서서 우리를 둘러쌌다.

광주 시민들까지 포함하면 5만 명 정도였을 테니, 아마 1980년 5·18 이후 광주 도심에서 모인 최대 인파였을 것이다. 집회가 시작된 후, 성가대인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찬송가 521장 '어느 민족 누구게나'를 합창했다. 가사 한 절 한 절이, 한(恨)이 서린 역사의 무게를 담은 간절한 기도였다.

"어느 민족 누구게나 결단 할 때 있나니, 참과 거짓 싸울 때에 어느 편에 설 건가
주가 주신 새 목표가 우리 앞에 보이니, 빛과 어둠 사이에서 선택하며 살리라
고상하고 아름답다 진리 편에 서는 일, 진리 위해 억압받고 명예 이익 잃어도
비겁한 자 물러서나 용감한 굳세게, 낙심한 자 돌아오는 그 날까지 서리라
순교자의 빛을 따라 주의 뒤를 좇아서, 십자가를 등에 지고 앞만 향해 가리라
새 시대는 새 의무를 우리에게 주나니, 진리 따라 사는 자는 전진하리 언제나
악이 비록 성하여도 진리 더욱 강하다. 진리 따라 살아 갈 때 어려움도 당하리
우리 가는 그 앞길에 어둔 장막 덮쳐도, 하나님이 함께 계셔 항상 지켜주시리 아멘"

이어서 광주에서 가장 큰 교회이자 보수 교단에 속한 광주 중앙 교회(예장 개혁) 담임 목사였던 변한규 목사님이 설교했다. 변한규 목사님은 식탁 한 개를 가져다가 단상으로 삼고 그 위에 올라가서 '아벨의 피'에 대해 설교했다.

26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 설교를 기억하고 있다. 아벨이 가인에게 살해당한 후 땅에 흘려진 아벨의 피가 하나님께 호소했다는 말씀을 하시며, 지금 살해당한 박종철군의 피가 하늘의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고 온 힘을 다해 외치셨다. 우리 모두는 울었다. 전경들이 터뜨린 최루탄 때문에 눈이 아프기도 했지만, 그 말씀 하나 하나가 가슴을 후벼팠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다시 눈물이 난다.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최루 가스로 가득 찬 도로 위에서 남도의 따가운 5월의 햇살 가운데 눈을 들어 하늘의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했다. 보수 교단과 진보 교단의 광주 기독교인 3만 명이 모두 하나가 되어 드린 그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셨다. 얼마 안 있어 6월 항쟁이 일어났고, 그 결과 체육관에서 자기들 마음대로 대통령을 계속 뽑겠다는 전두환 군사 정권의 4·13 호헌 조치를 철회시키고 국민의 손으로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 연합 예배를 통해 기독교인들이 진보와 보수라는 분열의 장벽을 넘어 공의(公義)를 위해 연합하여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다음날, 학교에서 수업 중에 담임선생님이 전날 시내에 나갔다가 우연히 본 연합 예배와 기독교인들의 용기 있는 행동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기독교인이 아님에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을 때, 나는 공의를 위해 역사적 책임을 다하고자 애쓰는 교회는 우리 사회에서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연합 예배는 당시 중앙 언론과 지방 언론 모두 사회면에서 비중 있게 보도했다. 아래는 당시 언론 기사이다.

"光州기독교선교자유수호위원회(위원장 金채현 목사)가 주최한 범교단 '나라를 위한 연합 예배'가 24일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1만여 신도가 참석한 가운데 光州시 錦南로 1, 2가 노상에서 열렸다.

이 예배는 처음 금남로 1가 YMCA 체육관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경찰이 입구를 봉쇄, 신도들이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가 그 수가 자꾸 늘어나면서 금남로 1가 도로를 꽉 메우자 YMCA 건물만 사용치 못하게 한 채 오후 3시부터 교통이 차단된 상태에서 노상에서 예배를 보게 됐다.

이 예배에서 광주 시내 기독교장로회 등 14개 교단의 목사 534명은 ▲4·13 조치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도전이며 인간 존엄성에 대한 모독이므로 이를 반대한다 ▲언론 자유 긴급 실현 ▲양심수 석방과 생존권 보장 등 6개 항의 '시국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밝혔다.

경찰은 처음 16개 중대 2천여 명을 낮 1시부터 YMCA 일대의 주요 건물과 도로 주변에 배치, 이 예배를 사전 봉쇄하려 했었다.

오후 5시 예배가 끝나자 목회자와 신도들은 5백m 떨어진 중앙로까지 찬송을 부르며 행진한 뒤 헤어졌다."(<동아일보>, 1987년 5월 25일자 11면).

"이날 예배에서 변한규 목사는 설교를 통해 "정부의 '4·13 개헌 유보 선언'은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열망과 기대를 무참히 짓밟아 버렸다"고 말하고 "NCC를 비롯한 각 교파에서는 직선제 개헌을 위한 서명 운동을 벌이기로 했다"고 말했다. 변 목사는 또 "박종철 고문 사건의 진상은 처음부터 왜곡됐다"고 주장하고 "진실이 국민 앞에 밝혀지지 않을 때 국민은 어디에 억울함을 호소해야 하느냐"면서 "온 국민을 분노와 경악에 몰아넣은 이번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서는 국회 국정조사권을 발동시켜 국민 의혹을 풀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광주일보>, 1987년 5월 25일자 11면).

위 기사에 대한 이해를 위해 몇 가지 덧붙이고 싶다.

이 <나라를 위한 연합 예배>를 개최한 단체인 '광주기독교선교자유수호위원회'의 전신은 1980년 5·18 당시의 '기독교비상구호위원회'이다. 진보 교회들과 보수 교회들이 연합하여 만든 기독교비상구호위원회는 5·18 사상자와 실종자와 구속자의 가족을 돕기 위해 노력하다가 1981년 11월, 신군부의 선교 침해 행위에 맞서 광주기독교선교자유수호위원회로 전환했다("[신복음의 향토순례] 광주광역시 - 갈등 극복하고 이제는 한 형제", <국민일보>, 2003년 5월 3일자 26면).

이 단체가 바로 1987년 5월에 <나라를 위한 연합 예배>를 주최했는데,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광주의 14개 교단이 가입했다. 그리고 이 단체의 위원장이었던 김채현 목사님은 바로 내가 섬기던 양림 교회의 담임 목사였는데,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위원장직을 맡아 이 연합 예배를 개최한 것이다.

그리고 집회 참석자 수에 대해 <광주일보>는 5천 명으로, <동아일보>는 1만 여명으로 기재했지만, 내 기억에 집회를 마칠 무렵, 대로에 앉은 기독교인들이 광주 금남로 분수대 앞에서 광주 은행 사거리까지 빽빽하게 운집하였으므로 그 수는 오늘 삭발하신 김병균 목사님의 인터뷰처럼 3만 명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 인터뷰를 포함하여 이 연합 예배의 역사적 가치에 대한 기자의 평가가 수록된 기사를 소개한다.

"민주화에 대한 열기는 범 종교계로 확산됐다. 이는 다시 그동안 대학생이 중심이 된 시위대열에 자연스럽게 시민들이 동참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특히 3만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5월 24일 금남로에서 개최된 연합기도회는 각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기독교장로회 뿐 아니라 소위 예장 내 보수교단들까지 총 망라해 연합 기도회를 가진 것이다.

특히 이날 경찰의 대응은 치를 떨게 할 정도였다. 무차별적으로 최루탄을 난사해 참가자 모두가 머리에 하얀 최루탄 가루를 뒤집어쓰게 된 것이다.

"그때는 교파를 초월했습니다. 오직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신앙뿐이었죠. 최루탄을 함께 맞으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동지였죠. 닭장차에 끌려가 보면 잡혀온 사람들이 너무 많아 경찰이 고민스러워 할 정도였습니다."

김병균 목사의 회고이다. 최루탄으로 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가운데서도 개신교 여성신도들은 도로에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기도로 군부독재의 만행을 온 몸으로 맞서 싸웠다. 지켜보던 시민들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의 불퇴전의 의지와 용기에 대학생들마저도, 진압에 나선 경찰마저도 혀를 내 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광주는 이미 거대한 폭발을 예고하고 있었다. 남은 것은 언제 어떻게 터질 것이냐는 것이었다. 바야흐로 6월항쟁의 전야였다."("그땐 서로가 서로에게 동지였죠" [다시 보는 6월 항쟁 ①]폭풍전야-광주의 봉화, 전국을 움직이다.", <시민의 소리>, 2007년 5월 29일).

1987년 6월 항쟁의 주역은 바로 국민이었고, 그 국민의 저항을 목숨 걸고 조직화한 것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이었다. 특히 "민주당은 폭력 자제를 호소하고 여야 영수회담을 제의하는 등 동요하는 모습이 비치기 시작했"던 무렵, 6월 20일을 기해 비상조치가 취해질 것이라는 소문에도 불구하고, "군이 투입되고 80년 5월처럼 살육전이 벌어지더라도 최후의 한 사람까지 남아 끝까지 투쟁하자"고 결의한 국본 활동가들의 결단은, 신군부의 총칼을 두려워하지 않고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건 용기를 보여준 감동적인 것이었다("군 투입설 불구, "끝까지 투쟁하자" [다시보는 6월항쟁 ③]대공세로의 전환, 6.19~23일 밤샘시위", <시민의 소리>, 2007년 6월 18일).

이 6월 항쟁에서 광주의 종교인들도 큰 기여를 했다. 6월 항쟁이 전국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시작된 6월 10일, 광주의 시위에 대한 기사 일부이다.

"오후 6시, 가톨릭센터와 중앙교회 옥외방송을 통해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5천여 명의 시민들이 삽시간에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이어 손에 태극기를 쥔 수천 명의 시민들이 금남로를 점거한 채 애국가를 같이 따라 부르며 연좌시위에 들어갔다.

5분 뒤 가톨릭센터에서 몰려나온 1백여 명의 신부와 수녀, 신자들이 연좌 농성을 시도했다.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강제해산에 나서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기도문을 외며 아스팔트 바닥에 30여분을 그대로 버텼다. 광주우체국, 원각사, 미문화원(현 황금주차장), 충장로 파출소 등에서 경찰의 1차 저지선도 무력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수백 명 단위로 무리를 지어 "호헌철폐 독재타도" 구호를 외치며 도청을 향해 압박해 나갔다. 6시 30분경 황금동 4거리에 있는 충장로교회 옥상에 '군사독재 타도하자'는 플래카드가 내 걸리고 확성기를 통해 "도청으로 가자"는 국본 전남본부 공동의장 김병균 목사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1,500여 시민들이 열렬한 박수로 호응하기도 했다."("거센 민주의 물결, 금남로로 중앙로로 '다시보는 6월항쟁 ②' 6월 항쟁의 점화, 6·10대회", <시민의 소리>, 2007년 6월 12일).

특히 광주의 종교인들은 6월 항쟁의 도화선 역할을 하였다. 전두환 정권의 4·13 호헌조치는 발표 초기에 매우 강경했기 때문에, 가혹한 공안정국이 올 수 있다는 우려에서 그에 대한 저항이 전국적으로 조직화되기 어려웠다. 그 엄혹한 상황에서 저항의 전국화를 가져 온 것은 광주의 신부님들과 목사님들의 단식기도였다.

1987년 4월 21일, 천주교광주대교구 소속 신부님 12명이 '직선제 개헌을 위한 단식기도를 드리면서'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금남로 가톨릭센터 6층 성당으로 들어가 무기한 단식기도에 들어갔다. 24일에는 광주 신흥교회에서 한국기독교장로회 전남노회 소속 목사님들과 장로님들 20여명이 무기한 단식기도를 시작했고, 27일에는 김병균 목사님을 비롯하여 전남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소속 목사님들 27명이 광주 YWCA 6층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단식기도에 들어가 12일 동안 단식하였다.

이 단식기도는 전국으로 확산되어 호헌철폐 운동이 전국화 하는 계기가 되었다. 불교인들도 일어났다. 경찰들이 '5·18 추모회'가 벌어지고 있는 원각사 법당에 난입하여, 대웅전에 사과탄을 투척하고 청년 13명을 연행한 '원각사 난입사건'이 일어나자, 5월 27일 원각사 앞 중앙로 노상에서 스님 150여 명을 비롯한 불교도, 시민 등 1만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5·18불교탄압 규탄 대법회를 개최하였고, 이 저항은 전국 사찰로 번져 갔다(이 문단은 위 <시민의 소리>, 2007년 5월 29일 기사 요약).

위에 소개한 기사들에서 여러 차례 김병균 목사님의 이름이 등장한다. 12일 동안 단식기도를 했고, 국본 전남본부 공동의장으로 6월 항쟁을 이끌었다. 모두 목숨을 걸고 하신 일이다. 그런데 이 노(老) 목사님이 두 분의 목사님과 더불어 삭발을 하셨다. 김병균 목사님의 삭발을 보며 나는 한편으로는 마음이 너무 아팠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나라의 어처구니없는 이 현실에 대해 정말 화가 났다. 국정원의 불법 대선개입과 경찰의 축소 은폐, 그리고 그 최대 수혜자인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이 국정조사에서 보여 준 후안무치한 국정원 비호는 모두, 1987년 6월 항쟁의 민주화 성과가 송두리째 부정당하고 있는 이 나라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나는 김병균 목사님의 삭발을 보면서 한국 교회의 기독교인들에게 간곡히 요청하고 싶다. 1987년 5월, 광주 금남로에서 드린 <나라를 위한 연합 예배>처럼, 진보와 보수를 넘어 교회들이 공의를 위해 하나 되어, 시청 광장 같은 곳에서 시국기도회를 열자!

14개 교단이 연합하여 도심 노상의 연합 예배를 주최한 광주기독교선교자유수호위원회처럼, 뜻을 함께 하는 교단이나 교회, 단체들의 연합체를 이번 기회에 조직하자!

현 정권의 행태를 볼 때, 앞으로도 이와 같은 민주주의 유린은 형태를 바꾸며 계속될 것이라고 보이며, 따라서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상설 기구가 필요하다. 오늘 "국가정보원 선거개입 진상규명 개신교 목회자 1000인 시국선언"을 주도한 '국정원선거개입기독교공동대책위원회'가 그 모태 역할을 해 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뉴스앤조이>에도 송고합니다



태그:#1987년, #6월 항쟁, #나라를 위한 연합예배, #광주, #기독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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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이며 기독교학 박사이다. 주거권기독연대 공동대표이며, 희년사회 연구위원이다. 희년 교회, 희년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다. 토지 정의와 주거 정의 실현을 위해 노력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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