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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울 학(學, xue)은 새끼줄(爻)을 양쪽에서 두 손으로 잡고 지붕(?)에 매듭짓는 법을 아이 적부터 ‘배우다’는 데에서 유래한다.
▲ 學 배울 학(學, xue)은 새끼줄(爻)을 양쪽에서 두 손으로 잡고 지붕(?)에 매듭짓는 법을 아이 적부터 ‘배우다’는 데에서 유래한다.
ⓒ 漢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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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活到老, 学到老, huó dào lǎo, xué dào lǎo)"는 말은 요즘처럼 평생교육이 강조되는 시절에 더욱 절실하다.

늘 배우기를 좋아하고 몸을 낮춰 새로운 것이 내 몸 안으로 흘러들게 하기란 말처럼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다. 공자(孔子) 정도의 내공은 되어야 배우는데 싫증내지 않는, 학이불염(學而不厭, xué'érbúyàn)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배울 학(學, xué)은 새끼줄(爻)을 양쪽에서 두 손으로 잡고 지붕(宀)에 매듭짓는 법을 아이 적부터 배우도록 한다는 데에서 '배우다'는 의미가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선생님의 창의적인 촉발이 선행될 때 배움은 학생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발화하여 폭발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과거 전통사회에서는 선생님의 입에서 나오는 지식이 배움의 유일한 통로이다시피 했다. 지금은 언제 어디서든 배움을 구할 수 있는, 배움의 발화가 손쉬운 '스마트시대'지만 오히려 인문학적 소양을 위한 배움의 의욕은 좀처럼 불을 지피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논어(論語)>의 첫머리에 나오는 "배우고 늘 익힌다(學而時習之)"에서 '학습'이라는 말이 유래한다. 선생님에게서 배우는 것을 '學'라고 한다면, '習'는 깃털(羽)이 하얀(白) 어린 새가 부단한 날갯짓 연습을 통해 결국 하늘을 날 수 있게 되듯이, 스스로 배운 것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는 과정일 것이다.

배움에는 연습도 필요하지만 내면적인 성찰과 사고의 과정 또한 필요하다. 공자는 <논어 위정(爲政)>편에서 "배우되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고, 생각은 하되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고 하였다. 배운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사고의 과정이 필요하고, 또 자신의 생각만 고집하지 말고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통해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야 독단에 빠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연(燕)나라 사람이 조(趙)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에 가보니,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멋있어서 배우기 시작했는데,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원래 걸음걸이도 잊어버려 결국 기어서 돌아갔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한단지보(邯鄲之步, Hándānxuébù)는 배움에 있어서 자기 주체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일깨워준다. 배운다는 것은 때로 모방에서부터 출발하지만 본인의 주체적 사고를 중심에 놓고 창조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잊어서는 안 된다.

"배움은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보다 빠른 것이 없다(学之经,莫速于好其人)"는 <순자(荀子)>의 가르침은 가르치는 행위보다 가르치는 주체의 인간적인 태도나 도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사람이 죽으면 묘비명에 관직명을 써 주지만 관직이 없는 사람은 남자인 경우 모두 '학생(學生)'이 된다. 평생 동안 무언가를 배우려고 애쓰면서 살아왔다는 것이 죽은 사람에 대한 최고의 평가가 될 정도로 가치 있는 일이었던 셈이다. 


태그:#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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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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