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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그늘에서 고서를 탐독하는 강발성 할아버지.
 시원한 그늘에서 고서를 탐독하는 강발성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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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쯤 됐을까. 아내와 전남 영광군 불갑사에 갔다가 매미들의 합창이 요란한 느티나무 그늘에서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는 노인을 발견했다. 역학 관련 고서를 탐독하는 노인은 사찰 인근 마을에 사는 강발성(88) 할아버지. 사주쟁이 50년 경력의 강 할아버지는 말을 할 때마다 합죽한 입이 벙긋이 벌어져 온화한 인상을 풍겼다.

50~60년대 유행하던 중절모와 하얀 백구두 등 시대에 뒤떨어진 옷차림이 더욱 정겹게 느껴졌다. 책상 위의 토정비결 조견표와 민화풍의 그림과 원문으로 인간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당사주책 등은 코흘리개 시절로 추억여행을 떠나게 했다. 우연히 만난 '거리의 도사'가 들려주는 사주풀이는 또 다른 '힐링'이 될 것 같기에 가까이 다가갔다.

"할아버지, 저희는 동갑내기 부부인데요. 앞으로 싸우지 않고 행복하게 잘 살아갈 것인지 궁합 좀 봐주세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아니 선생도. 나이도 원만큼 드신 것 같은데, 두 양반이 여기까지 놀러 댕길 정도로 살아왔으면 되얐지, 인자(이제) 궁합 봐서 안 좋으믄 집에 가서 이혼서류 꾸밀 거요? 궁합이란 것은 결혼을 안 한 총생(자녀)들에게 중요한 겁니다. 워째 중허냐. 결혼 전에 사주를 봐서 좋지 못한 액운이 있으믄 방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모양의 부적을 보여주며) 사주쟁이들이 그 비법을 알고 있어요. 비법을···."

여행 중 거리에서 만난 할아버지에게 얻어맞은 '돌직구'. 그래도 기분은 상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할아버지 말이 옳다고 생각되기 때문이었다. 재미로 보려고 했는데, 웃음이 나왔다. 부모보다 자녀의 사주가 중요하다는 대목에서는 결혼식 날짜를 잡아놓고 매주 1회씩 올리는 만화 작업하랴, 혼수 준비하랴, 출국 준비하랴 정신이 없을 딸의 모습이 그려졌다.

고등학교 시절 딸. 군산 월명공원 채만식 기념비 앞에서.
 고등학교 시절 딸. 군산 월명공원 채만식 기념비 앞에서.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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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은 모두 세 식구. 딸이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가게가 딸린 방 하나에서 함께 살았다. 생활이 구차하지는 않았으나 환경은 열악했다. 다행히도 딸은 건강하고 착하게 자랐고, 고등학교 마지막 겨울방학 때 서울로 올라가 자취를 하면서 부모의 도움 없이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도 구해서 결혼 비용도 모으고, 마음에 드는 짝을 만나 결혼 날짜를 잡아놓고 있었다.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인 게임회사를 그만두고 모 포털사이트 웹툰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딸이 2000년 12월부터 객지 생활을 시작했으니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이상 떨어져 사는 방법을 배운 셈이다. 그럼에도 결혼식 날짜를 잡았다는 딸의 전화는 섭섭함을 넘어 충격으로 다가왔다. 결혼식을 마치면 곧바로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떠난다니 서글프기까지 했다.

강 할아버지가 손가락으로 육십갑자를 꼽고 있다.
 강 할아버지가 손가락으로 육십갑자를 꼽고 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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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웃고만 있던 아내도 "할아버지 말씀이 맞네요!"라며 맞장구를 치더니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는 딸은 사주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네요. 결혼은 언제쯤이나 하게 될지…"라고 능청을 떨면서 재미삼아 보자고 했다. '부부는 일심'이라고 마음이 통했다. 해서 직업과 결혼 날짜 등을 숨기고 할아버지 물음에 따라 딸의 사주를 넣었다. 

"어디~보자. 서른두 살 임술(壬戌)년 12월생이라···. 자 그럼 복채를 놔 보실라우 선생님.  복채가 들어와야 재미가 나서 사주가 잘 풀링께!"

강 할아버지는 밭은기침을 서너 번 내뱉은 후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이어 손가락으로 육십갑자를 꼽다가 멈추더니 복채를 내놓으라고 했다. 얼마냐고 몇 차례 물어도 먼 산만 바라보며 묵묵부답. 할 수 없이 지갑에서 1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책상 위에 놓았더니 꼬깃꼬깃 접어 호주머니에 꾸겨 넣었다. 5000원 정도로 생각하고 봐달라고 했는데, 거슬러 주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계산이 끝나자 열 손가락을 동원하여 딸의 사주를 풀어나갔다.

"어라, 초년 운세에 천예성(天藝星)이 들었네! 천예성을 타고난 사람은 재주와 기예가 단연 돋보이는데 특히 손재주가 많다고 그랬어요. 옛날에는 손끝이 야무져서 바느질 솜씨와 음식솜씨가 뛰어나다고 했는데 바느질이 필요 없는 세상이니 필기(筆記), 연필로 쓰는 필기를 잘하겠어요. 중년에는 천인성(天刃星)이 끼었네 그랴! '인'은 칼날 '刃'이니 따님 성깔이 쫌 있겠는디요. 말(입)을 조심하라고 이르세요.

가만있자, 생일이 스무이틀이라고 했지, 하나, 둘, 서이, 너이, 다섯···. 하이고 헷갈린다 헷갈려. 얼랄라, 말년과 총운에도 천예성이 들었네! 따님 사주가 아주 좋습니다. 사주에 액(厄)이나 파(破)가 하나 둘씩은 드는 게 보통인디 따님은 하나도 들지 않았어요. 뭐를 해도 술술 잘 풀리는 운셉니다. '운수대통'으로 비록 물려받은 과업은 없지만 무엇을 해도 '운'이 따른단 말입니다. 내가 장담합니다. 장담해요···." 

딸의 사주풀이를 듣고 있노라니 지난 일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시야를 넓히고 감성을 키워주기 위해 마당놀이나 곡마단이 들어오면 함께 관람했고, 스포츠 경기와 사진촬영대회도 데리고 다녔다. 자율학습에 빠져도 사촌들이 모이는 행사에 꼭 참여시켰으며, 유치원에서 대학 진학까지, 학원 과외도 딸의 의향을 존중해서 정했다. 그래서 그런지 얼마 전에는 만화가 지망을 격려해준 데 대해 고맙다는 인사를 받기도 했다.

'거리의 도사'에게 복채 1만 원을 건네고 오간 대화는 30분 남짓. 딸의 사주풀이를 정리해보니 손재주가 뛰어나다는 것과 입조심 하라는 내용뿐. 부모복은 있는지 없는지, 언제쯤 무엇을 해서 돈을 많이 벌겠다거나 누구누구를 조심하라거나 어떤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겠다는 등 다른 점괘는 나온 게 없었다. 그럼에도 '점쟁이들 공돈 먹지 않는다'는 말이 떠올라 웃음이 나오기도.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결혼식장으로 향하는 딸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결혼식장으로 향하는 딸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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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예성을 세 개나 타고났다는 딸은 지난 7월 20일 동료와 친지들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올렸다. 3박 4일 동안 제주도로 신혼여행도 다녀왔다. 29일에는 유학길에 오른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출국했다. 웹툰 만화는 계속 연재하면서 5년 정도 머물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람 일이란 뜻대로 되는 게 아니어서 새로운 만남은 그때 가봐야 확실히 알 것 같다.

딸과 헤어진 지 보름이 되어간다.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 있는 딸을 시집보내고 얼마나 허전하고 섭섭하냐고 묻는다. 부모와 자식은 천륜으로 맺어졌다 했다. 하물며 곁에 있던 자식이 떠났으니 허전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만, 그때마다 "제가 시집을 보낸 게 아니라 본인이 알아서 찾아갔죠, 오래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덤덤합니다"라고 말한다.  

분명한 사실은 있다가 없음에도 걱정 하나는 덜었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강력사건이 발생했다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호젓한 골목길로 한참 들어가는 답답한 반지하 방에서 자취하는 딸이 걱정됐기 때문. 이제는 딸과 동반자 두 사람의 건강, 건투를 빌 따름이다.

덧붙이는 글 | '있다가 없으니까' 응모글



태그:#딸, #사주풀이,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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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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