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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노동전문잡지에서 일했던 나. 지난해 가을 한 백화점 명품매장에서, 그리고 올해 봄 한 대기업의 대리점에서 판매직으로 일하면서 겪었던 일들을 기록한다. 이 글은 잠입취재기가 아니다. 한 아줌마 구직자의 취업기일 뿐이다. 또한 두 곳 모두 스스로 그만뒀기에 취업 실패기이기도 하다. 글에 나오는 인명은 모두 가명임을 밝힌다. - 기자 말

사람들이 물건을 사갈 때의 성취감에는 은근히 중독성이 배어 있다. 고객의 "이거 주세요"라는 한 마디는 연인의 세레나데 만큼 달콤하게 들리곤 했다. 고객에게서 받은 신용카드를 기계에 긁을 때의 짜릿함도 컸다. 결제 액수가 클 때는 기쁨이 갑절로 다가왔다.

그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여러 과정을 거쳐야 했다. 우선 제품 익히기는 필수. 틈날 때마다 진열돼 있는 상품들의 가격 태그를 들춰봤다. 소재는 뭔지, 가격은 얼마인지를 세세히 살폈다. 또 새로 들어온 제품들은 걸쳐 보고 들어보기도 했다. 혜수 언니는 그래야 손님들에게 설명하기도 쉽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해봐도 쉽지는 않았다. 가격은 왜 이리 안 외워지고 옷들은 또 왜 그리 그 옷이 그 옷 같은지…. 눈썰미 없는 나를 스스로 저주했다.

그러다 보니 손님이 상품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자꾸 머뭇거렸다. '저 제품이 고객에게 잘 어울릴까, 내가 추천해줬다가 집에 가서 후회하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날 짓눌렀다. 그렇다고 마냥 자신감 없는 모습으로만 있을 수는 없었다. 고객의 기대치를 충족시킬 내 나름의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둘 중 어느 게 낫나요?"에 담긴 뜻

한 백화점의 명품매장 풍경. 어설프지 않게 거짓말 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 역시 판매일을 잘 하는 요령 중 하나였다(이 사진은 기사 내 언급된 매장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한 백화점의 명품매장 풍경. 어설프지 않게 거짓말 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 역시 판매일을 잘 하는 요령 중 하나였다(이 사진은 기사 내 언급된 매장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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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고객들과 마주치다 보니 요령이 쌓여갔다. 첫째는 '고객의 속내 파악하기'였다. 고객들은 "둘 중 어떤 게 낫냐"고 묻곤 했는데 그건 질문이기보다는 확인 받기일 때가 많았다. 둘 중에서도 마음이 쏠리는 게 있는데 그걸 사도 괜찮냐고 확인 도장을 찍으려는 것. 그럴 때면 그가 어떤 걸 더 마음에 들어하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웠다. 처음 눈에 들어온 게 자꾸 마음에 남는 법이니까. 만약 다른 걸 사간다면 그는 집에 가서도 계속 '그때 그걸 살 걸'이라는 후회를 할 게다. 그러니 판매인이 할 일은 손님의 결정을 지지해주는 것. "그게 좋아요. 잘 고르신 거예요"라고.

둘째, 아무 기준 없이 추천해달라고 할 때는 대세를 따랐다. 많은 사람들이 사가는 건 그만큼 요즘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것이니 사고 후회할 확률도 낮을 거라 믿었다. 사람들 눈은 비슷한지 아침에 팔린 가방이 오후에도 팔리곤 했다. 남과 다른 독특한 걸 취하는 사람들보다 남들도 사가는 인기 상품, 유행을 따르는 이들이 더 많았다.

그밖에 내 의견을 물을 때는 실제로 내 눈에 예뻐 보이는 제품을 골랐다. 별로 세련된 눈은 아니지만 마음에도 없는 제품을 추천하면 자신 있게 "이거 사세요"라고 말을 못하게 되니 그냥 내 눈을 믿고 "저라면 이걸 사겠어요"라고 밀고 나갔다. 그게 고객에게 신뢰를 줬는지 고객들은 내 의견도 많이 참조했다.

고백하자면 늘 내게 솔직했던 건 아니다. 내 눈에 좋아 보여도 사이즈가 우리 매장에 없는 제품을 권하지는 않았다. 재고가 많은 제품을 더 강하게 추천하기도 했다. 누군가 말했다. '판매직은 거짓말을 잘해야 한다'고. 일이 되게 만드는 거짓말은 어느 일에나 존재하는 법. 어설프지 않게 거짓말 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 역시 판매일을 잘하는 요령 중 하나였다.

손님 취향까지 파악해야 '판매의 달인'

"고객님에게는 이런 가방이 어울려요." 판매의 달인들은 고객의 취향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고객님에게는 이런 가방이 어울려요." 판매의 달인들은 고객의 취향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 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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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의 달인, 혜수 언니는 더 나아가 손님들의 취향까지 파악했다. 처음 온 손님의 복장을 보고는 "고객님은 이런 옷을 좋아하시겠네요", "고객님에게는 이런 가방이 어울려요"라면서 상품을 추천했다. 언니는 기억력도 좋았다. "OO엄마, 지난 여름에 그 옷 사갔잖아, OO엄마 취향으로는 이 옷을 좋아하겠네"라며 1년 전 고객이 구입한 제품까지 기억해내 그의 취향을 파악했다. 이러니 고객들이 안 사고 배기겠는가.

몇 달 후 나는 대기업 생활용품 대리점에서 또 다른 판매의 고수와 일한 적이 있었다. 30대 초반인 보라는 고등학교 졸업 후 백화점에서 잠깐 아르바이트를 하려다가 매장 매니저의 "잘한다"는 칭찬에 아예 눌러앉아 10년 넘게 일한 베테랑. 보라는 한 고객에게 하루에 2000만 원 넘게 판 적도 있다는 등 백화점에서 일할 때의 무용담들을 들려줬다.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정도로 그의 판매 기술은 남달랐다.

생활용품 대리점은 500원짜리 병따개부터 30만 원대의 이불까지를 팔았다. 하지만 30만 원짜리 이불을 사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고객들은 전단지에 실린 초특가 제품들을 주로 찾아서 고객 1명이 사는 평균 구입액을 뜻하는 객단가가 2~3만 원을 넘기 힘들었다. 그런데 보라는 그중에서도 구매력이 있는 고객을 잘 찾아냈다. 그런 고객은 옆에 붙어서 여러 제품들을 추천해 70~80만 원씩 사게 만들었다. 더 놀라운 건 그가 추천하는 제품들이 꼭 비싼 것들이 아니었다는 거다. 고객이 필요로 할 것 같은 제품들만 권하는 재주가 보라에게는 있었다.

무슨 일이든 10년 넘게 꾸준히 하면 일가를 이룬다고 하던데 두 사람이 딱 그 짝이었다. 하지만 일가를 이룬 두 사람도 오지 않는 손님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뉴스에서 '불황'이라더니 손님들이 너무 없었다. 그저 세일 때만 붐볐다(그래서 백화점이고, 생활용품 대리점이고 세일을 주구장창 하는지도 모른다).

매장을 열고 오후 늦도록 손님이 안 오는 날들이 있었다. 편히 쉬어도 되는데 이들 '판매의 달인'들은 결코 쉬지 않았다. 혜수 언니는 기분 전환한다고 마대 걸레로 매장을 구석구석 닦아냈다. 진열대도 박박 걸레질했다. 보라는 아예 진열대를 뒤집었다. 이쪽에 있던 그릇을 저쪽 조리기구와 바꾸는 식으로 매장 배치를 바꿨다. 때가 돼서 온 것일 수도 있지만 신기하게도 두 사람이 그렇게 하고 나면 손님이 들어왔다.

나는 두 사람이 유별난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백화점 직원 휴게실에 있으면 매출을 걱정하는 이들의 대화가 심심치 않게 오갔다.

"지혜야, 왜 이렇게 맥아리가 없어?"
"저요? 매출이 안 나와서요."
"나도 장사 잘해서 칭찬 받으면서 일하고 싶어."
"이번 달은 700(만 원)을 맞춰 줘야해. 그래야 보너스가 나온대. 직영이 원래 그래. 대놓고 재고 쌓고 있어. 손님이 없는 걸 우리보고 어떻게 하라고…."

매출 목표가 떨어지는 곳은 그 액수를 맞추기 위해 피를 말렸다. 매출 압박을 직접적으로 받지 않는 곳이라도 매출에서 내 월급이 나오니 매출액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왜 자꾸 얼마 팔았나를 전산에서 확인하나 했는데 나중에는 나도 시시때때로 판매액을 살폈다.

"자살한 백화점 판매원 심정 이해돼"

보라와 함께 일하던 중 한 판매원이 자신이 일하던 백화점에서 떨어져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 소식을 전하니 보라는 "그 언니가 술을 안 마셨나 보다"라고 지나치듯 말하고 말았다. 자신은 술로 스트레스를 풀었다면서…. 며칠 후, 보라가 다시 그 사건을 언급하면서 백화점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하루하루가 행복하지가 않아.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아무도 안 들어오다가 폐점시간 다돼서 손님이 오는 경우가 있어. 그럴 때는 그냥 창고에 들어가서 술 마시고 싶어. 매출 좋은 날 잠깐 기분 좋고,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야. 자살한 그 사람은 그런 자기 심정을 이기지 못했을 거야."

보라는 자신도 백화점에 계속 있었으면 제 명에 못 살았을 거라고 전했다. 보라가 백화점 판매원들이 느끼는 매출 압박과 관련해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줬다. 백화점에서 일하던 어느 날, 출근을 해보니 건너편 매장에서 이상한 연기가 올라오더란다. 가서 보니 그 매장 매니저가 향을 피운 채 물 담긴 사발을 앞에 두고 절을 하고 있었다고.

"'언니, 뭐하고 있어요?'라고 물었다가 부정 탄다고 저리 가라고 손짓을 막 하더라고."

보라 역시 단골 점집이 있었단다. 계절 바뀔 때마다 가서 부적을 받아왔다고 한다. 한 번은 점집 보살이 보라가 일하던 백화점 매장에 막걸리를 뿌리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냄새가 날 걸 알면서도 매장에 막거리를 뿌리기도 했단다. 보살이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한다'고 해서 보라는 매장 동생들을 다 내보낸 뒤 절을 하고 막걸리를 뿌렸단다.

물건이 잘 팔리면 좋겠다는 절박함은 정기세일 때 해소된다. 사진은 서울 시내 한 백화점에서 물건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사진은 기사 내 언급된 매장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물건이 잘 팔리면 좋겠다는 절박함은 정기세일 때 해소된다. 사진은 서울 시내 한 백화점에서 물건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사진은 기사 내 언급된 매장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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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백화점 우리 매장 매니저도 때마다 연락해서 점을 보는 스님이 있었다. 그건 특별한 게 아니었다. 누구는 미신에 의지한다고 흉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라도 비빌 언덕을 만들고 싶은 이들의 절박함이 있었다.

그 절박함은 장사가 잘 되는 날 잠깐 환하게 반짝인다. 지난해 추석 세일이 끝나자마자 시작된 백화점 가을 정기 세일의 첫날이자 사실상의 추석 연휴 마지막날이던 2012년 10월 3일은 백화점에서 일한 날 중 가장 바빴다. 백화점 개점 직후부터 손님들이 오더니 마감시간까지 우리의 판매일지에 판매액이 차곡차곡 쌓였다. 마감액이 1000만 원을 넘겼다. 바쁘니 오후 휴식도 건너뛴 채 바쁘게 움직였다. 매장 내 1인은 반드시 해야 하는 마감인사도 건너뛰었다. 나는 상품권을 가지러 계단을 뛰어 오르내렸고 혜수 언니는 마지막 손님을 응대하고 있었다.

점내 불이 다 꺼져서 정리도 다 못하고 나오는데 혜수 언니가 "그래도 기분 좋지?"라고 물었다. 지난 밤, 상품 번호를 헷갈려서 고객 앞에서 쩔쩔매는 꿈을 꿨다는 혜수 언니가 환하게 웃었다. 흘러내린 땀을 닦지도 못한 언니를 보는데 선뜻 "네"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백화점을 나서니 기울기 시작한 보름달이 보인다. 구름에 가려진 보름달이 좀 쓸쓸해 보였다. 입에 쓴 약을 먹은 것 같은 내 마음을 대변해주듯이.


태그:#백화점 판매원, #감정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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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삶엔 이야기가 있다는 믿음으로 삶의 이야기를 찾아 기록하는 기록자. 스키마언어교육연구소 연구원으로 아이들과 즐겁게 책을 읽고 글쓰는 법도 찾고 있다. 제21회 전태일문학상 생활/기록문 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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