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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곽승희 기자
영상 :  강신우, 심명진 기자

▲ [다큐] 노을이 머물다 간 오마이뉴스 수습기자 세 명, 동요 '노을'의 배경인 평택 대추리를 찾아가다.
ⓒ 심명진, 강신우, 곽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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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꿨습니다. 지금은 '사라진' 대추리가 보였습니다. 천연기념물 솔부엉이가 알을 품고, 멸종 위기종 금개구리 올챙이가 물웅덩이에서 꼬물대는, 불그스름한 대추리 하늘 위로 가창오리 떼 날아가는.

경기도 평택 평야의 7월은 생명력이 들끓는 공간이었습니다. 새들이 알을 낳고, 벼이삭이 굵어집니다. 부부부부, 솔부엉이 울음소리를 들으며 농부들이 어둠 속에서 집을 나섭니다. 논두렁 벼이삭 상했을까 보살피러, 하루 농사 계획을 맘속에 담아 오토바이를 타고 자전거에 오릅니다.

농부들 발 끝에서 오토바이 시동 소리와 자전거 페달소리가 대추리의 새벽을 울립니다. 그렇게 대추리 평야를 다니다보면 새벽 어스름이 물러갑니다. 떠오르는 태양빛에 내 볼이 붉게 물들면, 대추리 주민들이 고개 들어 눈인사를 건넵니다. 평야 너머로 끝없이 펼쳐지는 붉은 하늘을 보며, 대추리 노을만한 장관이 없다 말합니다.

지금은 공사현장인 평택 평야의 2009년 모습
▲ 평택의 넓다란 논밭 지금은 공사현장인 평택 평야의 2009년 모습
ⓒ 평택시사뉴스 박성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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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는 더 아름다운 광경을 알고 있습니다. 잠시 눈을 감고 상상해 보세요.

사그락, 사그락- 대추리 논밭 벼 이삭 사이로 바람이 지나갑니다. 농부들이 봄·여름 간 목숨처럼 가꿔온 대추리 땅에 벼 잎사귀 비벼지는 소리가 파도울림처럼 퍼집니다. 지금보다 젊어 보이는 얼굴의 이정오씨가 어린 손주를 콤바인(수확하는 기계)에 데려 앉히고 붉은 노을을 향해 운전합니다. 대추리 안 대추분교(평택시 팽성읍 계성초등학교에서 분파된 학교) 앞 집, 송재국씨네 대추나무, 감나무가 익어갑니다.

대추분교에는 매년 열리는 '(대추)리민의 날' 체육대회가 한창입니다. 경로잔치가 치러진 노인정에선 어르신들이 오늘도 주무시고 갈 요량인지, 느긋하게 얘기를 나누십니다. 이불이고 자리고 다 준비돼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해가 다 떨어질 즈음, 제 볼이 또 빨갛게 익어갑니다. 찰칵, 찰칵- 대추리 들판 한 쪽에선 사진 작가들이 제 모습을 열심히 찍고 있습니다.

대추리 붉은 하늘을 사람들에게 알린 동요 <노을>

오늘(지난 24일)따라 옛날 대추리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반가운 손님이 오려는 신호였나 봅니다. 작사가 이동진씨가 오랜만에 대추리를 찾았습니다. 그는 석양에 물든 제 모습을 아름답게 묘사해서 노랫말로 만들었답니다. 84년 MBC 창작동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그 노래입니다. 

동요 <노을>
작사 이동진
작곡 최현규
바람이 머물다 간 들판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 연기
색동옷 갈아입은 가을 언덕에
빨갛게 노을이 타고 있어요

허수아비 팔 벌려 웃음짓고
초가 지붕 둥근 박 꿈꿀 때
고개숙인 논밭의 열매
노랗게 익어만 가는

가을 바람 머물다 간 들판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 연기
색동옷 갈아입은 가을 언덕에
붉게 물들어 타는 저녁놀

그를 처음 만난 건 1978년 10월 23일, 평택 안성천 군문리 다리 근처였습니다. 안성천 따라 산책하던 그의 눈에 그날의 노을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답니다. 안성천 너머 대추리 들판에 초가집과 허수아비를 비추는 저녁노을. 동요 <노을>의 노랫말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완공 예정 2008년, 2012년 다시 2016년, 이렇게 늘어질 것을

 현재 미군기지 공사가 진행중인 옛 대추리의 모습
▲ 대추리 미군기지 공사 현장 현재 미군기지 공사가 진행중인 옛 대추리의 모습
ⓒ 심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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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공간은 이제 없습니다. 벼이삭 부딪히는 소리 대신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음이 들립니다. 군 헬리콥터가 대추리 상공을 가로지릅니다. 그 아래 들판에 콘크리트 건물과 몇 십 미터짜리 크레인 수십 개가 늘어서 있습니다. 대추리 주민 140여 가구가 모여 살던 곳에 아파트가 들어선 것입니다.

12층 완공된 건물도, 15층 이상 계속 짓고 있는 아파트도 있습니다. 건물 옆 크레인에선 부품 선이 흘러나와 풍경을 가로 줄을 긋습니다. 기지 주위로 가까이 가면 학교로 보이는 3층짜리 건물과 야구장 조명판, 체육관이 보입니다. 한국에 주둔한 미국 군인들을 위한 기지와 영내 거주 공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총 258만평 넓은 들판의 공사는 현재진행형입니다.

2004년부터 시작된 평택 미군기지 확장 사업은 예정된 2008년을 넘기고, 2012년 기한도 지나더니 이젠 2016년에 끝난다고 합니다. 이렇게 늦춰질 거면 뭐가 그리 급했던 걸까요. 조금만 더 농사를 짓고 싶다는, 고향 땅 뺏길 수 없다는 주민들을 '행정대집행'이란 명목으로 밀어내던 군·경찰. 주민을 향해 빨갱이다, 돈 독 올랐다 욕하던 언론과 사람들. 지금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참 많습니다.

주민들도, 논밭 벼이삭도, 솔부엉이도 모두 떠났습니다. 대추리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뭉쳤던 대추리 44가구 주민들은 자식처럼 아끼던 김지태 대추리 이장이 구속되자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대신 이주단지에서 대추리란 명칭을 쓰게 해 줄 것과 김 이장을 풀어줄 것, 그리고 이 아픔을 기록하기 위해 대추리평화기념관을 건립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주민들과 함께 대추리 소나무 숲에서 서식하던 솔부엉이와 때마다 오가던 가창오리 철새 때, 대추리 들판을 꾸욱, 꾸욱 거리며 수놓았던 금개구리도 모두 다 사라졌습니다.

대추리 이주 단지의 삶

대추리 주민들은 현재 행정구역상 '노와리'의 '이주단지'에 살고 있습니다. <노을>의 배경은 사라졌지만, 그 사람들이 아직 살아있습니다. 하지만 그 마음이 예전과 같을 수는 없겠지요. 더구나 대추리 사람들이 강제로 집을 떠나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1942년 일본이 해군 기지를 짓기 위해, 52년에는 한국이 미국 군대의 기지를 지어주기 위해 마을 전체를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그리고 2007년, 또다시 대추리를 떠나야 했습니다. 주민들 마음이 과연 어땠을까요….

신종원(50) 대추리 이주단지 이장은 주민들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고 합니다. 대추리에서 살던 시절, 주민들은 계획이 있고 꿈이 있었습니다. 농사 지어 자식 키우고 출가 시켜 한 집안을 일궈냈습니다. 하지만 송재국(76) 할아버지는 이제 농사 지을 땅도, 농부임을 증명하는 농지원부(농민들의 자격 증명서. 300평 이상 농지를 소유하거나 임대차하여 농사를 지을 때 발급 가능)도 없습니다.

정부가 준 보상금으로 이주단지 땅을 사서 집을 짓기에도 넉넉지 않았습니다. 3천 평 논농사 짓던 강권석(73) 할아버지에게 주민 공동 텃밭 100평은 갑갑하기만 합니다. 평생 농부로 살며 몸에 밴 습관 덕에 오전 4시면 눈이 떠집니다. 어서 논밭을 돌보러 나가야 할 것 같지만 이주단지의 새벽은 할 일이 없습니다. 이들의 몸은 편해졌을지 몰라도, 삶은 더 처절해졌습니다.

현실적인 문제도 대추리 사람들의 품을 팍팍하게 만듭니다. 이주단지의 삶은 어딜 나가거나 뭘 먹거나 모두 돈이 듭니다. 대추리에서 2만 평 소작농사 짓던 이정오(77) 할아버지는 1년에 3천 만 원을 벌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정부가 직업 대책으로 마련한 공공근로 사업에 나가 100만 원 밑의 돈을 받습니다. 이마저 다음 달 75세가 된 이 할아버지한테 끝입니다. 올 11월 말에는 공공근로 사업 자체가 끝난다고 합니다. 논밭에서 쫓겨난 70대 농부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요. 이 할아버지는 그 걱정에 3일만 앓다가 죽게 해달라, 빈다고 합니다.

행정구역 상 노와리 이주단지인 이곳은 대추리 주민들의 새로운 집이다
▲ 대추리 이주단지 행정구역 상 노와리 이주단지인 이곳은 대추리 주민들의 새로운 집이다
ⓒ 심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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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노을이 사라져버린 대추리 하늘

오늘 대추리 평야의 노을을 평소보다 진하지 않습니다. 오늘따라 구름이 많이 꼈네요. 오랜만에 찾아오신 이 작사가에게 미안해집니다. 그 옛날에 노을을 보고 싶으셨을 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이렇게 제 볼을 두텁게 가려주는 구름이 고마울 때가 많습니다. 아무리 노을이 아름답다고 해도 저는 그 옛날의 노을이 아니니까요.

저 아래, 제주도 강정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답니다. 강정 주민 대부분은 해군 기지 건설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정부와의 갈등이 7년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2006년 제가 그랬던 것처럼, 강정의 하늘도 걱정이 많을 겁니다. 강정 주민들은 또 어떤 마음일까요.

대추리 들판 너머 붉게 물든 제 얼굴을 봐주며 감탄해주던 그때 그 사람들, 동식물 모두 사라지고 없습니다. 이주단지에 사는 대추리 주민들은 제가 있는 쪽은 쳐다보기도 싫다고 합니다. 옛날의 그 풍경이 기억나지 않냐고 물으면 말해서 뭐하냐고 그저 헛웃음을 흘릴 뿐입니다. 그들은 제가 그립지 않은 걸까요? 그 때 그 시절, 붉어진 제 얼굴 아래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던 대추리의 삶이 다시 돌아오기를. 저는 기다립니다.


태그:#대추리 사태, #주한미군 확장 이전, #대추리 강제 이주, #평택 노을,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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