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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심가 네프스키 거리의 밤풍경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심가 네프스키 거리의 밤풍경
ⓒ 예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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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모스크바까지 비행기로 9시간 30분, 모스크바 공항에서 4시간의 대기 뒤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1시간 30분의 비행. 장장 15시간을 실내에 갇혀있었던 탓인지 공항을 빠져나와 처음 맛본 러시아의 겨울 밤공기는 그다지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짐을 찾은 뒤 나보다 조금 일찍 독일 베를린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날아와 나를 기다리고 있던 S를 만났다.

시내로 가는 버스, 러시아 사람들을 만나다

공항에서 숙소로 가는 버스를 탔다. 가는 방법이 적힌 종이를 손에 꼭 쥐고 긴장해있는 우리에게 옆자리의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자신의 목적지에서 내리면서 그녀는 우리가 혹시나 잘못 내리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옆에 있던 다른 러시아인 승객에게 우리를 당부하기까지 했다.

여자가 내린 정류장에서 드레드머리(긴 머리를 여러 갈래로 땋거나 뭉쳐 늘어뜨린 머리)를 한 젊은 남자가 탑승했다. 그는 표를 끊으러 온 차장에게 돈은 내지 않은 채 뭐라고 정중하게 이야기를 했다. 아마도 '가난한 학생이니 몇 정류장만 가게 좀 봐달라'고 한 것 같았다. 차장은 허락했고 그는 미안한지 빈자리가 많은데도 굳이 내내 서있었다. 그러다 이번에는 자신에게로 쏠린 승객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갑자기 주머니에서 요요를 꺼내 그것을 진지하게 들었다 놓기 시작했다.

나는 "풉" 하며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차가웠던 러시아의 선입견이 그 남자의 어수룩한 행동으로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매력에 나는 빠져들었다.

처음 경험한 러시아의 밤거리

어느덧 버스가 도착했고, 지하철로 갈아타기 위해 역 안으로 들어갔다. 역에선 바이올린 연주 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 멜로디에 취해 연인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있었다. '네프스키 거리' 뒷골목에 자리한 숙소를 찾아 짐을 푼 S와 나는 밀린 이야기를 나누러 근처 술집으로 향했다.

밤 12시가 넘은 시간이었는데도 거리는 불을 밝힌 바와 클럽들로 환했다. 추운 날씨라 두꺼운 코트를 입었지만 그 속에 탑과 미니스커트를 차려입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 차림새는 나의 머릿속에 인상 깊게 남았다.

꽤 오랜 시간을 시내에서 보내고 숙소로 돌아왔다. 머물던 숙소는 10명이 정원인 기숙사형태의 방이었기에 같은 방 사람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문고리를 돌렸다. 그러나, 나의 배려가 민망하게도 들어와서 보니 방은 텅 비어있었다. 모든 침대 위에  옷가지들이 널브러진 것을 보니 주인이 있는 것이 확실한데 말이다.

그 시각이 새벽 4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밤은 내가 없어도 파티에 흠뻑 젖어 있는 것 같았다.

시베리아의 맨살
2화에서 소개한 안나 레이드의 책을 기억하는가. 시베리아의 역사와 그곳의 민족들을 다룬 그 책의 제목이 생뚱맞게 <샤먼의 코트>인 이유는 저자가 샤머니즘이 러시아의 통치 아래서 원주민들이 얼마나 정체성을 잘 보존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지표라고 믿기 때문이다. 무게가 20kg이 넘는 다양한 장식이 달려있는 '샤먼의 코트'는 샤먼에게 혼령여행을 도와주는 가장 중요한 도구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과 '소비에트' 시절 샤먼들은 샤먼의 코트를 입는 것을 금지 당했고 러시아 옷을 강요받았다.

그러나 제정 러시아 시대의 그림 하나가 이 책의 저자인 안나 레이드의 주의를 끌었다. 러시아 관료를 맞이하는 샤먼을 묘사한 그림으로, 자세히 살피면 샤먼이 러시아 옷 아래 샤먼의 코트를 몰래 입고 있는 것이 살짝 드러나 보인다고 한다. 샤먼들은 암울했던 역사와 압제자의 위협 속에서도 결코 자신의 정체성과 코트를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러시아 젊은이들의 두꺼운 코트 속 미니스커트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이유는 그것이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가진 편견을 걷어낸 '시베리아의 맨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시베리아에 대한 대표적인 두 편견의 이면을 살펴본다

시베리아에 대한 편견 1 : 시베리아가 춥다?

물론 시베리아의 겨울이 춥지 않다고 말하려는 것도, 텔레비전에서 보는 원주민들의 두꺼운 모피 코트와 모자는 그저 시청자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려는 소품일 뿐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베리아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으며 더 추운 곳과 덜 추운 곳이 있다. 예를 들어 오미야콘이란 마을은 세계에서 인간이 사는 곳 중 가장 추운 곳으로 영하 72도를 기록한 적이 있으며 겨울평균기온이 영하 50도 정도 된다고 한다.

시베리아 북극해 연안은 스칸디나비아, 캐나다, 알라스카 북쪽 지방과 함께 툰드라라고 불리는데 1년 중 최고 기온이 10도에 불과하며 삼림한계선 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고도 한다.

반면 내가 탄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지나는 곳은 비교적 남쪽으로 도시화와 난방시스템이 잘 되어 있었다. 여행 시기도 3월과 4월 사이로 봄이 오는 시점이었다. 하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는 한파와 거센 눈보라를 경험하기도 했다. 여기가 이 정도면 시베리아는 어떨까, 걱정하기도 했지만 예상을 깨고 시베리아가 서쪽 도시들보다 더 따뜻했다. 해안성 기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비해 시베리아는 건조해 바람이 별로 차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르쿠츠크에 있을 때는 조금 걸었더니 땀이 차 코트를 벗은 적도 있었다. 마침 전광판을 보니 한낮 기온이 20도. 그날 한국에 있는 가족과 전화통화를 했는데 한국은 꽃샘추위에 시달리고 있었다. 춥지않냐며 걱정하는 가족에게 나는 시베리아의 겨울이 한국의 봄보다 더 따뜻하다며, 여유를 부렸다.

시베리아에 대한 편견 2 : 시베리아가 오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탔을 때였다. 기차 안 내 침대 벽에는 몇 안 되는 콘센트가 있었는데, 첫째 날과 그 이튿날 콘센트를 쓰려는 많은 사람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저마다 색깔도 모양도 다른 전자기기 충전기를 가지고 와서는 벽에 기대고 있는 내게 내 등 너머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미 처음 플러그를 꽂아본 몇몇 사람들을 통해 콘센트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나는 자리를 옮겨주어야 했다. 그리고 충전기를 꽂아도 불이 들어오지 않아 당황해 러시아어로 뭐라 뭐라 묻는 이들에게 눈치껏 고개를 끄덕이거나 저어주었다.

내 침대 콘센트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는지 이제는 모두들 냄새나고 축축한 화장실에 몰려들어 그 안에 있는 콘센트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얼마, 누군가가 멀티 탭을 꺼내들고 차장방과 승객 칸을 연결시켰다. 그는 금세 우리 기차 칸의 최고 권력자가 되어서, 자기 자리도 아닌 자리에 앉아서 노트북으로 최신 영화를 보곤 했다. 그러면 사람들이 다가왔는데, 자리를 비켜달라고 또는 시끄럽다고 항의하려는 걸까 싶었더니 슬그머니 옆에 앉아 영화를 함께 보거나 비어있는 멀티 탭의 콘센트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시베리아의 크고 작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이미 많은 이들이 최신형 휴대폰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앞에서 소개한 옴스크 중학생 아이들은 컴퓨터 게임 이야기에 눈을 반짝였고 S와 나의 이메일 주소를 앞 다투어 알아가려고 했다. 전자기술과 인터넷의 발달로 오지의 삶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콘센트에 몰려있는 기차 승객들
 콘센트에 몰려있는 기차 승객들
ⓒ 예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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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여행은 2012년 3월부터 한 달 동안 다녀왔습니다.



태그:#시베리아 횡단 열차, #국제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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