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차명숙씨가 17일 오후 광주 금남로에서 열린 5.18전야제에 참석해 공연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
 차명숙씨가 17일 오후 광주 금남로에서 열린 5.18전야제에 참석해 공연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
ⓒ 조정훈

관련사진보기


"지금도 5월이 다가오면 잠을 잘 못자요. 3, 4월부터는 뜬눈으로 날을 새우는 경우가 많지요. 불안하고 두렵기도 하고 초조해지고. 아직까지도 그날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했지요. 그러다가 5월이 지나면 잠이 잘 와요."

경북 안동시 옥동에서 '행복한 집'이라는 이름의 홍어전문 식당을 운영하는 차명숙(53)씨는 매년 5월이 되면 광주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 스무 살의 어린 나이에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가두방송을 통해 처음으로 시민들에게 전했다가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고향까지 버려야 했던 아픔 때문이다.

1980년 5·18 때 처음으로 마이크 잡아

전남 담양 창평 출신인 그녀는 1980년 양재학원을 다니다 5·18을 맞았다. 5월 17일 계엄령이 선포된 후 당시 광주 근교에는 헬기가 자주 내렸다 떴다 하면서 군인들이 몰려들고 광주 시민들을 말살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계엄이 선포되면서 잡혀갈 사람은 다 잡혀가고 빠져나갈 사람은 다 빠져나갔다는 소리를 듣고 앰프와 확성기를 통해 광주의 소식을 알리자며 젊은이들이 모여들자 차명숙씨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이크를 잡았다.

차명숙씨를 비롯한 젊은이들은 전남도청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계림동의 계림전파사를 찾아 앰프와 마이크를 빌려 가두방송에 나섰다. 광주항쟁이 시작된 후 처음으로 가두방송을 시작한 것이다.

차씨는 처음에는 누군가가 써주는 쪽지를 읽었다. 17일 계엄령을 선포하기 위해 미스코리아 전야제를 계획적으로 편성해 방송으로 내보냈다는 내용과 미국이 광주의 피를 말리라고 지시했다는 소문, 전두환이 박정희의 양아들이라는 소문 등의 내용이었다. 학생들이 광주로 들어오려는데 차단돼 못 들어온다는 소식과 광주에서 외부로 나가 공부하는 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는 소식, 군인들이 광주의 외각지를 둘러싸고 있다는 소문도 전했다.

19일부터는 음향시설을 버스나 트럭, 택시 같은 차량에 싣고 돌아다니면서 자신이 직접 본 모습과 젊은 학생들이 찾아와 증언한 내용들을 중심으로 가두방송을 했다. 당시 시위현장에서 물이 부족하면 물을 가져다 달라고 호소하고 음식이 부족하면 시민들에게 음식을 모아달라고 호소했다. 시민들에게는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차명숙씨가 광주에 내려온다는 소식에 사랑의 연탄나눔 광주지부 회원들과 광주비엔날레 로타리클럽 회원들이 광주시 북구 래인플라워에서 음식을 준비해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차명숙씨가 광주에 내려온다는 소식에 사랑의 연탄나눔 광주지부 회원들과 광주비엔날레 로타리클럽 회원들이 광주시 북구 래인플라워에서 음식을 준비해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 조정훈

관련사진보기


차씨는 "21일까지 방송을 했는데 병원에서 피가 부족하면 시민들에게 피가 부족하다고 방송을 했고 많은 삶들이 헌혈을 하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며 "당시 광주는 평화로운 도시였다"고 기억했다.

차씨는 이후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다가 26일 저녁 무렵 헌병대에 의해 끌려가 송정경찰서로 넘겨졌고 경차서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 조사를 받으면서 고문과 구타로 인해 어깨가 탈골되고 살이 터지는 고통을 겪었다.

차씨는 "구치소에서 똑바로 앉아있을 수 없어 비스듬히 누워 밥을 먹을 정도로 고통이 심했다"며 '당시 같은 구치소에 수감돼 있던 조아라 YWCA 회장이 내 팬티를 보더니 '앞에는 흰색인데 엉덩이 부분은 시퍼렇게 물이 들어 있더라'고 말해 엉덩이 살이 떨어져 나간 것을 그대야 알았다"고 말했다.

차씨는 곧이어 합수부로 넘겨졌다. 합수부에서는 질문은 하지 않으면서 나무탁자 위에 올려놓고 "덥지?"라며 바가지로 물을 퍼 붓고 등과 무릅을 때리고 군화발로 짓이겼다. 나중에는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잠만 잘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런 고문은 6월부터 3개월간이나 계속되었다.

차씨는 결국 검찰로부터 공갈, 협박, 선동, 포고령 위반, 유언비어 날조 등 10가지가 넘는 죄목으로 단기 10년에서 장기 15년 형을 구형받고 10년의 실형을 선고받은 뒤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1981년 11월 24일 특사로 석방되었다.

3개월간 고문 끝에 구속... 군인들은 "차명숙이 간첩" 소문 내

차씨가 구속되자 군인들이 차씨의 고향 마을을 찾아 "차명숙이 간첩"이라는 소문을 내고 다녔다. 아버지는 차씨를 찾으러 나섰다가 뇌출혈로 쓰러져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감옥에 있으면 춥다며 이불을 사가지고 면회를 오다가 뺑소니차에 치여 두 번이나 수술을 받아야 했다. 결국 오빠는 차씨가 교도소에서 출소하자 호적을 서울로 옮겨버렸다. 차씨의 호적을 서울 노량진구로 옮기자 노량진경찰서 정보과 형사가 광주까지 찾아오기도 했다.

차씨는 서울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1989년 남편의 고향인 안동에 잠시 머물러 내려왔다가 정착했다. 하지만 광주를 찾지 않았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청문회가 열리고 광주청문회가 열렸지만 텔레비젼을 꺼버렸다. 당시의 친구들과 지인들은 물론 교도소에서 만난 운동가들마저도 차씨를 외면했기 때문이다.

차명숙씨가 17일 광주 김대중센터에서 열린 '2013세계인권도시포럼'에 참석해 발언을 하고 있다.
 차명숙씨가 17일 광주 김대중센터에서 열린 '2013세계인권도시포럼'에 참석해 발언을 하고 있다.
ⓒ 조정훈

관련사진보기


차씨는 "당시는 원망스럽고 다시는 그들을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고초를 겪은 사람들이 내 이름을 거명하는 것조차 힘든 시기였기 때문에 나중에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후 16년이 지난 1996년부터 5월이면 광주를 찾았다.

"처음 광주를 찾은 것은 차명숙이 죽었다는 소문과 간첩이었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왔다. 당시에는 마음을 추스리는데도 힘이 벅차서 조용히 왔다 갔다."

차씨가 본격적으로 5·18민중항쟁을 알리고 광주를 찾기 시작한 것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다. 2008년부터 안동에도 5월 광주를 알려야겠다는 생각에서 전교조와 안동시민연대와 함께 여러 행사를 진행했다. 경상도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덜고 5·18을 알리기 위해 주먹밥행사, 사진전 등을 열고 상주에서는 분향소를 차렸다. 전교조와 함께 초중고 글짓기대회도 열었다. 이런 노력은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있다.

5·18민중항쟁 33주년을 맞아 17일 광주를 찾은 명숙씨는 하루종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이날 낮 12시부터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13 세계인권도시포럼'에 참석하고 '따뜻한 한반도 사랑의 연탄나눔 광주지부'가 환영하는 행사에도 참석했다. 저녁에는 금남로에서 열리는 5·18전야제에 참석해 대구와 경북에서 내려온 학생들을 만났다.

금남로 거리를 한참이나 서성이던 차명숙씨는 "광주에 오더라도 마음의 위로를 삼을 뿐이지 치유는 안 된다"며 "창자가 쓰릴 정도의 쓰라린 고통은 말을 못할 정도로 아프지만 세월이 치유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5월이 왜곡되는 것이 두렵고 심리적으로 초조하기도 하지만 5월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 민주주의가 있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 대구나 안동이나 경북의 젊은 청년들에게 조그만 힘이라도 되고 싶고 힘이 된다면 무엇이든 하고 싶다."


태그:#차명숙, #5.18민중항쟁, #가두방송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대구주재. 오늘도 의미있고 즐거운 하루를 희망합니다. <오마이뉴스>의 10만인클럽 회원이 되어 주세요.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