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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37년 전, 유신 독재의 절정기인 1975년 8월 17일, 약사봉 계곡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장준하 선생의 겨레장이 28일(목) 낮 12시부터 30일(토)까지 서울시청 앞 광장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앞서 지난 26일 장준하 선생 사인진상조사 공동위원회에서 장준하 선생 유골 정밀감식 결과, 추락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표했기 때문에 장준하 선생의 사인에 대한 의혹을 규명하는 작업과 장준하 선생의 정신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28일 정오 분향소가 설치된 직후, '장준하 선생 장례 예식'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정의평화위원회의 주관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시기적으로 '장준하 선생 장례 예식'을 시작으로 '장준하 겨레장'의 대장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군사독재시절 인권과 정의를 위해 노력했던 기독교연합기관입니다(회장 : 김근상 성공회 주교, 총무 : 김영주 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마련한 예식 배너
▲ 고 장준하 선생 장례예식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마련한 예식 배너
ⓒ 이인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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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년 전, 의문의 죽음으로 우리의 곁을 떠난 장준하 선생은 이번 '장준하 겨레장'을 통하여 다시금 우리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그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는 작업을 통하여 장준하 선생의 정신과 뜻을 바르게 계승할 수 있는 한 걸음을 내딛게 된 것입니다.

3월 28일(목)에 설치된 장준하 선생 분향소
▲ 고 장준하 선생 분향소 3월 28일(목)에 설치된 장준하 선생 분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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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선생의 영정이 분향소에 도착하여 놓여진 직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인 임광빈 목사의 인도로 장례 예식이 시작됐습니다. 이날 예식은 개신교가 주관을 했지만, 고 장준하 선생을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이 종교를 초월하여 참석하여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장준하 선생을 기억하고 기리는 분들이 종교를 초월해서 참석하였습니다.
▲ 장준하 선생 장례 예식 장준하 선생을 기억하고 기리는 분들이 종교를 초월해서 참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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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앞쪽에 유족이 예식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 장준하 장례 예식 중앙 앞쪽에 유족이 예식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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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맡은 배태진 목사(한국기독교장로회 총무), 설교를 맡은 허원배 목사(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조사를 낭독한 박덕신 목사(인권목회자동지회)는 모두 한 목소리로 장준하 선생의 의문스러운 죽음에 대한 진실이 반드시 규명되어야 하며, 장준하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유가족 대표인 장호권 선생(고 장준하 선생 장남)은 인사를 통해서 장례 예식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며 장준하 선생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규명되는 과정을 주시하며 앞으로의 상황에 대해 대처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장준하 선생 장례 예식에서 장남 장호권 선생이 유족 대표로 나와 인사하고 있습니다.
▲ 장준하 선생 장남 장호권 선생 장준하 선생 장례 예식에서 장남 장호권 선생이 유족 대표로 나와 인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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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선생 장례 예식이 끝나고 참석하신 분들이 고인의 뜻을 기억하며 헌화하고 있습니다.
▲ 장준하 선생 분향소 헌화 장준하 선생 장례 예식이 끝나고 참석하신 분들이 고인의 뜻을 기억하며 헌화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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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선생의 유족들
▲ 장준하 선생 유족들 장준하 선생의 유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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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반드시 규명되어야 하고, 국민은 그 진실을 알아야 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국민의 대표자로 선출된 박근혜 대통령과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국가기관은 그 진실을 밝히는 작업에 협조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국가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돼 있고, 박근혜 대통령은 그러한 헌법을 수호할 것을 국민들 앞에 맹세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부터 시작된 장준하 겨레장을 통해서 장준하 선생의 유가족과, 유신과 군사독재에 의해 희생된 많은 이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의문스러운 장준하 선생의 죽음

37년 전, 실족사로 발표된 이후 그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금기시 되었습니다. 당국은 실족추락사라는 결론과 발표를 서둘러 내려버렸습니다. 죽음에 의문을 제기했던 기자들은 감옥에 끌려갔고, 추가 취재를 하던 기자들은 미행을 당하고 취재 중단을 강요받았습니다. 장준하 선생의 장남인 장호권 선생은 정체모를 괴한들에게 폭행을 당한 후에 해외로 떠나야 했습니다. 이렇게 장준하 선생의 죽음은 세월과 함께 묻혀버리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15m 높이에서 실족 추락사 한 시신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많은 의문점이 제기되었습니다. 사고 당시 유품인 안경, 보온물병, 손목시계가 깨지지 않았고, 겉옷에도 긁히거나 찢긴 흔적이 없었습니다. 시신에는 두 개의 주사바늘 자국과 우측 귀 뒤쪽 함몰상처, 양팔에 난 피멍 외에는 어떠한 상처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추락했다는 등산로 역시 전문 등산인도 장비 없이는 도저히 도전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유일한 목격자라는 모씨의 증언에는 상당 부분 모순된 부분이 있었습니다.

3월 28일부터 30일까지 진행되는 장준하 선생 겨레장 안내
▲ 장준하 선생 겨레장 안내 3월 28일부터 30일까지 진행되는 장준하 선생 겨레장 안내
ⓒ 장준하선생 암살의혹규명 국민대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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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등산 장비도 갖추지 않고, 등산화도 아닌 구두로 장준하 선생의 추락 지점까지 갔으며, 실족 추락사 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필수적 소요시간의 반도 안되는 시간을 초인적인 능력으로 내려와 사람들에게 장준하 선생의 실족 추락사를 증언한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진술은 많은 부분 앞 뒤가 맞지 않아서 과연 그가 장준하 선생의 실족을 목격한 사람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스럽습니다.

세월은 어느덧 30여년이 흘렀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의 죽음이 단순한 실족사가 아니라 어떤 정치적인 음모에 의한 타살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장준하 선생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유일한 목격자로 자처한 모씨의 일관성 없는 진술과 거짓말에 막혔고, 국가정보기관(국정원과 기무사)들의 자료 비협조로 진행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였습니다. 결국 시간에 쫓긴 진상규명위원회는 '실족추락사가 아닌 것이 분명하나, 정보부족으로 진상규명불능'이라는 미해결 과제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37년 동안 감추어져있던 진실은 2012년 8월 1일 밝혀졌습니다. 묘소이장 과정에서 장준하 선생의 유골을 정밀 감식하여 추락에 의한 죽음이 아니라, 머리 가격에 의한 죽음일 것 같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장준하 선생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당시 장준하 선생의 존재를 제일 위험하다고 생각한 고 박정희 대통령을 의심합니다. 만약 고 박정희 대통령이 장준하 선생의 죽음과 전혀 상관이 없다면, 박근혜 대통령은 이번에 장준하 선생의 죽음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합니다.


태그:#장준하, #장준하 겨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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