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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의 시대> 겉표지
 <탐욕의 시대> 겉표지
ⓒ 김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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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의 국민들은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에서 기아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을 매우 잘 알고 있다. 알게 모르게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약육강식의 질서 그리고 자신들의 공범관계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수치심은 곧 무기력해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괴로운 의식을 잠재우기 위해서 그럴듯한 정당화에 빠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가령 이런 것이다. 가난함에 시달리는 아프리카를 바라보며, 그들이 게으르고, 부패하고, 무책임하고, 불안정한 정세 때문에 결국 '타고난 채무자'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하지만 이 결론은 옳은 것일까? 이 책은 이런 의문점에서 시작된다.

저자 장 지글러는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을 역임하고 자신이 겪고 들은 바를 이미 그의 저서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통해 펼쳐놓았다. 이 책은 120억의 인구가 먹고도 남을 식량이 생산되고 있고 몇몇 국가에서는 일부러 식량 생산을 조절한다는데, 왜 하루에 10만 명이 기아로 죽어 가는지를 조목조목 설명해 놓았다. 그리고 다시 <탐욕의 시대>를 통해 연대를 주장하고 있다.

오늘날 제3세계가 겪고 있는 기아, 부채, 결핍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인류 역사 속에 꾸준히 존재했던 재앙이었다. 마르크스는 이런 개념을 '객관적 결핍(Der objektive Mangel)'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객관적 결핍 현상은 오늘날 더 이상 통용되기 힘들다. 20세기 후반에 들어 인류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산업, 기술, 과학 분야에서 놀라운 성과들이 이어졌다. 그에 따라 생산력 향상에도 가속도가 붙었다. 지금 가난한 나라들이 겪고 있는 빈곤 현상은 결코 생산 시설이나 자원이 부족해서 나타나는 것이라 할 수 없다. 그렇다. 이들의 결핍은 객관적 결핍이 아니라 인위적 결핍이다. 인간의 생명을 담보로 잡은 재화의 공평하지 못한 분배, 즉 다국적 기업들, 자본의 횡포 때문이다.

어떤 재화가 가지는 가치는 그 재화의 희귀성에 비례한다. 재화가 희귀하면 값은 자연히 올라간다. 풍요와 무상(無償)은 기업가들에게 악몽이다. 이런 단어를 없애버리고 싶을 것이다. 오직 희귀성만이 이익을 보장한다. 그러니 희귀성을 만들어 내자!

이런 다국적 기업의 횡포 속에 각국 정부는 물론 국제기구와 국제법도 힘을 잃고 있다. 국제 평화를 위한다는 목적이 무색하게 각국의 군비 지출은 늘어만 간다. 대체에너지를 개발하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49개국의 부채를 탕감해주고, 에이즈 치료를 위한 치료요법과 전염병 예방주사를 보급하고, 빈민촌과 영양실조, 그리고 기아를 퇴치하는 데에 1620억 달러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1년 동안 전 세계의 군비 지출은 7800억 달러였다. 또한 일자리를 없애고 공장을 옮겨버리겠다는 기업의 으름장 앞에 각국 정부는 초라하기만 하다.

부채, 그 추악한 악성 종양

한 나라의 국민들을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 더 이상 총과 칼이 필요하지 않다. 부채라는 도구가 그 모든 역할을 더욱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피를 흘릴 필요도 없고, 물자를 쏟아 부을 필요도 없다. 간단하다. 외채를 제공해주기만 하면 된다.

외채는 마치 치료하지 않고 방치한 종양과 같다. 끊임없이 자라나는 것이다. 돌이킬 수 없이 불어난다. 이러한 악성 종양은 제3세계 국가의 주민들이 가난과 비참함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방해한다. 아니, 오히려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93쪽)

부채에 뒤따르는 원리금 상환은 채무국의 국민총생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때문에 각종 사회안전망에 투입되어야 할 예산은 고스란히 채권국과 외국 자본의 호주머니로 들어간다. 이런 경우 군대나 경찰, 정보원 등의 예산을 삭감하는 일은 거의 없다. 이들은 외자 유치의 안전성을 보장해주는데 유용하기 때문이다. 악순환의 시작이다.

각국 예산에서 사회 부문 비용과 부채 관련 비용이 차지하는 비율
 각국 예산에서 사회 부문 비용과 부채 관련 비용이 차지하는 비율
ⓒ 김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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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기아는 부채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부채를 상환하느라 사회기반 시설, 농업, 운송, 유통, 산업, 식량 등에 투자할 여력이 남지 않기 때문이다. 기아가 만들어내는 영양실조와 영양결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특별한 처방전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빠르게 퇴치할 수도 있다. 그저 서구 사회와 똑같은 처방을 적용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결코 쉽지 않다. 그들에게는….

당신이 마시는 커피, 에티오피아의 눈물

커피는 에티오피아의 주요 외화 벌이다. 척박한 땅에서 확실하게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확실한 수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에티오피아인들은 커피를 '갈색 황금'이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이 황금이 처한 상황은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실제로 커피를 땀 흘려 생산하는 농부들이 받는 가격은 재난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폭락하고 있다. 특히 에티오피아에서는 95%가 소규모로 가족끼리 농사를 짓는 상황임을 감안한다면, 이는 더욱 심각한 일이다.

그렇다고 다국적 커피체인점에서 판매하는 커피 가격도 폭락했느냐? 이에 대한 답은 나보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시리라. 통계치를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1990년, 전 세계의 커피 생산국들이 원두를 팔아 번 돈은 110억 달러였다. 같은 해 전 세계의 소비자들이 커피 값으로 지불한 돈은 300억 달러다. 2004년, 커피를 생산하는 농부들이 벌어들인 돈은 고작 55억 달러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소비자들이 커피를 사면서 지출한 돈은 700억 달러다. 645억 달러는 도대체 누구의 손에 들어갔는가!

기아와 영양결핍, 아메바성 질병, 결핵 등이 커피 생산자들과 그의 자식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사이에 세계 커피 시장을 점령하고 있는 5대 기업은 폭발적인 매출액의 증가를 기록했다. 사라 리의 이익은 2000년 한 해 동안 17% 상승했고, 네슬레는 무려 26%, 치보는 47% 상승했다.

커피 생산국의 경우 다국적 유통업체에 의해 만들어진 가난을 겪고 있다면, 브라질은 외채가 만들어낸 수렁에 빠져버렸다.

내란이 빚어낸 집단학살에 사용된 무기를 수입하느라 들인 비용을 갚아야 하는 르완다와는 경우가 다르지만, 브라질도 군사 독재정권과 이와 결탁한 허수아비 대통령들이 수출입은행이나 국제통화기금, 유럽이나 일본·북미 지역 민간 은행들로부터 끌어다 쓴 천문학적인 액수의 부채를 갚아야 하는 처지다. 독재자들은 국민의 자유를 박탈하고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을 고문했을 뿐만 아니라, 오로지 북미 지역의 후견인들의 이익만을 챙기느라 자국의 부를 제멋대로 사취했다. 군사 독재정권 이후에 들어선 대통령들은 부패를 조장했으며(대부분 부패의 과실은 같은 패거리들에게로 돌아갔다), 수익성이 높은 공공기업을 외국 자본에 유리하도록 민영화해버렸다. (221쪽)

저자인 지글러 박사는 이런 전횡을 일삼는 무리를 '신흥 봉건제후'라 칭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비중이 큰 500대 다국적 기업은 지구 전체 생산의 52%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 500개 기업 중에서 절반 이상이 미국에서 출발한 기업들이고, 전 세계 고용량의 1.8%만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500개 기업이 축적해놓은 부는 133개 국가의 부를 모두 합한 것보다 크다. 이런 불균형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이런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세력은 누구인가. 이런 교착 상태를 이용해 천문학적인 이득을 보는 이들은 누구인가.

책을 덮으면서도 지글러 박사에게 브라질 수도원의 계단에 앉아 있던 어린 여자아이가 했다는 말이 잊혀지지 않아 가슴이 아팠다.

"난 본드를 피워요. 나한텐 미래의 삶이라는 게 없거든요."

덧붙이는 글 | <탐욕의 시대>, 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 갈라파고스 펴냄, 2008.12, 15,000원
이기사는 제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탐욕의 시대 - 누가 세계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

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 갈라파고스(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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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탐욕의 시대, #장지글러, #갈라파고스, #누가 세계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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