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차대전이 끝나고 한때 체코슬로비아 정부의 임시정부사무실로 쓰였던 건물이다.
▲ 슬로바키아 타트라의 호텔숙소. 2차대전이 끝나고 한때 체코슬로비아 정부의 임시정부사무실로 쓰였던 건물이다.
ⓒ 정윤섭

관련사진보기


우리가 탄 버스의 운전사는 체코 출신의 '온드라'라고 하는 아주 키가 큰 남자였다. 일미터 구십이 넘는 아주 키가 큰 삼십대의 남자였다. 이 남자는 말을 붙여도 쉽게 대답을 하지 않는 무뚝뚝하게 생긴 사람이었지만 무척 온순하게 보였다. 붙임성이 없는 대신 묵묵하게 자신의 일을 하는 그런 스타일, 그렇지만 이십여년 전까지 사회주의 국가였던 동유럽의 역사가 말해 주듯 거기에는 뭔가 자유롭지 못한 딱딱함이 묻어나는 듯했다.

동유럽을 처음 여행해 본 사람은 옛 사회주의 국가였던 당시의 폐쇄된 사회를 떠올리기 쉽다. 그러한 선입견 때문인지 모르리라 생각해 보았다. 온드라는 귀에 귀걸이를 차고 있었다. 청바지에 스웨터 상의의 심플한 옷차림과 귀걸이, 왠지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도 안 어울리게 느껴지는, 하지만 그 순박하게 느껴지는 인상 때문인지 거리감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유럽은 동유럽과 서유럽의 역사와 경제적 차이로 인해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도 다르다고 한다. 여행 버스의 운전사와 같은 경우도 서유럽 출신의 운전사가 에누리 없이 원리원칙에 의해 상대방을 대하는 서울내기 같은 경우라면 동유럽의 운전사는 시골에서 상경한 지 얼마 안되는 아직 때 묻지 않은 순박함이 남아 있는 그런 스타일이라는 것이다.

하나 된 유럽연합 속에서

이 호텔안에는 한때 임시정부 사무실로 사용하였음을 알려주는 사진들이 붙어있다.
▲ 호텔안의 임시정부 관련사진 이 호텔안에는 한때 임시정부 사무실로 사용하였음을 알려주는 사진들이 붙어있다.
ⓒ 정윤섭

관련사진보기


동유럽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 국가로 된 지가 벌써 이십년이 넘고 이제는 유럽연합에도 포함되어 있으며 유로화도 함께 쓰는 등 거의 하나의 유럽 속에 포함되어 있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버스를 타고 검문검색 없이 전 유럽을 여행 할 수 있다는 것을 보면 하나의 유럽임을 느낄 수 있다. 아직 유로화를 쓰지 않는 국가도 있지만 유로화는 하나된 유럽을 상징적으로 말해 준다.

하지만 유럽연합은 아직도 심한 내홍을 겪고 있다. 남유럽 국가의 금융위기로 인한 악화된 경제사정이 말해 주듯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유럽은 아직도 섞이지 않는 용광로 속에서 하나의 주물로 탄생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하나가 되기 어렵다는 느낌도 들게 한다.

폴란드로 넘어가기 전 우리는 동유럽의 알프스라고 하는 슬로바키아의 타트라에 있는 숙소에서 하룻밤을 묵어가기로 하였다. 이 숙소는 아주 유서 깊은 건물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는 호텔이었다. 2차 대전 때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임시정부청사로 사용했던 건물로 유럽에는 역사가 오래된 건물을 호텔로 개조해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런 오랜 역사를 간직한 건물의 호텔에서 하룻밤을 자보는 것도 행운이었다.

버스는 고원지대인 타트라의 산악지대를 지나며 숙소인 호텔로 가고 있었다. 타트라는 슬로바키아와 폴란드, 체코 3개국이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악지대로 많은 사람들이 겨울 스포츠를 즐기려 오는 곳이기도 하였다.

창밖으로는 흐리고 금방 비라도 뿌릴 날씨였다. 시계가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창밖은 밤처럼 어두웠다. 유럽의 전형적인 겨울날씨였다. 유럽은 겨울이 우기고 여름이 건기가 되기 때문에 겨울은 내내 흐리고 비가 온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일찍 해가 지고 늦게 해가 뜨는 긴 밤의 겨울이 계속된다. 거기에다가 아주 빈번히 흐린 날에 비까지 오니, 겨울은 가장 힘들고 지루한 계절이란다.

이 때문에 겨울에는 우울증에 걸리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데 이 긴 겨울을 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술이다. 그 중에서도 보드카, 보드카는 소련이 유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폴란드가 보드카 종주국이라는 말도 있다. 폴란드의 보드카는 600년이 넘는 오랜 역사의 전통주라고 하니 자랑할 만하다. 이런 겨울을 넘기려면 독한 보드카 없이는 살기 어려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겨울비와 <인생은 아름다워>

비는 금방 쏟아질 듯 창밖은 어둡다. 잠깐 눈이라도 붙여 보려고 하지만 이런 때는 잠도 오지 않는다. 버스는 끝없이 고원지대의 숲속을 달린다. 지금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 목적지가 정해져 있지 않다면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이때 버스에서 비디오로 틀어준 영화가 이제는 고전이 된 <인생은 아름다워 life is beautiful> 였다. 잠이 안 오는 시간을 땜질하기 위해 틀었을 것 같은 이 영화. 어둑한 영화관 같은 바깥 풍경 때문에 시선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 영화는 1999년에 개봉한 이탈리아 영화다. 2차 대전을 배경으로 당시 유럽의 분위기를 잘 느끼게 해주는 영화였다.

이 영화는 처음 역설적이게도 코믹영화처럼 전개된다. 그러나 영화가 중반에 접어들 무렵이면 영화에 깊게 몰입하게 된다. 그것은 행복하게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던 주인공 귀도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독일군에 의해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는 반전이 이루어지면서 부터다.

희극과 비극의 연속된 전개는 2차 대전이라는 전쟁의 극한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는 아우슈비츠라는 전쟁의 가장 비극적 상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하루하루 마지막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모습을 희극적으로 그려 인간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갖게 한다. 때문에 이 영화는 굉장히 희극적이면서도 비극적으로 느껴진다.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속에서 살아가야 했던 상황에 대한 공감 때문이었을까. 다음날의 여행지가 오시비엥침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오버랩되어 마음은 진짜로 멜랑콜리(우울)해진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와 같은 서유럽의 화려한 도시에 비해 옛 사회주의 국가였던 동구권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동구권에는 헝가리, 체코와 같은 나라들이 있지만 폴란드를 방문할 때는 왠지 더 기분이 무거워진다. 그것은 2차 대전과 그 전쟁의 상징이 된 아우슈비츠 수용소 때문이다.

이제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 국가로 바뀐지가 이십년이 넘어가고 많은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사회분위기는 아직도 당시의 분위기를 반영하듯 표정없고 딱딱한 얼굴들이 지나간다. 억압된 사회의 이념과 생활이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까지도 긴 시간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가 오고 흐린 회색빛의 겨울 유럽여행은 그래서 더욱 무겁다.

이때 대학의 초년생 때 허름한 자취방에서 읽었던 체코 출신의 작가 밀란 쿤데라가 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생각났다. 화려한 유럽의 모습도 역사 속에는 그렇게 무거운 상처들이 얽혀있다.

폴란드는 2차 대전의 피해를 가장 많이 본 국가 중에 하나다. 독일과의 전쟁으로 인해 대부분의 도시들이 파괴되고 없어졌다. 독일의 공습으로 큰 도시들은 거의 초토화가 되었다고 한다. 저항이 남긴 결과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체코의 고도 프라하나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는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아 옛 고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일찍 독일에 항복한 대가가 이제는 수많은 관광의 수혜를 입고 있다. 

독일과 폴란드는 역사적으로도 매우 앙숙의 관계를 가진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의 한일 축구처럼 독일과 축구를 하여 지면 절대로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다고 한다.

광기의 역사 아우슈비츠 수용소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학생들을 비롯한 단체관람객들이 많아 중요한 현장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 수용소를 관람하는 관람객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학생들을 비롯한 단체관람객들이 많아 중요한 현장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 정윤섭

관련사진보기


다음날 타트라 산맥의 숙소에서 출발하여 도착한 곳은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는 폴란드의 오시비엥침이었다. 오시비엥침은 폴란드의 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로 인구 5만 가량의 작은 공업도시였다고 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라는 명성 때문에 이곳은 아우슈비츠로 잘 알려져 있지만 아우슈비츠는 독일식 이름이고 폴란드 이름은 오시비엥침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도착할 무렵엔 겨울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아마도 당시의 분위기를 돋우어 주는 듯하다. 이렇게 비가 오면 그때의 혼령들이 나타날 것 같은 분위기가 연출된다. 가이드는 이곳에서는 절대로 떠들면 안되고 사진도 맘대로 찍으면 안된다고 주의를 준다.

딴에는 재미있게 농담을 하면서 설명을 하던 가이드가 아우슈비츠에 도착하자 속삭이듯 갑자기 엄숙해 진다. 인간에 대한 예의이자 경건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모두들 열을 지어 떠든 사람없이 관람 하는 것을 보면 전쟁에 대한 기억이 인간을 얼마나 두렵고 피폐하게 만드는가를 느끼게 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당시 역사의 흔적을 그대로 보존해 지금은 국립 오시비엥침 박물관이 되어있다. 이곳은 1940년에 만들어진 제1수용소로 이곳에서 약 3km 가령 떨어진 곳에 1941년 제2수용소가 만들어졌다. 이 수용소에는 1942년 한때 2만8000여 명까지 수용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독일의 히틀러는 유럽 교통의 중심지이자 전쟁 물자를 생산하기 좋은 이곳에 대규모의 수용소를 짓고 처음에는 폴란드의 정치범을 수용하기 위해 사용하였지만 나중에는 유태인과 집시, 소련군 포로를 비롯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끌려온 사람들이 수용되었다.

이 중에는 순전히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나타내기 위해 유태인을 비롯 다른 민족 사람들을 모아 수용소에서 집단학살하는 잔혹의 역사로 인류 최대의 죄악을 범하게 된다.

일을 하면 자유로워진다

정문에는 '일을 하면 자유로워 진다'는 독일어 문구가 붙어 있다.
▲ 수용소 정문 정문에는 '일을 하면 자유로워 진다'는 독일어 문구가 붙어 있다.
ⓒ 정윤섭

관련사진보기


당시 수용되었던 사람들의 사진과 이들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 수용소 전시관 유품들 당시 수용되었던 사람들의 사진과 이들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 정윤섭

관련사진보기


제1수용소의 입구 정문에는 독일어로 "일을 하면 자유로워 진다"는 글씨가 쓰여져 있다.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은 이 문을 통해 매일 강제노동에 끌려나가 하루 12시간 이상씩 노동을 했다고 한다. 거의 잠자는 시간 외에는 온종일 중노동에 시달렸다고 할 수 있다. 이 노동에서 견디지 못하면 바로 죽음의 길로 들어섰다.

수용소 건물들은 붉은 벽돌의 창고 같은 2층 형의 규격화된 건물들이다. 수용소의 일부 건물들은 현재 전시관으로 개조되어 당시 수용소에 끌려온 사람들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사진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잘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인생은 아름다워>나 <쉰들러리스트>에서 보듯 잠옷 같은 줄무늬의 옷을 입고 수용소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는 수감동과 처형대, 고압전류가 흐르던 철조망, 가스실 등 당시의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시설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은 중노동과 의학실험의 대상이 되었고 가스실에서 죽으면 붙태워져 기름의 일부가 비누로 만들어지거나 한줌의 재로 사라졌다. 이 수용소에서 150만 명이 학살당했다고 하니 그 광기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수용소에 끌려온 이들의 신발이 수북히 쌓여있다.
▲ 수용소에 끌려온 이들의 신발 수용소에 끌려온 이들의 신발이 수북히 쌓여있다.
ⓒ 정윤섭

관련사진보기


가스실 벽면에는 고통스럽게 죽어가며 벽을 할퀸 이들의 손톱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다.
▲ 수용소 가스실 가스실 벽면에는 고통스럽게 죽어가며 벽을 할퀸 이들의 손톱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다.
ⓒ 정윤섭

관련사진보기


옛 수용소는 여러 동의 건물에 당시의 모습들이 사진과 유품들로 잘 재현되어 있다. 가이드는 아직도 폴란드에 몇 사람의 생존자가 있다고 하여 당시의 역사가 아직도 현재형임을 알려준다.

수용소는 일반인들도 오지만 학생들로 보이는 단체 관람객들이 눈에 많이 띈다. 그 중에서도 독일에서 온 학생들이 많다고 한다. 독일은 자신들이 저지른 역사의 현장을 철저히 반성하고 이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한 교육을 한다고 한다. 유럽의 최강국이 된 독일의 여유일까 아량일까, 아직도 당시 피해를 입은 국가나 개인에 대한 보상을 진행하고 있다고 하여 진정으로 자신들의 과오에 대한 뉘우침이 진실임을 알게 한다.

우연히 목격한 것이지만 전시관 건물의 창밖으로 구급차가 한 학생을 급히 싣고 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잔혹한 당시의 사진들을 보다 쇼크로 쓰러진 학생이라고 하는데 이곳에서는 가끔씩 이러한 일이 벌어진다고 한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이곳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최근 한국인들도 많이 찾는 곳이 되고 있지만 일본인들은 잘 찾지 않는다고 한다. 똑같은 2차 대전의 전범 국가이지만 그 뉘우침에 대한 시각이 얼마나 다른가를 알 수 있다.

수용소 관람의 마지막 코스에는 가스실이 있다. 가스실에 들어가면 벽에 마지막 몸부림을 치면서 할킨 손톱자국들이 무수히 남아있다. 그리고 바로 옆방은 시체를 태우는 2대의 가마가 남아있다. 하루에 300여 구의 시체를 태웠다고 한다.

가스실을 나와 전기철조망을 통과하는 곳에는 처형대가 서 있다. 이 교수대는 1947년 4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소장 루돌프회스를 사형 집행한 교수대로 역사의 교훈처럼 그렇게 음산하게 서 있다. 

다음 목적지로 가는 버스 안에서는 어제 보았던 <인생은 아름다워>가 다시 되새겨져 온다. 그중에서도 기억하고 싶은 것은 하루에도 수없이 다가오는 죽음의 순간 속에서도 아들과 사랑하는 아내와의 재회를 위해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주인공 귀도의 모습이다. 그래 모든 절망 속에서도 인생은 아름다워야 한다.

교수대는 독일군이 항복하고 이 수용소의 소장이었던 루돌프회스가 처형되었던 교수대로 역사의 교훈을 말해주고 있다.
▲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이 처형된 교수대 교수대는 독일군이 항복하고 이 수용소의 소장이었던 루돌프회스가 처형되었던 교수대로 역사의 교훈을 말해주고 있다.
ⓒ 정윤섭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지난해 12월에 갔던 동유럽 여행기입니다.



태그:#동유럽, #유럽연합,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해양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