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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촬영지. 감독이자 주연 배우였던 주걸륜이 실제 졸업한 학교다.
▲ 담강고급중학 전경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촬영지. 감독이자 주연 배우였던 주걸륜이 실제 졸업한 학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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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한류'의 바람을 타고 일본과 중국의 관광객들이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를 찾아 물밀 듯 우리나라를 찾아오듯, 타이완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촬영지가 아니었다면 사람들이 찾아오기는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텐데, 일약 최고의 관광지로 각광받게 된 곳이 많다. 영화 한 편이 '뽕나무밭을 푸른 바다'로 변모시켰다고나 할까.

타이베이 교외의 단수이와 주펀, 핑시 등이 대표적이다. 유명한 문화재나 볼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곳도 아닌데 관광객들이 사시사철 끊이지 않는다. 타이완을 소개하는 관광 안내 책자의 표지마다 단골 모델로 등장하는 사진도 대개 그곳들을 배경으로 찍은 것이다.

타이베이 MRT(지에윈)의 종점에 자리한 단수이는 본디 17세기 서구 식민주의자들이 타이완에 첫발을 내디딘 곳이다. 개항 당시의 서구 열강의 대사관저와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와 교회 등이 그대로 남아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요새인 홍모성(紅毛城)과 옛 영국대사관저, 진리대학 등이 지금도 우뚝하다.

이곳을 점령한 네덜란드인들의 머리카락이 붉다는 뜻으로 명명되었다는 홍모성의 꼭대기엔 지금 중화민국의 국기가 펄럭이지만, 서양식 건물들이 즐비하여 마치 유럽의 어느 도시에 온 듯한 느낌을 받는다. 홍모성 옆의 진리대학은 서양식으로 지어진 타이완 최초의 대학으로, 캠퍼스의 조경이 아름다워 학교라기보다는 마치 잘 꾸며진 공원 같다.

진리대학과 벽을 사이에 두고 담강고급중학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촬영지다. 감독 겸 주연 배우였던 주걸륜이 실제 졸업한 학교로 알려져 있다. 영화로 워낙 유명세를 탄 학교여서 그런지 교정을 거니는 사람의 절반은 관광객이다. 공부에 적잖이 방해가 될 법도 하건만, 관광객들을 대하는 학생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밝다.

버스 정류장에서 홍모성, 진리대학을 거쳐 이곳에 이르는 가파른 골목길은 영화 팬들에게는 '순례길'이다. 관광객들이 오며 가며 나누는 대화는 모두 영화의 줄거리에 관한 것이고, 그들이 멈춰 선 곳은 모두 영화 속 배경이다. 영화와 똑같은 장면을 연출해 사진을 찍기도 하는데, 줄을 서서 기다리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단수이가 서구적인 분위기라면, 영화 <비정성시>의 배경이 된 주펀은 단연 타이완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곳이다. 본디 이곳은 바다와 면한 산비탈에 아홉 가구가 오순도순 살던 오지 중의 오지였는데, 농산물을 팔아 외지에서 물자가 들어오면 사이좋게 9등분했다고 해서 마을 이름이 주펀(九分)이 되었다고 전한다.

평일인데도 관광객들로 발디딜 틈이 없다. 영화 촬영지라기보다는 어느 도시의 야시장 같은 풍경이다.
▲ 주펀 지산제의 인파 평일인데도 관광객들로 발디딜 틈이 없다. 영화 촬영지라기보다는 어느 도시의 야시장 같은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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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 마을 주펀은 두 차례의 '개벽'을 맞게 된다. 처음은 일본 점령기 때다. 1920년대 이곳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일확천금을 꿈꾸고 외지인들이 몰려들었는데, 비탈지고 좁은 골목마다 술집과 찻집, 극장이 들어서면서 조용하던 마을은 밤낮이고 흥청망청 대는 환락가로 변모했다. 사람 냄새 가득한 주펀이라는 이름 대신, '작은 상하이(小上海)'로 불렸던 때다.

여느 광산도시가 그렇듯, 호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금광이 바닥을 드러내자 사람들이 떠나간 마을은 을씨년스러움만 남았다. 골목마다 홍등을 내걸고 손님들을 불러 모았던 목조 건물들은 이끼가 덮였고, 마치 쇠붙이 녹슬 듯 거뭇하고 흉물스럽게 변했다. 금광도시 주펀의 영화는 그렇게 끝나는 듯 보였다.

그렇게 퇴락해가던 주펀은 영화 <비정성시>의 배경이 되면서 '환생'하는 운명을 맞는다. 과거의 영화를 훌쩍 뛰어넘는, 타이완 최고의 관광지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낡은 극장과 녹슨 영사기는 옛 추억을 자극하고, 허름한 목조 건물과 삐걱거리는 탁자와 의자는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으로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버려진 것들이 새 생명을 얻은 것이다.

'골드러시' 시절에도 과연 이랬을까 싶을 정도로, 요즘 주펀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다. 관광객들에 의해 떠밀리 듯 입구인 지산제(基山街)에 들어서면 온통 기념품과 먹거리를 파는 가게들뿐이다.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다 보면 이곳을 왜 찾아왔는지 까맣게 잊게 된다. 이쯤 되면 영화의 촬영지라기보다는 쇼핑센터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듯싶다.

드라마나 영화, 광고 등을 통해 일약 '타이완의 풍경'이 된 수치루(竪崎路)는 주펀을 상징하는 곳이지만, 영화에서 본 모습과는 판이하다. 가파른 계단과 오래된 목조 건물들은 그대로지만, 손님을 끌기 위한 형형색색의 간판들이 옛 모습을 가려버린 탓이다. 가게의 담벼락마다 배우들의 사진이나 영화와 드라마 포스터 등을 걸어놓고 서로 '원조'임을 뽐내고 있었다.

어두운 영화 탓일 테지만, 관광객들이 떠올리는 주펀은 북적이고 화려한 도회지가 아닌 고즈넉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운 흑백의 이미지다. 영화 속 찻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관광 안내서가 알려주는 대로 골목길을 걸어보지만, 영화에서 본 것과 달라도 너무 다른 풍경에 적잖이 실망하며 발길을 돌리게 된다.

세계 영화인들이 꼽은 최고의 중국 영화라는 <비정성시> 덕에 주펀이라는 이름이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됐지만, 지금 주펀에서 그 영화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주펀을 한 번쯤 방문한 이라면 공감할 테지만, 비좁은 골목과 어귀마다 북적이는 관광객과 호객하는 상인들이 뒤엉켜 있는 어수선한 모습, 그게 지금 주펀의 이미지다.

영화 <비정성시>가 촬영된 곳으로, 지금은 형형색색의 광고판이 뒤덮고 있어 예스러운 맛을 잃었다. 계단 오른쪽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작한 드라마 <온 에어>가 촬영된 곳이라는 광고판도 붙어있다.
▲ '타이완의 풍경' 주펀의 수치루 영화 <비정성시>가 촬영된 곳으로, 지금은 형형색색의 광고판이 뒤덮고 있어 예스러운 맛을 잃었다. 계단 오른쪽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작한 드라마 <온 에어>가 촬영된 곳이라는 광고판도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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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영화 <타이베이에 눈이 내리면>의 촬영지인 핑시는 아름다운 정취를 간직한 풍경과 타이완 전통의 천등(天燈) 행사의 발상지라는 이유로 인해 외려 영화를 돋보이게 한 경우다. 단수이와 주펀과는 달리, 핑시에서는 영화 속 배경을 찾아 카메라를 들이대는 관광객이 많지 않은 이유다. 풍경이 영화고, 그곳에 사는 주민들의 삶이 곧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핑시는 가는 방법부터가 영화다. 단수이와 주펀과는 달리, 반드시 기차를 타야만 갈 수 있는 곳이다. 멀어서가 아니라 깊은 산 중에 자리 잡은 마을인데다 높은 산과 산 사이의 협곡을 따라 단선 기찻길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일본 점령기에 광산이 발견되면서 석탄을 실어 나르기 위해 놓인 '산업철도'지만, 폐광된 이후 관광철도로 탈바꿈되었다.

시속 30km쯤 될까. 비탈지고 구불구불한 철로 탓에 속도를 내기 어려워 기차는 산책하듯 달린다. 워낙 느리다보니 빨리 달렸으면 보지 못했을 풍경을 두루 만끽할 수 있다. 벼랑에 매달리듯 지어진 옛집들, 족히 100년은 된 듯한 나무다리와 폭포가 반갑게 인사한다. 곡선 철길에서 기차 바퀴가 철로와 부딪치며 내는 거친 쇳소리마저 정겹게 들리는 추억의 여행길이다.

핑시로 가는 기차는 가면 되돌아와야 하는 외길인 탓에 대개 왕복표를 구입하게 되는데, 해당 구간 내에서는 어떤 역에서 내리고 다시 타든 하루 동안 무제한으로 기차를 이용할 수 있다. 말하자면 '하루 이용권'인 셈인데, 대략 왕복하는 기차가 한 시간에 한 대꼴이어서 시간에 쫓기지 않고 여유롭게 둘러보려면 필수적이다.

핑시로의 기차 여행이 시작되는 곳은 스펀이다. 이곳은 마을을 둘로 쪼개듯 관통하는 기찻길로 잘 알려진 곳이다. 마을 사이에 철로가 깔린 게 아니라, 철로가 놓인 후 그 주변에 집들이 들어섰다고 해야 맞겠지만, 어떻든 간신히 협곡에 자리한 마을인 까닭에 기찻길과 더불어 독특한 경관을 만들어냈다.

기찻길이 마을을 관통하는 스펀의 저녁은 여느 도시의 야시장처럼 활기에 넘친다. 영화의 배경이 된 곳이지만, 풍경 자체가 영화다.
▲ 스펀 라오제의 저녁 풍경 기찻길이 마을을 관통하는 스펀의 저녁은 여느 도시의 야시장처럼 활기에 넘친다. 영화의 배경이 된 곳이지만, 풍경 자체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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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찻길 주변에는 그 흔한 울타리와 안전표지판조차 하나 없다. 철로에는 기차만 다니는 게 아니라 사람도 자유롭게 오간다. 바로 곁으로 기차가 지나가도 사람들은 뭐 대수냐는 식으로 조금의 미동도 없다. 철로 위를 걷다가 경적 소리에 귀찮다는 듯 잠시 비켜서서 기차에 길을 내어주지만, 위험하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는 듯하다.

스펀에서 15분 정도 골짜기로 더 들어가면 '천등의 고향' 핑시에 닿는다. 본디 천등은 우리네 봉홧불처럼 다른 마을에 위험을 알리는 통신 수단이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이 지역을 대표하는 관광상품이 됐지만, 교통이 불편하고 산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외지고 작은 마을 사람들의 지혜의 소산인 셈이다.

천등을 날리려는 관광객들이 줄을 서야 할 정도로 많다. 대개는 타이완 사람들이지만, 일본과 우리나라에서 온 관광객들도 많아, 한글도 낯설지 않다. 사진은 우리 가족이 소원을 적어 날리는 모습이다.
▲ 핑시에서의 천등 날리기 천등을 날리려는 관광객들이 줄을 서야 할 정도로 많다. 대개는 타이완 사람들이지만, 일본과 우리나라에서 온 관광객들도 많아, 한글도 낯설지 않다. 사진은 우리 가족이 소원을 적어 날리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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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각자의 소원을 적어 하늘로 띄우는 천등 행사로 목적이 바뀐 채 타이완의 대표 축제로 자리매김 됐다. 대규모 행사가 치러지는 정월 대보름이면 전국에서 찾아온 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이루는데, 그들이 일제히 띄우는 천등으로 인해 핑시의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라고 한다.

유명세를 탄 이후 정월 대보름이 아닌 언제라도 천등에 소원을 적어 날릴 수 있는데, 관광객으로 붐비는 요즘 들어서는 핑시 주변 마을인 스펀이나 징퉁과 같은 곳에서도 천등을 판매하고 있다. 쓸모가 없어져 버려진 낡은 철길과 오지라서 생긴 풍습이 만나, 관광객들에게 느릿하고 애틋한 추억을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목소리를 잃고 좌절한 아이돌 가수 메이가 시간이 멈춘 듯한 이곳으로 숨어든다. 시골 청년 샤오모는 우연히 만난 그녀의 목소리를 되찾아주기 위해 헌신하는데, 이곳 사람들은 하나같이 영화 속 그의 순박함을 빼닮은 것 같다. 핑시의 느린 풍경과 울긋불긋한 천등은 '화려한' 메이와 '순박한' 샤오모의 애틋한 사랑을 더없이 잘 어울리게 해준다고나 할까.

최근까지 실제 사용되었던 건물로, 지금은 박물관처럼 사용되고 있다. 너머로 진리대학 내 예배당의 첨탑이 보인다. 두루 거닐다 보면 유럽의 어느 도시를 온 듯한 기분이 든다.
▲ 홍모성에서 바라본 구 영국대사관저 최근까지 실제 사용되었던 건물로, 지금은 박물관처럼 사용되고 있다. 너머로 진리대학 내 예배당의 첨탑이 보인다. 두루 거닐다 보면 유럽의 어느 도시를 온 듯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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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타이완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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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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