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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9년 대통령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친일규명보고서'에 김백일(1917-1951)의 친일반민족행위 내용을 이렇게 기록했다.

"김백일의 본명은 김찬규로 그는 (일제강점기) 간도특설대 창설에 참여했고 항일무장세력 탄압에 종사하는 등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여 만주국 정부로부터 훈5위 경운장을 받았다....그는 팔로군 토벌과 민간인 탄압에도 종사하는 등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였다.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여 포상 또는 훈공을 받은 자로서 일본제국주의에 현저히 협력한 행위자로 결정되었다."[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IV-4], 321-322쪽.

그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에도 불구하고 지난 2011년 5월,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김백일의 동상이 세워졌다. 국가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김백일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공식적으로 규정했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그의 동상이 당당히 세워진 것이다. 그러자 지난해인 2011년 8월 29일 거제시민단체연대협의회는 김백일 동상철거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친일반민족행위자 김백일 동상 철거를 위한 거제시민토론회'를 개최하였다.

이 토론회에는 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위) 조사팀장 안정애 박사와,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연구실장이 참석하여 김백일 관련 논문을 발표하였다.

임산부 배를 갈라서 애기가 흘러나오고...

이들은 발표문을 통해 김백일과 관련하여 아래 10가지 사항을 특별히 지적하였다.

1) 해방 후 대한민국군대의 창군과 성장과정에서 일제강점기 친일파가 어떻게 '반공애국투사'로 변신했는지의 역사.
2) 대한민국의 자주통일국가 수립의 염원이 미국과 소련의 분할구도에 의해 한반도에 2개의 단정 수립으로 구체화되며 친일파 장교 출신들이 친미적인 남한 정권의 반공장교로 어떠한 기능을 했는지.
3) 미군정과 이승만의 비호를 받은 친일파 장교들이 남한 군대에서 승승장구한 역사 그리고 친일파를 처벌하기 위해 지난 1948년 제헌국회에 설립된 반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활동에 위협을 느낀 친일경찰 세력이 군대로 피신하여 보신을 취했고 그 결과 대한민국군대가 더욱 친일색채를 띠게 된 역사.
4) 김백일의 경우를 통해 어떻게 친일파 장교들이 대한민국군대의 반공투사로 변신을 했는지 구체적 예를 들며 설명.
5) 김백일은 항일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일제가 창설한 정규무장단체 간도특설대 출신으로 악명을 떨침.
6) 간도특설대는 게릴라전을 전개하며, 일제가 표방한 소위 '삼광작전, 청야작전'등을 충실히 수행하여, 무고한 민간인을 고문, 살해하고, 임산부의 배를 갈라서 애기가 흘러나오고, 심지어 사람을 죽여서 생간을 뽑아 갖고 가 동료 무덤 앞에서 제사를 지내는 등의 만행을 저지름. 이러한 만행은 한국전쟁 전후 빨치산토벌을 명분으로 자행된 거창사건을 비롯한 수많은 민간인집단학살사건으로 이어짐.
7) 김백일은 1945년 일제가 투항한 후 특설대 대원등을 거느리고 심양에 돌아와 부대를 해산시킨 후 북한에서 대한민국으로 도피.
8) 국가기관 진실위에서 간행한 보고서(2010. 6. 29)에서 김백일의 민간인집단학살의 지휘책임을 분명히 하고 있음. 여수에 주둔했던 김백일 부대가 지리산지구로 옮아가면서, 1949년 12월 25일 김백일이 지리산지구전투사령관 명의로 계엄령을 실시하고, 지리산지구 일대에 1950년 3월 15일까지 '토벌작전'을 전개. 그 결과 좌익게릴라와 무관한 여성 16명, 50-70대 노인 25명, 10대 및 10세 이하 14명 등이 토벌작전에 의해 희생. 이 시기 가해 주체 및 가해의 지휘·명령계통의 책임자로서 '호남방면전투사령관 남지구사령관 김백일(1948. 10. 30 - 11. 30), 지리산지구 전투사령부 사령관 김백일(1949. 9. 28 - 1950. 3. 15)을 명시(진실위 보고서 16-18쪽, 87-88쪽).
9) 김백일의 군수품 부정사건과 관련, 1946년 10월에 치러진 김백일의 호화결혼식에 당시 비용으로 150만원을 사용. 김백일은 군인들 보급품을 부정처분하여 결혼식 비용을 충당했고, 예산 횡령 항의로 규탄 당하였으며, 이로 인해 연대장직에서 해임되고 부연대장으로 강등. 
10) 흥남철수작전에서 김백일은 주요 공로자라 할 수 없음. 한국전쟁 발발직후인 1950년 7월 14일에 이승만은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미극동군사령관 맥아더에게 이양. 이후 1951년 흥남철수작전이 미10군단장의 작전지휘 하에 이루어짐, 김백일의 1군단도 철수대상에 불과할 뿐 어디에도 김백일이 흥남철수작전을 주도하였으며, 10만 명의 피난민을 직접 인솔해 나왔다는 기록이 없음.

그러나 이러한 내용의 토론회가 끝나고 지난 3월 30일 김백일의 아들 김아무개 등은 안정애 박사와 박한용 연구실장을 김백일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검찰에 고소하였다. 그리고 지난 10월 24일 서울북부지방법원 형사7단독(판사 강영훈) 은 안정애 박사와 박한용 실장에게 각 벌금 300만원 형을 선고하였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안정애 박사와 박한용 실장의 위와 같은 발표문의 주장에 대하여 "김백일은 한국전쟁 당시 육군 제1군단장으로 전쟁에 참전하여 1951. 3. 28. 경 사망한 사람으로, 사실은 민간인을 학살한 적이 없었고, 군수품을 부정처분하여 호화결혼식을 치르지도 않았으며, 흥남철수 작전의 책임자였다"고 하며 피고 안정애와 박한용이 "허위사실을 적시하여 사자인 김백일의 명예를 훼손하였다"고 기술하였다.

국가기관인 진실위 보고서에 대한 인식 부재

그러나 재판부가 판결문에 기술한 허위사실에 대해 안정애 박사는 이렇게 자신의 입장을 전했다.

"진실위 보고서에서 이미 간도특설대 출신 등 친일파 장교들의 일제강점기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잔악한 토벌작전을 그대로 답습하여 토벌군을 지휘함으로써 민간인 피해가 상당했음을 밝혔다. 또 나는 김백일의 지휘명령 책임을 물은 것이지 김백일이 총칼로 직접 민간인을 살해했다는 취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적인 평가를 억지로 갖다 붙인 것이다. 국가기관인 진실위 보고서에 대해 제대로 된 인식이 없는 것이 안타깝다." 

또한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김백일의 '군수품 부정처분' 과 관련하여서 이렇게 기술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국방경비대 제3연대장이던 김백일이 1946. 10. 결혼식을 치렀고, 그 무렵 하사관들이 군수품을 부정처분하여 호화결혼식을 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소요를 일으킨, 이른바 제3연대장 배척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로 인하여 김백일은 연대장직에서 해임된 사실이 인정된다. 그러나 김백일이 군수품을 빼돌려 부정처분하였다는 근거 자료가 없고, 판시 내용은 결혼식 이후 보직 해임된 일련의 과정과 당시 열악한 군수품 보급 수준 및 당시 군수품의 부정부패가 만연하였을 것이라는 피고인들의 추측에 의한 것일 뿐이므로, 이 또한 허위사실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런 재판부 주장에 대하여 피고 안정애 박사는 "근거자료가 없기 때문에 김백일이 배척사건과 전혀 무관하다는 주장 역시 추측에 불과하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김백일에 대해 제대로 된 조사와 처벌이 없었다. 따라서 김백일에 대한 조사도 이루어진 바 없는 상태에서 김백일 자신이 호화혼식비용충당 방법과 지위 강등에 대해 항의 한 번 없었던 점은 자신의 부정행위를 인정한 것임을 알 수 있다"고 항변했다.  

이어서 안정애 박사는 자신이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논문이 학술적인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겠지만 사법심사의 대상은 아니"라고 강조하였으나 재판부는 이런 안정애 박사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찬규는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일제가 창설한 정규무장단체였던 간도특설대 출신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해방 후 자신의 전력 노출을 두려워하여 해방 후 남한으로 피신, 김백일로 이름을 바꾸어 활동하였다.

1948년 여순사건이 발발하자 이승만은 "어린아이까지 모조리 잡아들여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에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은 당시 토벌에 앞장서는데 김백일은 이 때 자신의 특설대 경험을 최대한 살리게 된다. 이들이 펼쳤던 작전은 특설대 시절에 썼던 초토화 작전, 싹쓸이 작전, 토끼몰이 등이었다. 이들의 눈에는 생존을 위해 불가피하게 협조할 수 밖에 없었던 일반주민도 단순 토벌대상으로 비쳐졌다.

당시 김백일은 경찰의 소극적 진압에 불만을 표출하였으며, 적극적인 진압작전을 요구하였다.

"지리산 인근지역의 경찰관들의 적극성이 대단히 미약하다. 지서 등을 포기하고 도피하는 경관이 있으면 군으로서는 단호 총구를 겨눌 것이며, 이러한 자들로서는 도저히 국가의 치안을 담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동아일보 1948. 11. 6/ 경향신문 1948. 11. 6).

대검으로 민간인의 가슴을 찔렀다

여순사건 시기 토벌작전에서는 일반 사병의 담력을 키운다는 명목으로 민간인을 척살하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진실위 보고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 곳에 민간인들이 수십명 잡혀 와 있었는데 군인이 구덩이 앞으로 한 사람을 나오라고 하더니 경찰보고 찌르라고 했습니다. 못 찌르니까 지휘관으로 보이는 군인이 저리 비키라고 하더니 군인 한 명 보고 찌르라고 했습니다. 군인이 그 앞에서 총에 대검을 착검해서 가슴을 찔렀습니다. 가슴을 찌르고 나면 칼이 잘 빠지지 않으니까 가슴을 팍 걷어찼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구덩이 속으로 넘어졌습니다. 한 사람을 찌르고 나면 다음 사람 보고 구덩이 앞으로 나오라고 하고 다른 군인이 나와서 대검으로 찔렀습니다.... 죽지 않고 산 사람이 흙을 덮는 과정에 머리를 내밀고 나오려고 하자 군인이 가서 그 사람 머리를 밟아 구덩이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하고 다시 흙을 덮었습니다."(진실위 보고서 2010년 상반기 5권, 759쪽) 

당시 민간인들은 빨치산들의 강압에 의해 식사를 제공하고 식량 등을 약탈당한 후 그들의 아지트까지 식량을 운반하는 강제노역을 해야 했다. 하지만 토벌대의 가혹행위가 두려워 하산하지 못하고 산에서 자주 생활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그러다 나중에 붙잡힌 민간인들은 좌익도 아니면서 좌익으로 처형당하는 등 억울한 죽음이 많았다. 당시 친인척의 좌익혐의를 대신 조사하고 처벌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지서 등지에서 민간인을 죽이고 나서 그들이 반란군이나 좌익분자였다고 사후에 보고하면 그만이었다(진실위 보고서 2010년 상반기, 5권, 650쪽).

결국 2010년 진실위에서는 이러한 토벌작전이 무리한 민간인집단학살을 초래했다고 결론지었다.

체포된 500명 중 반군은 단 10명

무리한 민간인잡단학살의 실례를 보자. 1948년 진압군이 여수를 점령하였을 때 체포된 사람 가운데 반군은 단 10명에 불과했고 나머지 5백 명은 일반시민이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당시 작전사령관이었던 김백일 중령은 체포된 혐의자를 골라내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고충을 토로하였다. 백선엽도 "나는 지금도 그렇게 많은 '빨갱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순가담자의 대부분은 핵심 좌익계 인물들의 선전과 현실적인 신변의 위협 속에서 나름대로 살 길을 찾아 나섰던 것으로 보고 있다"(백선엽, <실록지리산> 192쪽)고 하였다.

2011년 6월 15일 거제시민단체연대협의회는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 김백일 동상 앞에서 '친일파 김백일의 동상을 즉각 철거하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친일파 논란을 빚고 있는 김백일 동상을 향해 계란을 던졌다. 당시 거제시도 김백일기념사업회에 동상 철거를 공식 요청하였다.

그러나 지금도 국가기구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공식적으로 인정한 김백일의 동상은 굳건하게 서있다. 그리고 그의 친일행위를 논문을 통해 비판한 학자와 연구자는 벌금을 내야할 처지에 놓여 있다. 우리는 과연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되었는가?

안정애 박사
 안정애 박사
ⓒ 안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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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애 박사는

영문학/정치외교학 전공. 인하대, 육사, 한양대 등에서 '정치학 개론,' '국제정치경제학,' '여성과 정치' 등 강의.
국방부 국방군사연구소 연구원.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2과장, '실미도 사건,' '삼청교육대 사건,' '신군부의 언    론통폐합사건,' '재일동포 및 민간인 간첩조작 사건' 등 조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2팀, '한국전쟁 전 거제 민간인집단희생사건,' '한국전쟁 전후 경남 산청, 거창 등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등 조사.
산청함양사건희생자유족회 자문위원


태그:#김백일, #안정애, #김찬규, #감성수, #진실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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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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