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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중략)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 이용, 잊혀진 계절

가을이 성큼 무르익어 갈 즈음이면 길거리 곳곳마다 앞 다투어 불리는 노래 하나가 있다. 젊은 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할지도 모른, 가수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다. 사실 필자도 그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자라난 세대는 아니어서, 한 시대를 풍미한 7080 가수 정도로만 짧은 신상명세를 더듬을 따름이다.

그러나 필자와 주변의 몇몇 지인들에게 있어 시월은 이미 신성한 축제의 장이 돼버린 지 오래다. 2012년 11월 6일, 다시금 시월이 돌아왔고 우리들은 이 아름다운 계절의 끝자락을 온전히 즐기기 위해 어김없이 은행의 물결을 쫓아가는 낯선 여행길에 올랐다. 철지난 노래가사처럼 이룰 수 없는 옛 사랑의 애잔한 슬픔을 달래기 위해서가 아니라, 찬란한 계절의 환희를 가슴 속에 추억하기 위해서 말이다.

운곡서원 은행나무
▲ [그림1] 운곡서원 은행나무
ⓒ 남병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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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드리 고목의 은행바다, 운곡서원과 경주유연정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왕신리에는 가을의 운치를 물씬 풍기는 신목(神木) 한 그루가 있다. 아름드리나무 밑 둥에 풍성한 가지를 하늘로 뻗어 올린 운곡서원(雲谷書院) 은행나무가 바로 그것이다.

은행나무는 제법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데, 할아버지가 심으면 손자가 열매를 먹게 된다고 하여 공손수(公孫樹), 잎이 오리발처럼 생겼다 하여 압각수(鴨脚樹)라고도 한다. 또한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서 강학한 것에서 유래한 행단(杏壇)은 선비들이 학문을 정진하는 곳을 뜻하고, 이런 연유로 서원이나 향교에서는 예로부터 은행나무를 많이 심게 되었다.

운곡서원 은행나무는 멀리서 보기에도 수령이 수백 년 이상은 족히 됨직한데, 어른 둘이 두 팔을 벌리고도 감싸 안기가 어려운 엄청난 둘레를 자랑한다. 천 갈래 만 갈래로 가지를 뻗쳐 풍성한 숲을 드리운 아름드리 고목은 마을을 지키는 수문장의 신력(神力)이 온 몸으로 느껴진다. 인근 부락에서는 아직도 이 나무에 간간이 치성을 드리는지, 정안수 그릇 하나가 나무 아래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은행나무의 더 넓은 그늘 아래 자리한 유연정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45호로 안동 권씨 종중에서 조선 순조 11년(1811)에 조상들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도연명의 자연사상을 바탕으로 서원 동쪽 계곡인 용추대 위에 세웠는데,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 여덟 팔 자 모양의 지붕을 얹었다. 정자에 오르니 계곡을 돌아나가는 청량한 물소리에 일상의 번잡함이 말끔히 씻겨나가는 것 같다.

운곡서원(雲谷書院; 위)과 경주유연정(慶州悠然亭; 아래)
▲ [그림2] 운곡서원(雲谷書院; 위)과 경주유연정(慶州悠然亭; 아래)
ⓒ 남병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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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정 곁에는 전통발효음식점인 '향정원'이 들어서서 손님을 맞이한다. 주인장은 집을 가꾸는 솜씨가 제법인 모양인지, 올망졸망한 장독대들과 아담한 야생풀꽃들이 자그마한 마당에 머리를 맞대고 앙증맞게 둘러앉았다. 아침나절 느닷없이 찾아든 운 좋은 나그네는 투명한 햇살 아래 반짝이는 노란 은행바다의 물결에 점점이 잠겨들며 잠시 넋을 잃는다.

운곡서원은 1784년(정조 8)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권행(權幸)의 공적을 추모하기 위한 추원사(追遠祠)로 창건되었는데, 뒤에 권산해(權山海)와 권덕린(權德麟)을 추가로 배향하면서 운곡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뒤 1868년(고종 5)에 흥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76년에 복원하여 오늘의 모습에 이른다.

서원은 문중 소유인 탓에 문이 잠겨 출입이 어려웠지만, 건너편 나지막한 야산에 발품을 팔면 서원의 전체 배치를 한눈에 파악할 수가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경덕사(景德祠), 신문(神門), 5칸의 중정당(中正堂), 각 1칸의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각 3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외삼문(外三門), 6칸의 유연정(悠然亭), 주소(厨所) 등이 있다.

배장수 할아버지와의 길거리 흥정 한판

여행길에서 만난 과일장수 할아버지
▲ [그림3] 여행길에서 만난 과일장수 할아버지
ⓒ 남병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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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넉한 아침 나절의 운곡서원을 둘러본 뒤, 본격적인 여행길에 오를 심산으로 국도를 따라 길을 잡는다. 결실의 계절이란 이름에 걸맞듯 마주치는 도로변에는 방금 수확한 싱싱한 계절과일이 난전을 펴고 지나는 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우리집 계절별미인 배고추장을 담글 햇과일을 찾아 두 눈을 한참이나 두리번거리는데, 때마침 길가에 노전을 편 과일상을 발견하고는 긴급 길거리 흥정에 두 팔을 걷어붙인다. 배장수 할아버지와의 막바지 흥정 끝에 햇배 3박스를 2박스 가격에 저렴하게 구입하였다.

할아버지는 서투른 왕 초보 구경꾼의 어설픈 흥정이 보기에 안쓰러웠는지 여행 중에 먹을 여분의 배까지 넉넉히 챙겨주는 아량을 베푸신다. 탄알을 일발 장전하고 전장에 나선 군인 마냥 든든한 비상식량을 한가득 보충하고 나니 걸음은 날아갈 듯 가볍기만 하다.

신라 왕릉의 수문장 경주 소나무와 흥덕왕릉

흥덕왕릉 초입의 소나무 숲
▲ [그림4] 흥덕왕릉 초입의 소나무 숲
ⓒ 남병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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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곡서원을 빠져나와 기계방향으로 길을 잡으니 멀리 소나무 숲에 포근하게 둘러싸인 커다란 무덤 하나가 시야에 들어온다. 경주의 신라왕릉 들은 한결같이 신비로운 소나무 숲에 둘러 쌓여있는 것이 특징인데, 서라벌에서 멀리 떨어진 이 곳에도 왕릉의 수호자격인 소나무들이 예외 없이 손님을 반긴다.

왕릉의 초입은 거북이 등껍질처럼 쩍쩍 갈라진 소나무 군락이 빽빽하고 울창하게 녹음을 드리웠다. 숲 속에 드문드문 깔린 솔방울들이 완연한 늦가을의 정취를 물씬 풍기고, 코끝을 아리는 진한 소나무 향기는 가슴 밑바닥까지 상쾌하게 내려와 무거운 몸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우리나라의 소나무는 종이 다양할 뿐 아니라 그 지닌 아름다움도 제각각인데, 울진 소광리의 금강소나무처럼 하늘을 찌를 듯 웅장한 기세도 일품이지만, 신라 왕릉의 소나무와 같이 구불구불 꽈리를 틀고 용틀임하는 자태는 누구나 범접할 수 없는 신묘한 매력을 지녔다.

흥덕왕의 본명은 김수종(金秀宗)이며, 제41대 헌덕왕의 아우이다. 대아찬(大阿飡) 김우징을 시중에 임명하여 정사를 맡기고, 장보고로 하여금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서해를 방어하였다.

재임 중에는 대렴(大廉)이 당으로부터 차(茶) 종자를 들여와 전국적으로 차의 재배가 성행하였고, 죽은 뒤에는 유언에 따라 경주시 안강읍 북쪽에 있는 장화부인, 즉 정목왕후(定穆王后)의 능에 합장되었다.

사적 제30호/ 경주 흥덕왕릉(慶州 興德王陵)
▲ [그림5] 사적 제30호/ 경주 흥덕왕릉(慶州 興德王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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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은 원형 봉토분으로 지름 20.8m, 높이 6m의 규모이다. 둘레돌을 돌려 무덤을 보호하고 있는데, 둘레돌은 기단 역할을 하는 돌을 1단으로 깔고 그 위에 넓적한 면석을 세웠다. 면석 사이에는 기둥 돌을 끼워 화면을 분할했는데, 방향에 따라 12지신 상을 돋을새김 하였다.

능의 4모서리에는 돌사자 한 마리씩을, 앞쪽에는 문·무인석을 각각 1쌍씩 배치하여 능을 수호하게끔 하였다. 무덤의 왼쪽 숲 속에는 과거 비석을 세운 흔적이 남아있는데, 지금은 비신을 받쳤던 귀부만이 홀로 남아 옛 자리를 지킨다. 거북이 모양의 귀부는 비록 파손된 상태지만, 크기가 태종 무열왕릉 귀부와도 견줄만해 생전 흥덕왕의 치세를 짐작할 만하다.

신라 왕릉의 경우, 지금까지 주인이 명확하게 밝혀진 사례는 거의 없다. 그러나 흥덕왕릉의 경우는 이와 달리 <삼국유사>에 전하는 무덤의 위치가 대체로 일치하며, 주변에서 '흥덕'이라고 새겨진 비석명문이 발견되어 무덤의 신빙성을 더욱 뒷받침해준다.

답사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후각을 자극하던 정체불명의 냄새를 잠시 잊고 있었다. 왕릉주변에는 대규모 소 축사가 자리하는데, 눅눅한 소 똥냄새가 담장을 넘어 이 곳까지 전해진 모양이다.

좀 더 집중력 있는 답사를 통해 유적과의 심도 깊은 대화가 필요한 이들은 청량한 겨울날을 택해 다시금 찾아와야할 성싶다. 간만에 실컷 들이마신 시골 고향의 지독한 향기에 정신을 잃었다가 서둘러 짐을 챙겨들고 황급히 마을을 빠져나온다.

600년 마을의 지킴이, 육통리 회화나무

천연기념물 제318호/ 월성 육통리 회화나무
▲ [그림6] 천연기념물 제318호/ 월성 육통리 회화나무
ⓒ 남병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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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왕릉 인근에는 오랜 옛 무덤의 역사만큼이나 사연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나무 한그루가 있다. 회화나무는 모양이 둥글고 온화하여 중국에서는 높은 관리의 무덤이나 선비의 집에 즐겨 심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들여와 향교나 사찰 등에 심었는데, 활엽수 중 공해에 가장 강한 나무로 알려져 있다.

월성 육통리의 회화나무는 높이 19.1m, 둘레 6.2m로 수령은 약 400년으로 알려져 있으나, 구전에 의하면 약 600년 전인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 때 이 마을에 살던 젊은이가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전쟁터로 나가면서 심은 것이라고 한다. 그 후 젊은이는 전장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고 부모는 아들의 뜻대로 이 나무를 자식같이 여기며 가꾸어 오늘의 모습에 이르렀다고 한다.

회화나무는 낙엽이 떨어져 여름날의 무성한 숲 그늘은 찾아볼 수가 없다. 줄기 곳곳의 큰 상처로 인해 나무의 모양이 좋지는 못하지만, 지금껏 마을에서 동신의 역할을 톡톡히 감당해내고 있다.

마을사람들은 매년 정월 대보름에 이 나무 앞에 모여 제사를 지내며 마을의 평화와 풍년을 지금도 기원한다고 한다. 우리 민중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린 오랜 믿음의 연원을 육통리 회화나무에서 어렴풋이나마 더듬어본다.

- 2부에서 계속됩니다.


태그:#운곡서원, #흥덕왕릉, #경주유연정, #육통리회화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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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경북지역 대학생문학연합(효가대 난문학회) 동인/ 문화유산답사회 우리얼 문화지킴이간사/ 국립문화재연구소 복원기술연구실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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