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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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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 '노인'의 거취를 놓고 연일 언론에서 말들이 많다. 비단 언론만이 아니다. 민주당, 새누리당 할 것 없이 여야 정치권은 물론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 보수신문들까지 나서서 그에게 물러나라고 사설에서까지 질타를 퍼붓고 있다. 주요 대선후보 3인을 제외하면 그 노인은 요즘 세간의 주목을 끌고 있다.

1928년생이니 그 노인의 나이는 올해 만 84세. 일선에서 물러나 손주들 재롱을 볼 나이도 한참 지난 연세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현역이며, 기세 또한 당해낼 자가 없어 보인다. 그 노인의 이름은 최필립(崔弼立)(그의 형제는 항렬이 '립(立)'이다). 현 직함은 '재단법인 정수장학회' 이사장이며, 2005년부터 7년째 이사장 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선후보만큼이나 이슈가 된 80대 노인 최필립

17일 민주통합당은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정수장학회 국정조사 및 그의 사퇴를 촉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정부기관의 책임자나 실세 권력자도 아닌 사람을 두고 제1야당이 사퇴 촉구 결의문을 채택하기는 드문 일이다. 발단은 그가 지난 10월 8일 MBC 사측 간부(이진숙 홍보기획본부장 등)와 비밀회동을 갖고 정수장학회 소유의 MBC 지분(30%) 등을 매각키로 논의한 것에서 비롯했다.

앞서 <한겨레>는 지난 13일(토) 1면 머릿기사에서 "정수장학회가 MBC 지분 30%와 <부산일보> 지분 100% 등 갖고 있는 언론사 주식 매각을 비밀리에 추진해온 것으로 밝혀졌다"고 폭로했다. 최 이사장은 이날 비밀회동에서 정수장학회 소유의 언론사 주식에 대한 처분 및 활용 계획을 밝힌 것으로 보도됐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최 이사장은 이날 "경영권도 행사 못하는 MBC 주식은 갖고 있어봐야 소용이 없다"면서 "정수장학회가 (MBC 지분 30% 매각 대금을 활용해) 부산·경남 지역 대학생을 대상으로 직접 '반값등록금'을 지원한다는 내용이 담겨야 한다"고 말했다. 이른바 '장물'로 불리는 정수장학회 재산을 처분해 그 돈으로 부산·경남 지역 대학생들에게 선심을 쓰겠다는 얘기다.

대선이 코앞인 시점에서 이런 안을 내놨으니 이걸 순수하게 볼 사람은 별로 없다. 결국 야당과 언론단체가 들고 일어섰고 '정수장학회 건'은 결국 대선 정국의 핫이슈로 떠올랐다. 답답하기는 박근혜 후보 측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급기야 박 후보는 17일 "조만간 정수장학회에 대한 입장을 밝히겠다"고 사태수습에 나섰다. 그간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강변해오던 박 후보로서는 '일보 후퇴'인 셈이다. 

정수장학회 문제는 대선 국면 초반부터 박 후보에겐 '앓던 이' 가운데 하나로 지목돼 왔다. 5·16쿠데타 직후 김지태씨 소유의 '부일장학회'를 강제로 탈취해 만든 '태생'도 그렇지만 박 후보는 이곳에서 10여년간 이사장을 지냈다. 특히 이사장 재임시절 정관을 고쳐 비상근을 '상근'으로 만든 후 고액의 급여를 받았고, 또 후원금도 받았다. 결국 정수장학회는 박 후보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인 것이다. 

최근 '박근혜 대세론'이 무너지면서 대선 가도에 적신호가 켜지자 보수신문들은 박 후보가 정수장학회와의 '관계'를 서둘러 정리하라고 '조언'하고 나섰다. <중앙일보>는 11일자 사설에서 "정수장학회 문제가 이번 대선을 계기로 국민 눈높이에서 해결돼야 한다"며 사실상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 사퇴와 정수장학회 사회 환원을 요구하고 나섰다. <중앙>의 이런 주장은 평소 야당과 언론단체들이 해온 주장과 똑같은 것이다.

그래도 별 반응이 없자 급기야 <조선일보>도 이 대열에 가세하고 나섰다. <조선>은 6일 뒤인 17일자 사설에서 "최 이사장은 박 후보가 대선에 나서기로 한 순간 이미 물러났어야 할 사람"이라며 "그가 버티고 있는 한 '정수장학회는 이미 사회에 환원됐다'는 박 후보와 장학회 측 주장은 설 자리를 얻기 힘들다"고 지적하면서 박 후보가 최 이사장의 퇴진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올해 84세의 최필립 이사장은 '쇠귀에 경 읽기' 식으로 꿈쩍도 않고 있다. 되레 그는 "임기를 채우겠다"며 작금의 '사퇴 요구'가 억울하고 분통이 터진다는 식이다. 보수신문은 물론 박 후보조차도 은근히 사퇴 압박을 넣고 있으니 '장학회 관리를 맡길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물러나라는 것이냐'며 그로선 서운해 할만도 하다. 대체 그는 어떤 연유로 '박근혜 사람'이 됐을까? 그와 그의 집안의 가족사를 한번 훑어보자.

정수장학회가 부산일보 지분(100%)과 MBC 지분(30%) 매각을 추진하고 MBC 지분매각과 관련해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과 이진숙 MBC 기획홍보본부장이 최근 만나 협의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14일 오전 서울 중구 정동의 굳게 잠긴 정수장학회 사무실 문의 모습.
▲ 정수장학회, 대선판 쟁점으로 '부상' 정수장학회가 부산일보 지분(100%)과 MBC 지분(30%) 매각을 추진하고 MBC 지분매각과 관련해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과 이진숙 MBC 기획홍보본부장이 최근 만나 협의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14일 오전 서울 중구 정동의 굳게 잠긴 정수장학회 사무실 문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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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오랜 '입', 알고보니 독립운동가 집안

1928년 평양에서 출생한 그는 평양고보와 연세대 졸업 후 미국으로 유학을 가 1957년 미국 캘리포니아대를 졸업했다. 그의 첫 직장은 4·19혁명으로 들어선 민주당 정권 하의 외무부였다. 7개월 만에 외무부 초대 공무관(대변인)으로 승진한 그는 이후 탄탄대로를 달렸다. 70년대 중후반 청와대 생활 5년 가량을 빼고는 1993년 리비아 대사를 끝으로 공직을 마감할 때까지 30여 년을 중동, 뉴질랜드, 스웨덴 등에서 직업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그런 그가 박근혜 후보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74년 의전비서관으로 청와대로 들어간 것이 계기가 됐다. 의전비서관 1년을 마치고 섭외비서관으로 옮긴 1978년 어느 날, 박정희 대통령이 늦은 밤 집무실로 그를 불러 '큰애 주변이 좀 시끄러운데, 자네면 잘 할 거야'라며 큰 영애(박근혜) 담당 공보비서관을 맡겼다. 이후 그는 이듬해 '10·26사태'가 벌어질 때까지 1년간 당시 육영수 여사를 대신해 '영부인' 역할을 하던 '큰 영애' 곁에서 후견인 겸 '입' 노릇을 했다.

10·26사태 이듬해인 1980년 그는 바레인 대사로 발령을 받은 몸으로 당시 신당동 사저에 머물고 있던 '큰 영애'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1급 비서관으로 임금님(박정희 대통령) 머슴도 하고 큰 영애님 비서도 했으니 할 거 다 했습니다. 이제 대사는 그만두고 제가 계속해서 모실게요'라며 박 후보 곁에 남겠다고 자청했다. 그러나 당시 박 후보는 '대사 일 잘하셔서 아버지 옆에 좋은 사람도 있었다는 걸 보여주세요'라고 사양하면서 두 사람은 인연은 일단락됐다.

두 사람의 인연이 다시 시작된 것은 2001년, 당시 박 후보가 '한국미래연합'을 만들면서 그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 리비아 대사를 끝으로 정년퇴직(1993년)해 쉬고 있던 그는 다시 박 후보 곁으로 달려가 미래연합의 운영위원을 맡았다. 그리고 얼마 뒤 정수장학회 측으로부터 이사장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고 2005년부터 이사장이 되었다. 이사장 자리는 박 후보가 직접 요청한 것이 아니라 당시 장학회 이사들이 '지금 이사장님(박근혜)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일 테니 누구보다 적임자 아니겠습니까'라고 하길래 맡았다는 것이다. (2월 3일자 <한겨레> 인터뷰 기사 참조)

부친은 독립운동가 최능진... 그는 어떻게 죽었나

한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지난 2009년 9월 최 이사장의 부친 최능진(崔能鎭, 1899~1951)과 관련된 중요한 '결정'을 하나 내렸다. 진실화해위는 "최능진은 이승만에게 맞선 것을 계기로 헌법에 설치근거도 없고 법관의 자격도 없으며 재판 관할권도 없는 군법회의에서 사실관계가 오인된 판결로 총살됐다"며 국가의 사과와 법원의 재심 수용을 권고했다. 다시 말해 최능진은 이승만 정권 하에서 억울하게 죽었다는 얘긴데 그는 누구이며, 또 무슨 연유로 억울한 죽음을 당했을까?

최능진 선생
 최능진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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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능진은 기독교·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해방 후 친일 세력을 비호하던 이승만 대통령과 맞서다 결국 '정적 1호'로 희생됐다. 1899년 평남 강서군의 부유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평양 숭실중학 졸업 후 1917년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스프링필드대학과 듀크대학 체육학과에서 수학한 그는 졸업 후 워싱턴 YMCA에서 체육담당 간사를 맡아 활동하면서 도산 안창호가 이끌던 흥사단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30세가 되던 해인 1929년 귀국해 평양 숭실전문학교 체육과 교수로 부임한 그는 1937년 이른바 '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돼 도산 선생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평남 건국준비위원회 치안부장으로 활동하던 그는 그 해 9월 '현준혁 암살사건'으로 우익세력에 대한 검거선풍이 불자 소련군정의 탄압을 피해 월남했다.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 그는 곧바로 미군정 경무부의 수사국장으로 발탁됐다.

그러나 친일경찰 청산 문제를 놓고 그는 직속상관이던 조병옥 경무부장, 장택상 수도청장 등과 극심한 갈등을 빚었다. 직접적인 충돌 계기는 1946년 10월 1일부터 대구 일원에서 발생한 '10월 항쟁'. 당시 이 사건의 진압 책임자였던 조병옥은 '좌익세력의 사주를 받은 불순한 폭동사건'이라고 주장한 반면 최능진은 현장조사를 토대로 '친일경찰들의 민중 탄압에서 비롯한 측면이 크다'며 친일경찰 숙청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 일로 조병옥과 이승만의 미움을 사 결국 자리에서 물러난 그는 친일세력을 기반으로 독주하는 이승만을 견제하기 위해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 선거에서 이승만의 지역구인 동대문 갑구에 출마했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최능진은 독립운동 경력 등이 부각되면서 인기가 급등하자 이승만 일파는 위협을 느낀 나머지 후보등록 마감 직전 최능진의 후보등록 서류 가방을 탈취했다. 이로써 최능진의 후보 등록은 좌절됐고, 반대로 이승만은 단독후보로 무투표 당선됐다.

이승만 진영의 치졸한 보복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 해 8월 15일 이승만 정부가 출범하면서 최능진에게 먹구름이 몰아닥쳤다. 그 해 10월 1일 새벽, 수도경찰청 형사대가 그의 자택으로 들이닥쳐서는 난데없이 '내란음모죄'를 거론하며 그를 종로경찰서로 연행했다. 그가 독립운동가 출신의 서세충, 오동기 등을 사주해 군 내부에서 반란을 일으켜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1심 재판에서 3년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례적으로 2심에서 징역5년형을 선고 받았다.

그가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한국전쟁이 터졌다. 인민군의 정치범 석방으로 감옥 문을 나온 그는 전쟁 중단과 유엔을 통한 평화적 통일을 주장했다. 유엔군의 참전으로 서울이 수복되자 그의 이같은 '정전·평화운동'은 부역행위로 간주돼 김창룡의 방첩대에 체포됐다. 그는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전쟁 중인 1951년 2월11일 경북 달성군 가창면 파동에서 한 발의 총성과 함께 비운의 삶을 마감했다. 현대사가들은 그의 죽음을 '한 민족주의자의 안타까운  죽음'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를 비롯해 그의 형제들도 모두 일제하에서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의 큰형 능찬(1881~1932, 건국훈장 독립장)은 고향(평남 강서)에서 3·1만세의거 때 주모자로 활약하다가 일경에 체포돼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또 작은형 능현(1887~1933, 건국훈장 애족장)은 중국 상해에서 윤봉길 의사와 함께 폭탄제조 실험을 하다 폭발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앞에서 소개했듯이 그 자신은 '동우회 사건'에 연루돼 2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그는 여태 서훈을 받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 시절 '내란음모죄'로 실형을 받았다는 이유 때문이다.

아들은 <조선일보> 기자, 부친이 지하에서 알면...

지난 2011년 7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MBC 본사에서 열린 MBC창사 50주년 사진전 'MBC 50년, 대한민국 50년' 개막식에서 김중만 심사위원장(오른쪽부터), 탤런트 최불암, 김재철 MBC 사장, 김재우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전병헌 국회의원,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 김문환 MBC시청자위원장, 차인태 전 제주 MBC 사장이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지난 2011년 7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MBC 본사에서 열린 MBC창사 50주년 사진전 'MBC 50년, 대한민국 50년' 개막식에서 김중만 심사위원장(오른쪽부터), 탤런트 최불암, 김재철 MBC 사장, 김재우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전병헌 국회의원,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 김문환 MBC시청자위원장, 차인태 전 제주 MBC 사장이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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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한겨레>가 공개한 10월 8일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과 이진숙 MBC 홍보기획본부장과의 '비밀대화록'에는 최 이사장의 언론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하나 있다.

대화 중간쯤에서 최 이사장은 MBC 지분 매각과 관련해 "아, 우리야 좋지. 하여간 신문·언론하고는 멀리 갈수록 좋아. 이 빌딩(경향신문 빌딩)에서도 나가고 싶어.… 언론인 앞에서 죄송합니다. 똥하고 언론하고는 피해야 해"라며 언론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드러냈다. 그러자 이 본부장은 "하하. 이사장님 아드님도 <○○일보>기자라고 들었습니다"라며 대꾸하고 나섰다.

이 본부장의 말대로 최 이사장의 아들은 현직 기자다. '조선미디어' 직원 명단에 따르면, 현재 <조선일보> 산업부 소속 최우석 기자(차장대우)가 바로 그다. 언론진흥재단이 구축한 언론인명정보에 따르면, 최 기자는 1992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해 사회부, 국제부, 사장실, 정치부, 경제과학부, 경제부, 산업부 기자를 거쳐 두 차례에 걸쳐 워싱턴특파원을 역임했다. 그의 경력 가운데는 'IPI(국제언론인협회) 한국위원회 회원'이라는 독특한 이력이 하나 눈에 띄는데, 이 일로 그는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린 적이 있다.

김대중 정부 말기인 2001년 국세청이 언론사 세무조사를 실시한 것을 두고 IPI는 한국을 '언론탄압국'으로 규정해 비난을 퍼부은 바 있다. 당시 최 기자는 IPI 한국위원회 위원장이던 방상훈 조선일보사 사장 밑에서 '결의문' 작성 등을 맡아 수행했다. IPI 정회원 자격은 보통 언론사 사주나 주필, 편집국장, 보도본부장 등 고위간부들에게 주어졌는데 평기자 출신으로는 그가 유일하다. 서울고 졸업 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등에서 유학한 그는 영어 실력이 뛰어나 방 사장 눈에 띈 것으로 알려졌다. 
           
이제 글을 맺기로 하자. 현 대선 정국에서 뜨거운 감자로 등장한 정수장학회의 최필립 이사장은 요즘 '동네북' 신세나 마찬가지다. 여야 정치권, 보수-진보를 망라한 언론, 게다가 자신을 발탁한(?) 박근혜 후보까지 그에게 눈을 흘기고 있으니 말이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팔십 노인인 그의 처지가 딱해 보인다.

특히 항일투쟁 명문가 집안의 후예로서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독재자와 그의 딸에까지 '대를 이어' 충성을 다하고 있으니 더욱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그의 아들까지도 일제말기 친일로 얼룩진 <조선일보>에 몸 담고 있으니 지하의 최능진 선생이 알까 필자가 다 두렵기만 하다.


태그:#정수장학회, #최필립, #최능진, #최우석,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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