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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평리의 흔한 마늘밭.
 대평리의 흔한 마늘밭.
ⓒ 조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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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일 나가는 이웃들의 오토바이 소리에 눈을 뜬다. 창을 여니 '할망'들은 벌써 마늘밭에 붙어 계신다. 태풍에 엉망이 된 밭을 수습하시는 것 같다. 군산과 한라산은 무슨 일 있었냐는 듯이 늠름하게 서있다. 든든한 마음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일출을 보러 용눈이오름에 갈까, 잠시 망설이다 다시 누워버리고 만다.

제주도 서귀포 대평리에 살게 된 후의 아침 모습이다. 대평리 우리 집은 10평 정도의 원룸, 즉 '단칸방'이다. 주방과 침실의 구분이 없는 그냥 너른 방이지만, 네다섯 명이 누워 잘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한 사이즈다.

집에는 에어컨, 장롱, 선풍기, TV 등이 있는데, 이 중 내가 산 것은 없다. 말하자면 '풀옵션' 원룸이다. 나는 이 집에 일년 사는 값으로 170만 원을 냈다. 여기에는 수도요금과 전기요금도 포함되어 있다. 보증금 같은 건 없다. 다시 말하지만 월세가 아니라 연세 170만 원이다. 월로 따지만 매달 약 14만 원을 내는 셈이다.

물론 적은 돈은 아니다. 하지만 불과 3개월 전까지, 나는 서울에서 원룸 월세로 40만 원을 냈다. 급한 사정이 생겨 '단기임대'로 합정역 인근 풀옵션 원룸에 한 달을 산 적도 있었는데, 그때는 월세로 120만 원을 냈다. 물론 집값은 입지, 주거 환경, 교육 여건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해 책정되기에 단순비교 하기는 어렵다.

월세 120만원 방에서 '연세' 170만원 방으로...

대평리 우리집 모습
 대평리 우리집 모습
ⓒ 조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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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내가 살 곳을 구했을 때의 기준은 이랬다. 직장에서는 너무 멀지 않은지, 내가 가진 살림이 다 들어가는지, 역세권이라 교통이 편리한지, 술집이 많아 진상 피우는 사람들을 봐야 하는 건 아닌지,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가진 돈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 등등.

하지만 이런 저런 조건을 아무리 따져도 '이 집에서 살면 마음이 편하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고, 실제로 살아도 편안한 곳이 그 사람에게는 '좋은 집'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대평리 집은 나에게 '좋은 집'이다. 주머니가 가벼운 나에게 큰 부담을 주지 않는 건 물론이요, 한라산과 매일 아침 인사하고, 오늘은 좀 몸이 무겁네 싶으면 책 한 권 들고 박수기정에 올라 바람에 땀을 식히고 내려올 수 있다. 게다가 서울의 옥탑방에 살던 때처럼 새벽이면 집 앞 편의점 근처에서 취객들이 싸우는 소리에 잠을 깨지 않아도 된다.

'좋은 집'을 만나는 것도 깊은 인연이라고 생각하는데, 대평리 집을 구한 과정을 돌아보면 참 신기할 따름이다.

서울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무작장 내려온 제주. 약 2개월 동안은 대평리에 있는 게스트하우스 '곰씨비씨'에서 지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익숙하고 편리했다. 하지만 장기로 묵으면(이런 손님은 '장기수'로 불린다) 서울에서의 한달 월세와 맞먹는 돈이 들 수밖에 없다. 살 집을 구해야 했다.

그럼 어떤 집을 구해야 할까. 월급이 끊겼으니, 게다가 축적해 놓은 자본도 많지 않으니, 가장 중요한 건 내가 가진 '총알'에 걸맞는 집이었다. 내가 마음속으로 정한 목표가는 연세 100만~300만 원. 그것도 '대평리에 있는 연세집'이어야만 했다. 

여기서 일차적으로 접어야 할 욕심이 있었으니, 바로 서울에서 익숙했던 집근처 편의시설과의 '안녕'이다. 대평리에서는 제대로 장을 보려면 차 타고 적어도 30분은 나가야 한다. 짜장면 배달? 그런 거 기대하면 피곤하다. 이런 문제는 '곰씨비씨'에 머물며 조금은 익숙해졌다.

문제는 연세로 구할 수 있는 집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었다. 연세는 계약금액이 적다 보니 현지 부동산에서도 거의 다루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누군가가 살고 있다는 연세집이 연말에 계약이 끝날 예정이라는 정보가 귀에 들어왔다. 서귀포 시내의 미용실 주인이 집주인 이라길래 다음날 바로 찾아갔다.

세심한(?) 눈으로 나를 '스캔'하는 집주인 아줌마의 눈길에, '제주를 사랑하는 조신한 아가씨'인 척했다. 삼고초려 하는 마음으로 세 번을 걸음 했지만, 세입자가 계약을 연장하는 바람에 낙동강 오리알이 됐다. 나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나는 제주도민이 될 수 없는 걸까?'

아침 일찍 차 빼라는 전화없고, 한라산이 보이는 우리 집

'곰씨비씨' 게스트하우스의 카페 모습. 바다가 지척이다.
 '곰씨비씨' 게스트하우스의 카페 모습. 바다가 지척이다.
ⓒ 조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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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날 밤, '곰씨비씨'에 딸린 작은 카페에서는 어김없이 '한라산 야간등반'(한라산 소주를 마시는 것을 우리는 이렇게 부른다)이 한창이었다. 안주는 주인장 친구분이 부산에서 공수해온 어묵과 납작만두. 잔 채우기가 무섭게 빈 병들이 쌓여간다.

술과 안주가 끊기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엉덩이 붙일 틈이 없는 건 보통 그 자리 막내의 숙명이다. 더구나 난 그 집 살림구조 파악을 끝낸 '장기수' 막내다. 열심히 술과 안주를 날랐다. 잠시 뒤 취기오른 구수한 부산 사투리가 나를 향했다.

"이 놈 이거, 맘에 드는데!"

막내로서 '싸가지'와 '법도'를 안다는 칭찬이다. 다음날 아침, 내가 먼저 말했다.

"언니, 이 동네에 집을 구해야 하는데, 연세집이 없어서 걱정이에요."
"… 그래? 우리 단골고객님이 여기 대평리 부녀회장님이랑 이십 년지긴데, 전화 함 넣어서 물어나 볼까?"
"진짜요?"

점심 먹으러 한 번 들렀던 '용왕 난드르'(대평리 주민들이 운영하는 식당)의 '아줌마'는 부녀회장이셨으며, 연세를 놓을 민박집 주인이자 지금은 내가 사는 집의 주인이다. 그것도 수도요금과 전기요금도 연세에 포함시켜 준 '쏘쿨'한 집주인. 더 이상 '다운'시킬 여지가 없는 연세 170만 원. 계약서도 안 썼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인 어린 시절, 우리 집은 한남동의 달동네였다. 전라도 총각과 부산 처녀가 만나 빈손으로 상경해서 애 둘 낳고 사는 달동네 문간방 사글세 살이. 주인집 여자 아이가 사글세 집 아이인 나를 그렇게 괄시했다고 한다. 그걸 보는 엄마 마음이 어땠을까. (나는 기억이 없는 게 참 다행이다.)

달동네를 벗어나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 이사간 잠실의 주공아파트. 지금은 재건축이 되어 비싸고 높은 아파트들이 들어섰지만, 그 시절엔 그 대단지가 모두 저층이었다. 지금 남아있는 잠실 5단지만이 유일한 고층아파트였는데, 학교를 가면 저층인 1~4단지 사는 아이들과 5단지 아이들로 분류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내 방 창문을 열면 5단지 아파트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날 엄마가 말했다.

"5단지 사는 어느 집 엄마가 우리 집 있는 이 동네 가리키면서 애한테 그랬단다. '너 공부 안하면 저런 집에서 살게 된다'고."

그건 엄마의 자조였을까, 아니면 그 집 애보다 공부를 더 열심히 하라는 의미였을까?

엄마는 내가 성인이 된 뒤 돈 잘 벌어서 '좋은 집'에 살게 되기를 당연히 바라셨다. 하지만, 서울에 사는 것에 의미를 크게 두지 않게 된 지금, 나에게 좋은 집은 내 한몸 편히 누일 수 있는 집이다.

늦게 들어온 날 이중 주차를 할 수밖에 없어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는 이웃에게 차를 빼달라는 전화를 받지 않아도 되는 집. 창을 열면 한라산이 서 있고 주인집 아줌마가 라면 먹을 때 먹으라며 김치를 챙겨주시는 집.

지난달 육지에 들렀을 때 엄마에게 "더 이상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싶지 않아, 엄마 미안해요"라고 말했다. 우려와 달리 엄마는 내가 선택한 제주의 삶을 응원해 주셨다. 맘 편하게 살면 그게 제일 좋은 거라고.

조만간 엄마를 제주에 오시라고 할 생각이다. 내가 사는 집을 보여드리고, 함께 집 앞 군산에라도 올라야겠다. 그리고, 서울에 있을 때는 지쳐서 하지 못했던, 많은, 정말 많은 얘기를 할 작정이다.

한라산과 군산이 보이고 푸른 바다가 지척인, 연세 170만 원짜리 내 집에서 말이다.


태그:#제주도, #대평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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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사는 서울처녀, 제주도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전해드릴게요 http://blog.naver.com/hit1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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