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나주의 '도래전통한옥마을'을 둘러 본 우리들은 입구에 있는 연못가에 앉아 잠시 담소를 나누다가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삼영동에 있는 한식전문점인 '대지회관'으로 이동했다.

마을 공동 정자가 멋지다
▲ 도래한옥마을 정자 마을 공동 정자가 멋지다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전라도에서 가장 놀라는 것은 물산이 풍부한 곳이라 그런지 별로 비싸지 않은 음식임에도 반찬이 무지 많다는 것이다. 1만원도 채 되지 않는 정식을 부탁했는데, 반찬이 무려 20가지 정도나 된다.

홍어회 무침을 비롯하여 굴비·콩나물 무침·멸치조림·잡채·부추무침·김·버섯·오이무침·양념게장·돼지고기 두루치기·된장국·가지무침 등등 너무 많다. 밥도 맛있고 반찬도 맛있어 아주 잘 먹었다.

한정식으로 반찬이 너무 많다
▲ 저녁식사 한정식으로 반찬이 너무 많다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그런데 사실 나는 이런 식당에 가면 죄스럽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다. 우선 밥과 반찬을 지나치게 많이 줘서 늘 남기는 것이 죄스럽고, 굶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미안하다. 불안한 것은 도저히 비용이 나오지 않을 것 같다는 판단과 함께 남은 음식이며 반찬을 다시 사용할 것 같다는 의심스러운 불안감이다. 그래서 무엇이든 조금씩 나오는 식당이 난 좋다.

식사를 마친 우리들은 차를 타고 성수의 집으로 갔다. 오랜 만에 방문한 성수의 집에서 우리들은 차를 한잔 한 다음, 맥주와 안주를 사와서 술로 회포를 풀었다. 성수는 요즘 어려운 농촌 현실과 올해 파장한 배 농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풍수해 피해를 입고 나면 남은 농산물이라도 비싸게 팔 수 있도록 정부가 도와줘야 하는데, 이건 도시민들 살리겠다고 수입농산물로 대체를 해 버리니 농민은 언제나 힘들고 농산물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값이 똑같다."

술을 한잔 걸친 우리들은 간단하게 세면을 하고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가을 바람과 꽃이 좋았다
▲ 나주시 영산포 가을 바람과 꽃이 좋았다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다음 날(19일), 오전 6시도 되기 전에 일어났다. 세수를 하고는 바로 나와 '영산포(榮山浦) 홍어의 거리'로 갔다. 예전에 한번 갔던 곳인데, 홍어 냄새도 그립고 주변 풍광이 오래된 미래를 보는 느낌이 들어 다시 찾았다.

원래 흑산도의 특산품인 홍어가 나주에서도 유명하게 된 것은 고려시대 왜구의 침략과 관련이 있다. 고려 말 왜구가 흑산도 지역에 자주 출몰하여 피해가 잦자, 정부는 공도 정책을 펴서 주민들을 영산포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때 흑산도 주민들을 따라 홍어도 나주로 들어왔다. 예전에는 흑산도에서 영산포까지 뱃길로 5일 이상 걸리고 지금처럼 냉동 보관하는 기술도 발달하지 못해 운송 도중에 홍어가 상했으므로 나주에서는 홍어가 삭혀 먹는 음식으로 새롭게 자리를 잡았다.

나주시
▲ 영산포 홍어의 거리 나주시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나주 홍어의 거리에는 전문 음식점과 도소매점 수십 곳이 늘어서 있으며, 전통음식문화의 거리로 조성돼 있다. 매년 4월에 홍어 축제가 열릴 때면 다양한 볼거리가 많아진다. 홍어의 거리를 둘러 본 우리들은 선창에 있는 '영산포 등대'를 보기 위해 잠시 걸어갔다.

1915년 영산포 선창에 건립된 국내 유일의 강에 있는 등대인 영산포 등대는 지난 2004년 등록문화재 제129호로 지정됐다. 등대 기능과 함께 해마다 범람하던 영산강의 수위측정도 겸한 시설이다. 등대는 영산대교에 새롭게 수위측정 시설이 생긴 지난 1989년까지 사용되었다.

나주의 영산포는 일제강점기에 해상교역의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 호남선 철도 개통 이듬해인 1915년에 등대를 건립한 것으로 보아 일제가 영산포를 곡창지대인 호남 지역의 수탈거점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된다.

당시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철근콘크리트 구조물로 기본 틀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어 사료로 가치가 있다. 하지만 아치형 지붕 위의 조명장치 등과 주변 시설물은 많이 변해 있다. 등대에 접근하려면 철사다리를 이용해야 한다.

나주시
▲ 영산포 등대 나주시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시원한 가을 강바람을 맞으며 길가에 핀 코스모스를 보면서 홍어의 거리와 등대 및 포구 일대를 둘러 본 우리들은 아침식사를 위해 나주가 자랑하는 먹을거리인 '나주곰탕'을 먹기 위해 금계동에 위치한 '남평할매집'으로 갔다.

나주에서 정말 유명한 곰탕집 가운데 한 곳이라고 하는데, 사실 나는 별로 맛에 감동받지 못했다. 우선 곰탕에 너무 많은 파가 들어있어 육수 맛을 가렸고, 계란 고명을 올려 고명을 먼저 먹고 나니 고기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약간의 고춧가루가 뿌려져 있어 역시 국물 맛을 정확히 보기 어려웠다.

맛은 별로였다
▲ 나주곰탕 맛은 별로였다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여기에 화학조미료의 맛도 조금 있어 실망을 하고 말았다. 그냥 고기와 국물만을 담은 곰탕을 내고 파와 계란고명, 고춧가루를 따로 주면 기호에 따라 추가하여 먹으면 되는데, 순수한 국물 맛에 자신이 없다는 느낌만 줘 아쉬웠다.

이웃집으로 가는 건데 하는 후회가 되기도 했지만, 이미 모두가 식사는 마친 상태다. 아침 후 우리들은 옆에 있는 '나주목사내아(羅州牧使內衙)' '금학헌(琴鶴軒)'으로 갔다. 나주 옛 동헌에 딸린 살림집인 내아는 실제로 1980년 후반까지 나주 군수의 관사로 쓰이던 곳이다.

멋진 한옥이다
▲ 나주목사내아 멋진 한옥이다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금학헌'이라는 이름은 '거문고의 소리를 들으며 학처럼 고고하게 살고자 하는 선비의 지조가 깃든 집'이라는 뜻으로 1986년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132호로 지정됐단다. 나주 동헌의 정문인 정수루(正綏樓)에서 서쪽으로 약 65m 되는 곳에 있던 동헌 바로 뒤편에 정남향집으로 자리 잡고 있다.

나주의 관아 건축물은 객사인 금성관과 동헌 정문인 정수루, 살림집인 내아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 건물은 일반적인 내아의 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건물은 'ㄷ'자형 평면으로 된 팔작지붕이다.

현재 본채와 문간채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문간채는 본채와 20m의 거리를 두고 전면에 자리 잡고 있다. 중앙은 전퇴를 둔 5칸으로 왼쪽에서부터 대청 3칸과 그 밖의 여러 곳은 크게 고쳐서 원래의 형태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부엌이 많은 가옥이다.
▲ 나주목사내아 부엌이 많은 가옥이다.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손님 접대가 많았던 탓에 부엌이 3개나 되는 것이 특징이다. 기단은 현재 모르타르로 마감되어 있고 주춧돌은 막돌을 사용했다. 기둥은 정면에만 원형을 쓰고 나머지는 사각기둥을 사용했다.

정면의 퇴주 위로만은 창방을 걸고 그 위로 소루(小累)를 기둥 사이마다 3구씩 배치했다. 가구(架構)는 정면 중앙으로 1고주 5량, 양 날개 쪽은 4량 형식으로 꾸몄다. 처마는 앞쪽은 겹처마로, 뒤쪽은 홑처마로 돼 있다.

숙박이 가능한 터가 좋은 곳이다
▲ 나주목사내아 숙박이 가능한 터가 좋은 곳이다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조선후기의 건축물로 안채 상량문에 1825년(순조 25년)에 상량됐다는 기록이 보이고, 문간채가 1892년에 건립됐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군수 관사로 사용하면서 여러 번 수리해 원형을 많이 잃었다. 하지만 아직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관아 건축물로 중요한 역사자료임에는 틀림없는 건물이다.

마당 우측 구석에 소원을 들어주는 생명력이 강한 500년 된 벼락 맞은 팽나무가 있어 남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500년된 벼락 맞은 나무로 살아있다
▲ 나주목사내아의 팽나무 500년된 벼락 맞은 나무로 살아있다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금학헌은 지난 2009년부터는 숙박체험공간으로 쓰이고 있으며, 인의예지의 네 개의 방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나주목사로 존경을 받았던 유석증과 김성일의 이름을 딴 방은 터가 좋다가 하여 맑은 기운을 얻어 소망을 이루는 방이라고 하여 인기가 높다.

나도 연우의 겨울방학 때 쯤, 가족과 함께 이곳에서 하룻밤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탐나는 멋진 한옥이다. 참 햇살이 좋은 가을날 운치 있는 한옥 마당에 앉아 한참을 쉬었다.


태그:#나주목사내아 , #나주시 , #나주곰탕 , #도래전통한옥마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