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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오마이뉴스>와 참여연대, 생활정치실천의원모임이 함께 '나는 세입자다' 기사 공모를 실시합니다. 가슴 아픈 혹은 깨알 같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기사를 기다립니다. 세입자와 관련된 사례라면 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 반지하나 옥탑방 이야기도 좋고 해외에서 경험한 사례도 환영합니다. [편집자말]
중 1부터 월세살이를 했다. 월세살이를 한 이유는 자취생활때문이다. 그 때는 주소를 옮기지 않았기 때문에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세어보니 이사를 12번했다.
 중 1부터 월세살이를 했다. 월세살이를 한 이유는 자취생활때문이다. 그 때는 주소를 옮기지 않았기 때문에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세어보니 이사를 12번했다.
ⓒ 김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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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하룻밤 더 자고 가면 안 돼요?"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야 하는데 어떻게 하노. 그냥 오늘 가라."

일요일 오후만 되면 어머니와 나눈 짧은 대화였습니다. 꼭 카세트 테이프를 틀어놓은 것 같은 이 대화는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동안 6년간 계속되었습니다. 요즘도 중학교 1학년에 들어가는 아이들이 공부 때문에 자취를 하는지 궁금합니다. 물론 조기유학을 가는 아이들이 있지만 부모님을 떠나 자취하는 하는 아이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초등학교도 집에서 걸어 1시간 거리에 있었고, 중학교는 5~6시간(버스는 1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우리 동네 아이들은 중학교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다들 자취를 했습니다.

중1부터 시작한 자취생활, 32살까지...

이렇게 시작된 자취 생활은 서른 두 살 결혼을 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이사는 12번입니다. 주민등록초본을 뗐습니다. 중1과 대학1 때는 주소를 옮기지 않았기 때문에 기록이 남지 않았습니다.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중1~3학년 경남 사천시 축동면, 고1~3학년 경남 사천시 사천읍, 재수하면서 경남 진주시, 대학 진학하면서 부산 부산진구 가야동, 군복무, 제대 후 복학하면서 부산 동래구-영도구에서 두 번이사를 했고, 또 부산 사하구 신평동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본가로 이사를 했습니다. 대학원때는 수원과 진주를 오갔고, 졸업 후는 경남 통영시 그리고 지금은 2000년 4월부터 경남 진주시에 살고 있습니다. 진주에 산지가 벌써 13년째입니다.

중 1부터 32살까지 20년 동안 다양한 주인을 만났지만 다행히 좋은 분들이었습니다. 중학교때 주인집은 딸기 농사를 지었는데 1주일에 한 번씩은 "부모님 곁을 떠나 왔는데 이거라도 먹으라"며 주었습니다.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웠습니다. 고등학교 때 주인집에는 같은 또래 아들이 있어 정말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나머지 방세도 내!", "비 새도 어쩔 수 없어요 그냥 사세요"

대학 1학년때 주인이 12번 만난 주인 중 가장 힘들었습니다. 방 이름이 참 재미있었는 데 우리 앞에 살았던 사람들이 칼을 만드는 사람이라 "칼방"이라고 불렀습니다. 1학년을 끝내고 군대를 가야해 본가로 다시 돌아와야 했습니다. 주인은 계약기간 1년인데 11개월만에 나가니까? 나머지 한 달 방세도 다 내고 가라는 것입니다. 당시 월세가 약 10만원이었습니다.

"한 달 방세도 내고 가시오."
"아니 살지도 않았는 데 왜 방세를 내야해요?"

"계약을 1년을 했으니까? 내고 가야지."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그런 법이 어디 있냐니. 당신들이 아니었다면 다른 사람이 들어왔을 것 아니오. 한 달 방값 내고 가세요."

정말 분통이 터졌습니다. 어쩔 수 없이 한 달 방값을 내고 이사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집없는 설움을 그 때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제대 후 다시 자취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혼자 밥 해 먹는 것도 힘들었지만 밤늦게 집에 들어설 때마다 다른 집은 불이 커져있는 데 내 집 만은 암흑입니다. 그 설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적막강산이 따로 없었습니다. '나는 언제쯤 불켜진 집에 문을 열고 들어설 수 있을까?', '나는 언제쯤 문을 열어주는 집에서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자주했습니다.

32살에 아내를 만난 후 불꺼진 집이 아닌 불켜진 집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고, 기뻤습니다. 경남 통영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는데 문제는 그 집이 비만 오면 물이 샜습니다. 주인에게 고쳐달라고 하면 돌아오는 답이 걸작이었습니다.

"비가 새는 데 좀 고쳐주면 안 될까요?"
"어쩔 수 없어요. 몇 번 손을 봤지만 물이 계속 새니까 그냥 사세요."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우리도 몇 번 고쳤다니까요? 그냥 사세요."


여름은 '한증막', 겨울은 '북극'(?) 그리고 담배꽁초...

겨울만 되면 작은 틈새까지 막습니다. 그리고 커튼을 칩니다.
 겨울만 되면 작은 틈새까지 막습니다. 그리고 커튼을 칩니다.
ⓒ 김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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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3년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2000년 경남 진주로 이사를 했습니다. 역시 전세살이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집이 전통시장으로 30년이 넘은 집이었습니다. 여름은 '한증막', 겨울은 '냉방'이었습니다.

"이렇게 더운 집에서 어떻게 살아요?"
"이런 집도 없는 분들도 많아요."
"아이들 땀 좀 보세요."
"겨울은 북극이 될 것 같네요. 그래도 우리 집은 습기는 차지 않겠네요."
"하루 종일 해가 들어오는 집인데 습기가 찰리가 없지요.

이사 첫 해인 2000년 여름을 지나면서 아내는 더운 집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다행인 것은 하루 종일 해가 들어왔기 때문에 습기찰 걱정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더위와 추위가 아니었습니다. 1층이 대부분 식당이었기 때문에 온갖 냄새가 집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담배꽁초가 이틀만 줍지 않으면 한 가득입니다.

1층이 대부분 식당이었기 때문에 온갖 냄새가 집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담배꽁초가 이틀만 줍지 않으면 한 가득입니다.
 1층이 대부분 식당이었기 때문에 온갖 냄새가 집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담배꽁초가 이틀만 줍지 않으면 한 가득입니다.
ⓒ 김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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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꽁초 좀 보세요."
"비가 오면 더 더러워요."

"침이라도 뱉으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다니까요."
"자기 집 앞에서도 담배꽁초를 이렇게 버릴까요."
"당연히 안 버리지."

13년 동안 연락 한 번 하지 않는 주인

담배꽁초를 볼 때마다 화가나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담배 피우는 사람들을 보면 가서 쥐어박고 싶은 마음까지 들 정도입니다. 아이들도 담배 냄새때문에 힘들다며 빨리 이사를 가자고 하지만 아직까지는 이곳에 살 것 같습니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이지만 주인에게 스트레스 받는 일이 없어 다행입니다. 13년 동안 주인은 전화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일러가 고장나 고쳐 달라는 전화를 한 번 했을 뿐입니다. 전세살이를 하는 분들이 전세계약 기간이 끝나갈 때 임대료 올려 달라는 전화가 올까 노심초사하는 데 우리 집은 그런 걱정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때는 이 집이 내집이라는 착각도 합니다.

비록 덥고, 춥고, 담배꽁초가 우리를 괴롭히지만 13년 동안 살면서 온갖 추억들이 새겨져있습니다. 막둥이가 태어났고, 응급실에 두 번이나 실려갔습니다. 창틀이 물이 새고, 싱크대가 막혀 결국 옮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13년을 살면서 그 어떤 집보다 정이 들었습니다. 언젠가 떠나겠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집으로 우리 가족 마음 속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기사공모-나는 세입자다



태그:#월세살이, #세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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