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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대 국회 신임 국회의장으로 선출된 새누리당 강창희 의원
 제19대 국회 신임 국회의장으로 선출된 새누리당 강창희 의원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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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장의 정치 철학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다른 것 없어요. 양당 원내 대표들을 수시로 만나 독촉해야죠. 빨리 합의해서 오라고. 불러도 안 오면 의장석에 가만히 앉아만 있지 않겠어요. 위상이 떨어질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국회를 내버려 두면 안 돼요. 의장이 여야 싸움 중간에 끼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문화일보>, 2012. 7. 6.)

국회 경영철학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강창희 국회의장(새누리당)의 답이다. 기자는 이렇게 해석했다.

강 의장은 국회선진화법에 대한 걱정부터 했다. 몸싸움을 막기 위한 선진화법 때문에 앞으론 의장이 직권 상정을 못하고, 여야가 끝까지 타협하지 않으면 국회 기능이 마비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당이 요구한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방망이(의사봉)를 두드릴 수 없는 상황에서 초래될지도 모르는 국회 기능의 마비를 그는 걱정했다.

18대 국회는 '직권상정 전성시대'

국회 기능의 마비를 우려했다는 기자의 해석은 현실화됐다. 강창희 국회의장은 19대 국회 첫 임시회에서부터 직권상정에 나섰다. 김황식 국무총리 해임건의안이 바로 그것이다. 7월 2일 1달여 늦게 개원한 19대 국회가 열린 지 꼭 18일 만이다. '직권상정 전성시대'는 남은 4년 지속되는 것일까?

지난 4년 18대 국회는 대화와 타협이 실종됐다. 오로지 물리력이다. 다수결이라는 미명하에 물리력이 충돌하는 극한의 대치상황은 매년 되풀이됐다. 충돌의 시작점은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이었다.

지금은 야인이 된 김형오·박희태 의원(새누리당)이 의장으로 재직했던 지난 4년 국회는 '직권상정 전성시대'였다. 언론악법, 부자감세, 한미FTA 등 무려 97건의 안건을 직권상정 했고, 이는 곧 해머, 최루탄, 점거농성 등 여야 간의 극심한 충돌로 이어졌다.

지난 4년에 대한 반성이었을까? 19대 국회를 앞둔 지난 5월, 여야는 대화와 타협이 실종된 국회를 선진화하자면서 국회법을 개정했다. 당시 노영민 의원(민주통합당)이 한 제안설명을 일부 보자.

"(국회법) 개정안은 안건이 국회 심의과정에서 대화와 타협을 통하여 심의되도록 하여 물리적 충돌을 방지하는 한편 소수 의견이 개진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면서도 효율적으로 심의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개정안의 주요 내용은, 첫째, 의장의 직권상정 요건을 천재지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 각 교섭단체대표의원 간 합의가 있는 경우로 한정하고….(이하 줄임)"(2012년 5월 2일 국회 본회의)

대법관 임명동의안 직권상정, 가능할까

지난해 11월 22일 국회 본회의에서 정의화 부의장이 한미FTA 비준안을 기습 상정하자 의장석으로 뛰쳐나간 최규성 민주당 의원이 의사봉 빼앗기를 시도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22일 국회 본회의에서 정의화 부의장이 한미FTA 비준안을 기습 상정하자 의장석으로 뛰쳐나간 최규성 민주당 의원이 의사봉 빼앗기를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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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강창희 의장은 지난 7월 20일 김황식 국무총리 해임건의안을 직권상정했다. 이를 선례로 삼아 4명의 대법관 임명동의안마저 8월 1일 직권상정할 수도 있다는 관측마저 솔솔 흘러나온다. 19대 국회마저 '직권상정 전성시대'가 되는 것일까?

불과 2달 전에 개정된 국회법 제85조에 의하면, 국회의장은 ▲ 천재지변 ▲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 ▲ 의장이 각 교섭단체대표의원과 합의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직권상정을 할 수 없다. 여야 대표간 합의가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금 한국은 천재지변 또는 국가비상사태를 맞은 셈이다. 도대체 국회의장은 어떤 법조항을 근거로 김황식 총리 해임동의안을 상정한 것일까?

7월 20일 당시 김황식 국무총리 해임건의안 상정에 관한 법적 근거를 국회 의사과 본회의계 담당자에게 물었다. 그는 "법적 근거는 국회법 제76조 제2항이다. 하지만 언론에서 적고 있는 직권상정이라는 용어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고 혼동된 개념이다"라고 했다.

그는 "의장의 직권상정은 '위원회에 회부된 안건' 중 논란이 있는 안건에 대한 것으로 개정된 국회법 85조에 따라 엄격히 제한된다. 하지만 이번 해임건의안은 위원회에 회부되지 않은 안건으로 본회의에 부의된 안건이다. 따라서 직권상정의 엄밀한 요건과는 다른 케이스로서, 의장의 결심이 있으면 85조의 적용을 받지 않고 당일 안건에 올릴 수 있다"고 했다.

또한 그는 "대법관 임명동의안은 위원회에 회부된 안건으로서 총리 해임건의안과는 달리 직권상정을 엄격히 제한한 국회법 85조의 적용을 받는다"고 덧붙였다.

국회 의사과의 설명대로라면, 일부 언론의 추측성 보도, 예컨대 '대법관 임명안 불발... 8월 1일 직권상정 관측'(<연합뉴스>, 7월 23일)과 같은 제목의 기사는 틀렸다. 지난 5월 여야 합의로 개정된 국회선진화법을 통해 19대 국회가 '직권상정 전성시대'가 되는 것은 막을 수 있다.

유신 때 만들어진 직권상정, '파행' 만드는 방아쇠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제도는 유신시대인 1973년 만들어졌다. 애초 이 제도는 원내정당 간의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고 국회가 꼭 내려야 할 결정을 실현하는 돌파구로서 인정된 제도이지만, 사실은 더 심한 국회 파행과 대결을 만드는 방아쇠가 되어왔다.

여야 간의 격렬한 대립을 보였던 17대 국회와 18대 국회에서 의장의 직권상정에 의한 처리 안건 수가 급격히 증가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16대 국회에서는 6건에 불과했던 직권상정의안이 17대 국회에서는 29건으로 증가했고, 18대 국회에서는 97건으로 급증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직권상정제도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합의를 만들어 가야 하는 의회정치를 무력화하고, 국회를 단지 다수파의 입법의지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표결기계로 전락시켰다. 또한 18대 국회 당시 직권상정 의안의 대다수가 대통령이 주도한 안건으로서, 제18대 국회는 행정부의 시녀 역할로 위상이 전락했다.(국회의원 원혜영·국회입법조사처 주최 '국회 선진화법' 통과의 의의와 전망 세미나, 2012년 6월 26일)

입법부의 권위를 찾고 의회정치를 정상적으로 만들어가기 위한 첫 번째 단추는 의장이 직권상정을 할 수 있는 기회 자체를 줄이는 것이다. 18대 국회는 임기만료를 앞둔 지난 5월 국회법 개정으로 그 첫 단추를 끼웠다. 다음 단추를 제대로 끼워나가느냐, 아니면 또 다시 대립과 폭력으로 남은 4년을 이어갈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시점이 이제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대화와 타협인가, 아니면 행정부의 시녀를 택할 것인가. 국회법 준수인가, 아니면 국회의 자율권 운운하며 '표결기계'를 자임할 것인가. 선택은 강창희 국회의장에게 달려 있다.


태그:#국회의장 직권상정, #김황식 총리 해임건의안, #대법관 임명동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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