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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 청춘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선언하고 싶었지만, 차마 선언까지는 못하고 자기최면을 걸고 있었다. 무엇을 해도 두렵지 않았던, 하던 일이 망해도 이내 다시 일어설 미래가 준비돼 있었던, 성공이니 실패니 하는 단어들이 도대체 무의미했던 그 시절은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러고 보면 그 시절의 나는 행복에 대한 중압감조차 없었다. 얼른 행복해야 할 텐데 어떡하나, 행복하지 못하게 되면 어떡하지 등등 이런 조바심이 없었다. 최루탄 직격탄을 맞아 다리가 깨졌으면서도 "어유 썅, 나쁜놈들", 가볍게 한 마디 툴툴거리는 것으로써 '나쁜놈들'을 용서해 버리고 내 갈 길을 가는 여유만만이 있었다.

그토록 여유만만했던 시절의 나는 어디로 가버렸는가.

진로 설정을 놓고 꽤나 고민을 했다. 청춘의 시기에도 해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이었다. 흰소가 거리를 장악하고 있다는 인도로 날아가서 파키스탄까지 횡단을 할까. 아니면 베트남을 갈까. 아프리카의 오지를 순례할까. 아니아니 차라리 호스피스병동을 찾아다니는 이른바 '책 읽어주는 남자'로 살아볼까. 등등 여러 가지 가능성을 놓고 저울질을 해 보았지만, 열거한 모든 것들이 내게는 아직 사치라는 생각을 털어내기 어려웠다.

해야 할 뭔가를 나는 아직 못하고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당연히 알 수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도 안절부절 못해하는 날들이 일 년 이상 계속될 수는 없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들릴 것도 같은,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앉으면 일어서고 싶고 일어서면 다시 앉고 싶어지는, 이런 지독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일단 집을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가령 디데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날은 어머니의 첫 제사를 마친 다음 날이거나 사흘 뒤가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장성, 가까운 데도 가보지 못했던... 가장 가보고 싶은 곳

나무가 이렇게 되기까지의 고통은 감히 내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 나무를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나무가 이렇게 되기까지의 고통은 감히 내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 나무를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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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집을 나섰다. 98년식 2인승 밴에 접이식 자전거와 텐트 그리고 이런저런 취사도구를 싣고서였다.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은 장성이었다. 장성, 고창에서 양고살재나 솔재 둘 가운데 하나만 넘으면 바로인 곳, 조금 과장을 하자면 코 앞인 곳인데도 나는 아직 한 번도 장성을 가본 적이 없었다. 광주를 갈 때 무심한 얼굴로 지나치거나, 기차를 타러 장성역에 한 번 가본 게 전부였다. 신기한 일이었다. 왜 그렇게 되었던 거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의 어느 하루 불현듯 그런 의문이 들었다. 이 신기한 의문을 풀지 못하면 내가 홀로서기를 못할 것 같았다. 다른 세상으로 떠나고자 눈을 감은 어머니의 발목을 붙잡은 채로 방 구들이나 지키다가 홀연 죽어버릴 것 같기도 했다. 장성은 어머니의 소녀 시절이 어쩌면 고스란히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무슨 환상 같은 것이 내게 있었든가 여부는 아직도 모르겠다.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도착한 곳이 장성의 남창계곡이었다. 계곡 초입에서 독특한 형태의 빈 집 한 채를 발견하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집의 외관이 내 마음에 쏙 들었다. 한 사흘쯤 그 폐허의 정기를 빨아들이고 나면 내가 금방 짜라투스트라 같은 인간이라도 되어질 것 같았다. 뒤뜰에 텐트를 설치해놓고 어슬렁거리다가 비를 만났다.

다음날 비가 그친 뒤 커다란 바위에 올라가서 낯선 물을 몇 시간째 들여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두 달 이상 가물다가 쏟아진 비에 새우의 씨앗들이 깜짝 반가워서 깨어나는 장면을,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의 생생한 장면을 목도하고 싶었다.

깊은 산 골짜기에 사는 새우는 동물이면서도 식물에 가깝다는 전설을 내가 알고 있었다. 새우가 알을 낳았는데도 비가 안 와서 골짜기의 물이 말라버리면, 새우의 알은 식물의 씨앗처럼 바위틈이나 흙속에 파묻혀 있다가 어느 날 비가 내리면 화들짝 알에서 깨어난다는, 깨자마자 초고속으로 성장해서 짝짓기를 하고 또 알을 낳는다는 전설 말이다.

모든 출입구를 막아놓은 집. 계곡에 사람들이 몰리는 계절이 되면 문을 열고 닭백숙 등의 영업을 개시한단다.
 모든 출입구를 막아놓은 집. 계곡에 사람들이 몰리는 계절이 되면 문을 열고 닭백숙 등의 영업을 개시한단다.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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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생각은 그랬다. 새우가 알에서 깨나는 그 역동적인 장면을 상상하며 물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차츰 새우는 잊어버리고 내 얼굴을 바라보기 시작했을 것이다. 물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시간 모르고 들여다보는 사내란 뭐랄까, 이게 좀 그렇긴 하지만 어쨌든 그랬다. 그런 나를 지켜보는 눈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내 친구의 딸들보다는 어려 보이고, 동생의 딸 그러니까 조카들보다는 어른스러워 보이는 여자(?) 둘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한참 뒤에 알았다. 각자 한 대씩의 자전거를 거대한 굴참나무 아래 경사면에 쓰러뜨려 놓고, 그 자전거를 등받이 삼아 비슷하게 앉아서 나를 보며 '뭐라고 뭐라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것을 아마 요새 흔히 쓰는 말로 '데자뷰'라고 하는 것일 게다. 뒤통수가 자꾸 근지러워서, 무슨 거미 같은 것이라도 기어 다닌다는 느낌이어서 고개를 뒤로 돌리고 살피다가 그녀들과 눈이 딱 마주쳤다.

"아까요. 두 시간인가, 세 시간인가 전에 우리가 이 길을 지나갔거든요. 그때 아저씨를 봤어요. 보면서 약간 이상하다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돌아오는데 아직도 계시잖아요. 이상한 거죠. 우리 입장에서는."

말인즉 내가 자살이라도 할 것 같아 보였다는 거였다. 처음에는 그저 이상하다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자리를 떠났지만, 시간이 갈수록 예감이 자꾸 불길해서 되돌아오게 되었다는 거였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내가 높은 바위에서 몸이라도 던지면, 그 순간에 달려와서 나를 잡아주겠다는, 죽기 직전의 나를 살려내겠다는, 뭐 그런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정신이 온전하다면…. "글쎄"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나는 그랬다. 감격해 버렸다. 아이고 얘들아, 내가 너희들을 위해 뭘 할 수 있겠니. 뭘 해주면 좋겠니, 응?

"근데, 뭘 그렇게 집중해서 보고 계셨었세요?"

박태원의 옛 소설 같은 데서나 읽을 수 있는, 불어나 중국어를 할 때처럼 혀를 잔뜩 꼬아야만 가능한 옛말이 한 소녀의 입에서 나왔다. 그 순간 직감했다. 아하, 국문학을 전공하고 있거나 전공하려는 아이들이구나.

"그러니까, 왜? 그런 데서 위험한 포즈를 취하고 계셨었냐고요?"

아이들은 이제 마치 시비라도 거는 투로 묻고 있었다. 한 곳에 그렇게도 오랫동안 앉아 있을 거면 그냥 집에서 도를 닦지 왜 여행을 하느냐고. 혹시 사람들 눈에 띄고 싶어서 그런 것이냐고, 그렇게 아주 도발적인 질문으로 나를 살짝 당혹스럽게 했다. 이렇게 되면 나도 뭔가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이를테면 여행의 철학 같은, 그런 이야기가 내 입에서 술술 풀려 나왔다.

소녀의 아주 도발적인 질문에 나는 살짝 당혹스러웠다

물가에 앉아 물소리를 듣다 보면 내가 사라지는 진기한 경지에 이른다
 물가에 앉아 물소리를 듣다 보면 내가 사라지는 진기한 경지에 이른다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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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스케일이 방대한 여행은 좋아하지 않는다. 경제학 용어로 말하자면 거시경제가 아니라 미시경제를 좋아했다. 그래서 전공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쪽을 선호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작은 여행쯤 되려나? 아니면 조용한 여행? 깊은 여행이라 해도 좋을 것 같긴 하다. 명칭이야 어떻든 그렇다.

나는 체질적으로, 어쩌면 선천적으로 큰 것보다는 작은 것을, 요란한 것보다는 조용한 것을, 수박 겉핥기보다는 깊은 것을 좋아해 왔다. 다소 거친 비유를 들자면, 누가 나한테 돈 천 억을 줄 테니 이걸로 빵빵하게 사업을 해볼래 아니면 일 억을 줄 테니 그걸로 소박하게 이웃들과 잡담이나 하며 살아갈래, 한다면 두 번 생각도 없이 그냥 일 억이라고 할 것이다.

여행이 끝난 뒤에 피곤해서 죽겠다거나, 남은 것은 사진밖에 없다거나, 그런 말들이 나오면 그 여행은 망친 거다. 많이 보고, 많이 듣고, 많이 체험하는 것이 좋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사람은 아마도 여행사 직원들이거나 그들의 상술에 넘어간 사람들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여행만큼 자본주의 철학이 깊숙이 흔적도 안 남기고 침윤된 분야도 그리 많지 않다. 등등 그런 쓸데없는 얘기를 한 십여 분쯤 늘어놓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사실 무섭고, 외로워서 집을 나왔어요. 무섭고 외로워서요. 무섭고 외로워서."

내 이야기가 지루했다는 듯이, 묻지도 않은 고백을 그녀들 중에 누군가가 했다. 그 뒤에 나온 말들을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거렸다. 십 년도 훨씬 전에 나온, 시인 이상을 주인공으로 해서 만든 영화 <금홍아 금홍아>를 두 친구가 나란히 엎드려서 보다가 참을 수가 없어서, 격정적으로 여행을 나섰다는 얘기였다. 시인 이상이 동경에서 스물여섯 살에 죽기 직전 옛 여인에게 보낸 편지 한 통이 자기들을 미치도록 못 견디게 만들었다는 거였다.

그 편지의 나레이션을 듣다가 두 친구가 펑펑 울었다고 했다. 울면서 이상한 맹세를 했다는 거였다. 절대로 사랑 같은 것은 안 하고 살자고. 그 말을 듣고 내가 한 마디 했다. 사랑이 하고 싶다고 해서 해지는 것인 줄 아느냐고, 사랑을 안 하겠다 결심한다 해서 안 해지는 것인 줄 아느냐고. 그러자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예쁘다."

내가 또 한 마디 했다. 침묵해야 할 시간을 아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은근 불안해지고 있었다. 얘들 가운데 누군가가 불쑥 이런 질문이라도 해 오면 어떡하나 하고.

"사랑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것을 알면서도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이런 질문이, 혹은 의견이 나와 동년배거나, 최소한 완전히 성숙했다고 여길 수 있는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면 내가 굳이 겁을 먹을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사랑학 토론 같은 것이라도 해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글쎄, 몇 살이나 됐으려나, 스물 안쪽일 수도 있고 넘었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나처럼 세상의 이면과 전면을 두루 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함부로 입을 열 수 없는 두려운 존재들인 것이다.

소녀들이 여행 온 사연, 영화 <금홍아 금홍아>보다 참을 수가 없어서

하늘이 거의 안 보이는 숲속에서도 꽃은 핀다
 하늘이 거의 안 보이는 숲속에서도 꽃은 핀다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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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상은 금홍이와 헤어지고 변동림과 결혼을 하지만, 금홍이를 못 잊어서 찾아갔다가 자신의 초라한 몰골을 인식하고 돌아선다. 그 뒤로 동경행을 택하지만,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경찰에 연행되는 등 고초를 겪다가 육 개월여 만에 죽는다. 죽기 전에 이상은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친구 구본웅에게 편지를 쓴다.

"나는 고독하네, 동경에서 친구 삼을 만한 사람을 아직 발견하지 못하였네."

이 편지와 함께 보낸 것이, 잊을 수 없는 연인 금홍이 앞으로 된 다섯 줄짜리 편지였다. 동거까지 했던 애인에게 편지 한 통 직접 보내지 못할 정도로 이상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내가 그다지도 사랑했던 그대여
내 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으리라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 줄은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라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아이들은 이 다섯 줄의 편지를 무슨 시라도 낭송하듯이 읊고 있었다. 그러면서 또 쿨쩍쿨쩍 울고 있었다. 그들의 울먹이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내 가슴에서도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디에 사는, 몇 살의 누구들이신가?"

내 입에서 불쑥, 그렇게, 바보 같은 질문이 나왔다. 그녀들 중에 한쪽이 미쳐 죽겠다는 투로 까르륵, 웃었다. 다른 한쪽은 눈 먼 고양이라도 보듯이 나를 보고 있었다.

"앞으로 일주일 내에 혹시 또 만나게 되면, 그때 말해드릴게요."

까르륵 웃었던 쪽이 결론을 지었다. 눈 먼 고양이라도 보듯이 나를 보고 있던 쪽은 이제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 아이의 입에서 짧은 한숨 소리가 새 나왔다. 어쨌든 그들은 떠났다. 아주 씩씩하게, 자전거 페달을 밟고 떠나는 그녀들의 뒤를 보고 있는 내 눈앞으로 오래 전의 한 여자가 마라톤 선수처럼 달려왔다가 홱, 사라졌다.

자살을 희망으로 여겼던, 그리하여 죽기에 좋은 자리를 찾아서 헤매던 시절의 지리산 토끼봉 근처에서였다. 그때 나는 내 시체를 다른 사람이 발견할 수 있는 방식의 자살을 해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신념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그 확고한 신념을 송두리째 무너뜨려 버린 사람이 그 여자였다.

그 여자. 잘하면 한 시간쯤, 어쩌면 한 시간 이십 분 정도의 인연밖에 없었던 사람, 헤어진 뒤에는 며칠 안 돼서 얼굴조차도 잊어버렸지만 그 존재감만은 내 영혼의 저 아래쪽을 차지해 버린 여자, 안개 속에 피어오르는 담배연기처럼 모호한 그녀의 실루엣을 쫓아서 나는 아마 한참을 또 그렇게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아저씨, 감수성 때문에 죽을 수도 있을까요?"

가뭄으로 바싹 말랐던 계곡에 물소리가 흥겹다
 가뭄으로 바싹 말랐던 계곡에 물소리가 흥겹다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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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소리와 함께 까르륵 웃어대는 소리가 뒤통수를 때렸다. 자전거를 타고 씩씩하게 떠났던 아이들이 다시 돌아와 있었다. 이유는 저녁 식사를 함께 하고 싶다는 것. 그러면서 그들은 작은 배낭을 거꾸로 들어 보였다. 참치 캔이 열 개도 넘게 쏟아져 나왔다. 쏟아져 나온 참치 캔이 이리로 구르고, 저리로 구르고, 제멋대로 마구 굴러다니다가 결국은 멈췄다.

"아저씨 텐트 좀 빌려주세요."

참치 캔으로 이루어진 저녁을 마친 뒤에 한 아이가 불쑥, 흡사 잘 익은 수박을 쪼갤 때 절로 나는 상큼한 소리로 말했다. 그랬다. 그것은 부탁이나 요청이 아니라, 그냥 말이었다. 말. 다른 아이가 그 이유를 설명했다. 어제는 담양의 한 모텔에서 잤는데 아침 기분이 영 안 좋았다고, 내일 오후에는 광주로 돌아가야 하는데 기분이 안 좋은 아침을 또 경험하고 싶지가 않다고, 그러니 텐트를 내놓으라는 거였다.

"그럼 나는?"
"아저씨는 새우가 알에서 깨는 모습을 보셔야 한다면서요. 늦은 밤에 새우들이 다 깨나버리면 어떡해요?"

음, 내가 당한 것인가? 아니면 이 아이들이 아직도 내가 자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지금 나를 감시하고자 하는 건가?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아, 음, 아직은 이런 청춘이 내 주변에 있을 수도 있는 것이었구나, 아직은, 아직은…….

"아저씨, 아저씨이. 사람이 말이에요. 감수성 때문에 죽을 수도 있을까요?"

아, 이 질문, 너무 좋다. 이 아이들이 나를 아주 그냥 쑥쑥 키워주는구나. 나는 계속 감격이나 하고 있었고, 아이들은 계속 질문을 하고 있었고, 밤은 점점 깊어가고 있었다. 어느 때쯤 한 아이가 "아유 졸려"했고, 다른 아이가 "그만 잘래요"하고는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나는, 어머니의 소녀도 저 아이들 같았을까, 그랬겠지? 아아 참 아니다, 아니겠구나, 저만한 나이 무렵의 어머니는 이미 소녀가 아니었다. 황룡댁이었다. 나이 열네 살에 당신의 아버지가 붙여준 이름 유봉춘을 버리고, 혹은 포기하고, 어쨌든 황룡댁이 되었다. 그 어린 나이 열네 살에 제2의 생을 시작하셨던 거다. 등등 그런 오리무중 같은 생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든가 어쨌던가, 하여튼 어느 때쯤 고개를 들어보니 먼동이 터 오르고 있었고, 새들이 지지구구 요란한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태그:#어머니, #제사, #여행, #남창계곡, #소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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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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