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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부터 각종 수습대책에도 불구하고 악화되어 온 유럽위기는 2012년 6월에 가장 중요한 시련을 맞이할 것이라는 전망이 잇따르고 있다. 우리 연구원은 좀 더 종합적으로 유럽위기를 조망해보고 이후 세계경제와 우리사회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점검해 보는 기획으로 '유로 2012'를 마련했다. 지금 유럽에서 한창인 축구 경기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유로화의 향방이 2012년에 분기점을 맞을 수 있다는 전망을 담고 있다. - 기자 말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탈퇴할 것이라는 전망이 확산되며 지난달 16일 오후 서울 시내 한 금융회사 전광판에 코스피가 전날보다 58.43포인트(3.08%) 폭락한 1,840.53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탈퇴할 것이라는 전망이 확산되며 지난달 16일 오후 서울 시내 한 금융회사 전광판에 코스피가 전날보다 58.43포인트(3.08%) 폭락한 1,840.53을 나타내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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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유로존 탈퇴에 대비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12일 프랑스 르 피가로(Le Figaro)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이다. 대통령뿐만이 아니다. 최근 경제와 금융 정책을 책임지고 있는 수장들이 유럽위기의 심각성과 우리 경제가 받을 충격에 대해 가감 없는 의견을 언론에 쏟아내고 있다. 온갖 근거 없는 낙관론으로 일관했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와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그 분석과 진단들이 매우 심각하다. 학계에서 던지는 화두보다 훨씬 더 강도가 높은 발언들이 줄을 잇고 있는 중이다.

"앞으로 한두 달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있을 것이다. 하반기 우리 모습도 상당히 영향을 받을 것이므로 현재로서는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가 어렵다."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5월 25일 한 발언이다. 하반기 우리경제 전망이 불가능할 정도로 당면한 유럽위기의 파장이 엄청날 것을 예견한 대목이다. 금융정책을 책임진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열흘 뒤인 지난 6월 4일 "유럽 재정위기가 스페인으로 번질 경우 대공황에 버금가는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6월 8일에는 "2008년 리만 사태에 비하면 이번 위기는 여러 면에서 더 심각하다"고 진단했다.

유럽위기는 수습 자체가 아예 불가능하고, 위기는 세계적으로 확산 될 것인 데 그 강도가 2008년 리만사태를 넘어 1929년 대공황에 준하는 심각한 국면을 초래케 할 것이라는 공포의 예언이다. 곧 이어 6월 10일 금융 감독을 책임진 권혁세 금융감독원장은 "세계경제 인식이 김석동 위원장과 다르지 않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6월 12일 대통령의 발언이 나왔다.

한마디로 한국의 경제와 금융 정책 책임자들이 현재 시점에서 세계경제 전망에 대한 닥터 둠(비관적 경제 전망론자)들이 되고 있는 셈인데, 이후 긴 안목의 전망은 비장하기조차 하다.

권혁세 원장은 "유럽 위기가 여러 국가의 정치 문제까지 겹쳐 더 나빠진만큼 근본적인 해결을 하려면 장시간이 걸린다"며 "위기 극복 과정에서 세계 경제의 긴축과 둔화가 굉장히 오래 이어질 것이므로 지금부터 우리도 단단히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김석동 위원장은 "끊임없이 위기를 불러오고 양극화를 심화시켜 온 신자유주의가 종언을 고하고 이제 소비자와 투자자에 대한 보호, 사회적 책임 등이 강조되는 새로운 자본주의의 패러다임이 등장할 것"이라며 "그런 점에서 이번 위기를 계기로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 시각이 바뀌고 있다"고 평가했다. 신자유주의적 이명박 정부의 금융 책임자도 유럽위기로 인해 '신자유주의가 종언'되었음을 공인한 것이다. 2008년 리먼브라더스 사태에서 쏟아져 나왔던 신자유주의 종언에 이은 두 번째 사망선고다.

가까이 다가온 유로 붕괴 시나리오

폴 크루그먼의 유로 붕괴 시나리오
1. 그리스가 유로를 탈퇴한다. 6월에 그럴 가능성이 높다.
2. 스페인과 이탈리아 은행에서 대규모 예금 인출이 일어나고, 예금자들은 자금을 독일로 옮기려고 할 것이다.
3. 아마도 예금의 국외 유출이나 현금인출을 금지하는 사실상의 통제도 가능하다. 대체 방안으로, 또는 동시에 유럽중앙은행이 은행 붕괴를 막기 위해 막대한 신용공여를 해준다.
4. 독일은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에 대한 지급보증을 해주고, 과감한 전략수정을 하는 방안이 있다. 특히 스페인의 조달 금리를 낮추기 위한 부채 지급보증과 동시에, 부채의 상대 가격을 조정하기 위해 인플레이션 목표를 현재 2%에서 3% 이상으로 올려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유로 존은 붕괴한다.
그런데 사실 유럽위기는 2010년부터 계속 진행되어오던 것이 아니었나? 매번 극히 위험할 것 같았던 고비들이 구제 금융이나 각종 수습책에 의해 '그럭저럭' 넘어가지 않았나. 그러면서 내부적으로는 더 큰 위험이 누적되었을지 모르지만, 이번에도 역시 그럴지 모른다는 관성이 생긴 터였다. 그러나 정책 당국자의 발언을 보면 이번에는 쉽게 넘어갈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지금의 위기는 어느 정도 심각한 국면일까?

200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Paul Krugman)의 비관적 전망을 하나만 예로 들면서 일단 직관적으로 문제의 심각성을 공감해 보자. 크루그만은 6월 안에 그리스의 유로 탈퇴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지난 5월 13일, 유로 붕괴의 4단계 시나리오를 묵시록처럼 던지기도 했다.

그는 "정치적 동맹 없는 통화동맹이라는 결함이 있는 거대한 실험이 어떻게 균열되어갈 것인지를 보는 것이 갑자기 쉬워졌다"며 "우리는 장기적 전망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상황은 연간 단위가 아니라 월간 단위로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면서 상황의 긴박성을 전하고 있다. 최근 위기가 그럭저럭 넘기기에 결코 쉽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역사적 맥락에서 유로라고 하는 통화동맹(Monetary Union)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대략 3번의 계기를 통해 구체화되었다. 첫 번째 계기는 1958년 유럽 경제 공동체의 탄생이고, 두 번째 계기는 1971년 미국 달러의 금태환 정지와 변동환율제로의 이행이며, 마지막 계기는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독일의 통일이라고 하는 너무나 잘 알려진 역사적 계기다.

1945년 2차 대전 종전 이후 1999년 1월 유로화 출범에 이르기까지 55년 역사에 대해 이 분야의 전문가인 베리 아이켄그린(Barry Eichengreen)의 저서 <달러제국의 몰락(Exorbitant Privilege)>에서 밝혀놓은 바를 참조하며 살펴보자. 1945년 이후 유럽에서 일어난 중대 사건과 변화는 거의 모두 전쟁의 상흔에서 시작되었다. 경제동맹과 통화동맹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켄그린은 이렇게 묘사한다.

"20세기 유럽사의 중심적인 사건인 2차 대전은 통화체제의 변화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통화동맹으로 이어진 협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전쟁에서 겪었던 경험을 교훈으로 삼았다. 그들은 유럽의 통합이 또 다른 비극의 재발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50년대에 독일의 경제력의 회복되면서 독일을 유럽의 일원으로 끌어들이는 일은 더욱 중요해졌다."

결국 전쟁방지와 평화라는 유럽인들과 정치지도자들의 정치적 동기가 경제 동맹과 통화동맹을 서두르는 데에도 중대한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즉, 순수하게 경제논리의 자연스런 귀결로만 유럽의 통화동맹과 유로화 탄생을 해석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종전 후 가장 먼저 형성된 공동체는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이다. 이 역시 독일의 재무장을 억제하려는 프랑스와 전후 상실된 국제적 영향력을 제고하려는 독일의 이해가 맞아떨어지고, 여기에 유럽공동시장의 창출을 통한 경제적 효과를 기대한 이탈리아와 베네룩스 3국이 가세하면서 1951년 파리조약에 따라 유럽석탄철강공동체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1958년 오늘날 유럽연합(EU)의 전신이라고 할 유럽경제공동체(European Economic Community)가 탄생한다.

아이켄그린에 의하면 "유럽경제공동체는 경제적, 정치적 결사체로서 부족한 면이 많았지만 유럽 통합과 그에 따른 유럽 단일통화에 대한 보다 진전된 논의를 촉진했다"며 그는 "유럽 경제공동체의 설립 근거인 로마조약은 통화 동맹을 만든다는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대신 환율을 공통의 관심사로 정하고 통화위원회가 회원국에 자문을 제공한다는 내용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유럽 경제 공동체를 설립했던 1958년부터 이미 통화위원회가 만들어지면서 환율에 대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시작했다.

재정통합까지 담고 있었던 초기 베르너 보고서

그러나 유럽 국가들이 제대로 통화와 환율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1971년 닉슨 미국 대통령이 달러에 대한 금태환 정지를 선언하고, 1973년 국제적으로 변동 환율체제로 들어갔던 시점이다. 금 1온스 당 35달러로 고정한 전후 고정환율체제인 브레튼우즈체제가 붕괴했던 때이다. 1960년대까지는 유럽 각 국가들의 통화가 달러와의 연동이 안정되면서 유럽 통화들 사이의 연동도 안정되었기 때문에 특별히 환율조정의 동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선 공식적인 금태환 정지 직전인 1970년 유럽 단일통화 방향에 대해서 베르너(Pierre Werner) 보고서라고 하는 최초의 완결된 보고서가 작성되었다.

"유럽 공동시장을 유지하고 달러의 불안에 따른 위험으로부터 유럽을 보호하려면 확고하게 고정된 환율체계가 필요했다. 보고서는 이를 위해 미국 연준(Fed)과 유사한 기관을 설립하고 통화동맹에 속한 나라들이 예산 운용을 공조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한 미국 연방정부가 전체 주 정부에 자금을 재분배하듯이 약한 나라를 돕는 정부 사이의 자금 이전 시스템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유럽 연합 차원에서 단일통화에 대한 방안을 정리한 최초의 완결된 보고서였으며, '정부 사이의 자금 이전 시스템'이라고 하는 상당히 적극적인 재정통합 구상까지 담고 있었다. 물론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대신 실행에 옮겨진 것은 변동 환율체제로 이행하면서 불안해진 환율을 조정하는 문제였다. 아이켄그린은 "유럽 국가들은 달러의 불안정성 때문에 더욱 단일 통화를 원하게 되었다. 그래야 부정적인 영향을 덜 받을 수 있었다"며 "따라서 달러가 지닌 문제점이 대안인 유로를 국제무대에서 대항마로 키웠다고 말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금 태환 정지 후 가치하락으로 미국 달러의 변동성이 심해지자 프랑스의 프랑, 독일의 마르크 등 유럽 국가들 사이의 환율 관계가 불안하게 변동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유럽 국가들 사이의 상품 수출 변동성이나 자본유출입 변동성이 매우 커지면서 유럽 공동시장의 경제가 극히 불안정해졌다. 특히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환율 변화는 유럽 내부의 수출 경쟁력, 실업률, 경기회복, 정부 예산균형 등에 다방면으로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부터 프랑스와 독일을 중심으로 새로운 변동환율체제에 대응한 환율조정협의를 거듭하다가 1979년 유럽통화제도(European Monetary System)라는 이름아래 부속제도인 환율조정제도(ERM, Exchange Rate Mechanism)를 구축하여 운영에 들어갔다. 지금 보면 복수 바스켓 통화시스템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데, 유럽 국가들이 복수 개의 주요 통화를 기준으로 위 아래로 2.25% 이내에서 각국의 환율 변동 폭을 협의하여 조정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하지만 환율조정제도(ERM)는 1992년 파운드에 대한 투기 공격으로 파운드 가치가 폭락하면서 영국이 탈퇴하고 이어 이탈리아도 탈퇴하는 등 수난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로화가 탄생한 1999년까지 20년 동안 독일과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 공동체의 환율과 통화 조정 메커니즘으로 작동해 왔던 유로의 중요한 전사(前史)이다.

독일 통일, 유로 통화동맹 성사의 계기
 
독일의 통일은 유럽 통합과 단일 통화에 대한 논의를 되살려 낸 결정적 계기였다. 통일 이후 독일을 평화적으로 유럽에 편입시키는 일이 긴급해지면서, 통화 동맹은 정치적 결속을 위한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처음부터 통화동맹은 경제적 프로젝트 이전에 정치적인 프로젝트였다. 결국 정치가 통화동맹을 이끌어냈다고 할 수 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헬무트 콜 독일 수상이 통일계획을 발표하기 전인 1989년, 유럽 통합에 대한 들로르(Jacques Delors) 보고서가 제출되었다. 이것이 이후 통합에 대한 논의의 기초가 되었다. 그런데 1970년 베르너 보고서와 다른 차이점이 있었는데, 재정적 특권을 침해하는 단일 세법이나 양도법을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유럽경제공동체의 예산을 크게 증액하자는 주장도 달지 않았다. 이러한 양보는 정치적으로는 유용했으나 향후 심각한 문제들을 초래하게 되었다고 아이켄그린은 지적한다. 바로 재정통합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중립성과 물가안정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독일 중앙은행 분데스방크의 논리가 유로 통화동맹에 관철된 상황을 아이켄그린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분데스방크는 유럽 중앙은행의 정관을 만들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예상한 대로 분데스방크는 독립성, 정치적 개입의 배제, 물가 안정 의무를 강조했다. 통일이 확정된 다음부터 독일 정부의 태도는 강경해졌다. 그들은 유럽중앙은행이 연방체제로 운영되어야 하고, 회원국의 재정적자를 지원하는 규모를 제한해야 하며, 물가 상승률과 재정적자 그리고 국가부채의 감소를 참여조건으로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정한 GDP 대비 재정적자와 국가부채의 상한선은 각각 3%와 60%였다. 또한 환율도 안정시켜야 했다. 이 모든 조항들이 1991년에 네덜란드의 마스트리트(Maastricht)에서 열린 유럽 정상회의에서 마련한 조약 초안에 포함되었다."

마스트리트 조약을 바탕으로 1999년 유로화 탄생

GDP 대비 재정적자와 국가부채의 상한선은 각각 3%와 60% 규제가 바로 안정성장협약(SGP, Stability and Growth Pact)이다. 재정통합이 안 된 상황에서 마련했던 안전장치였다. 하지만 이는 긴축정책의 강요로 이어져 현재 유럽위기 과정에서 최고의 논쟁 지점이 되고 있다. 안정성장협약(SGP)은 과도한 재정적자를 막기 위해 재정적자 및 정부 부채를 각각 GDP의 3% 및 60% 이하로 제한하는 재정규율, 다른 회원국의 채무인수 금지, 유럽중앙은행이 회원국 국채 직접 인수 금지 등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어쨌든 마스트리트 조약으로 통화동맹을 위한 기본 틀이 확정된 후, 일찍이 베르너 보고서부터 제안되었던 3단계 경제 통화통합 방안에 따라 1단계 자본거래 자유화(1990.7) → 2단계 유럽통화기구 설립(1994.1) → 3단계 단일통화 도입(1999.1)의 수순을 밟아 1999년 1월 유로화가 탄생하게 된다.

특히 1990년대는 미국의 경제 안정으로 강한 달러를 추구했는데, 이는 유럽 국가들로 하여금 수출 경쟁력을 높여주었다. 그리고 경제성장이 가속화되면서 재정 부담이 줄어들었고 통화동맹에 가입하기 위하여 재정적자를 GDP의 3%로 제한하기로 약속한 시기인 1997년 유럽 국가들은 강력한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이와 같은 1990년대 유럽 경제의 호조건 속에서 비로소 유로가 탄생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런 호조건이 사라지고, 유럽경제가 악조건에 처했을 때 유로 단일 통화가 어떻게 내구성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검증된 것이 없었다는 점이다.

현재 유럽연합 회원국은 총 27개국이며, 유로화를 사용하는 유로통화동맹 가입 국가는 17개국이다.
▲ 연도별 유럽연합과 유로통화동맹 가입 국가 현재 유럽연합 회원국은 총 27개국이며, 유로화를 사용하는 유로통화동맹 가입 국가는 17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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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왜 유로 동맹에 참여하지 않았을까

유로화 탄생의 역사와 관련하여 하나만 더 짚어본다면 영국이 왜 빠졌는가 하는 점이다. 정치, 사회적 측면에서 유럽연합에 대한 영국의 시각을 표현한 개념이 "영국은 유럽과 다르다"는 주권의식으로부터 발전한 유럽 회의론(Euroscepticism)이다. 이 용어는 영국 언론이 1980년대 대처정부와 유럽집행위원회 사이의 각종 대립관계를 보도하면서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런 개념이 영국에서 자리한 배경에는 2차 대전 이후 대륙 유럽 국가들과 영국이 처한 위치가 달랐기 때문이라는 평가도 있다. 즉, 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대륙 국가들의 경우, 전후 복구를 위한 상호협력 및 통합이 절실했으나 영국은 식민지 및 영연방을 통해 전 세계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했으며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도 지속되었던 역사적 차별성이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영국은 국민여론도 통화동맹 가입에 부정적이었고 보수당과 노동당 등 주요 정당들도 모두 부정적이었던 탓에 1999년 1월 유로화 출범에 함께 하지 않았다. 영국이 참여했다면 지금의 유로 존 붕괴 위기는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지만, 이는 확신할 수 없는 일이다. 여하튼 이후 영국은 통화동맹에 가입한다면 최우선 조건은 경제적 이익이라면서 아래의 다섯 가지 경제성 테스트를 통과하면 국민투표를 거쳐 가입을 추진하겠다고 공식 입장을 결정했다.

영국의 유로화 가입위한 다섯 가지 조건
1.영국과 유로지역 국가 경제 간의 지속 가능한 수렴 여부(Cyclical Convergence)
2. 영국경제가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충분한 유연성 보유 여부(Flexibility)
3. 영국에 대한 투자에 미치는 효과(Investment)
4. 영국 금융 산업에 대한 영향(Financial Service)
5. 영국 고용 및 성장에 미치는 효과(Employment and growth)

그리고 2010년 이후 유로지역에서 국가채무 문제가 불거지면서 초기에 방관자적 입장을 보이던 영국은 위기가 심화되고 영국마저 위기의 반경 안에 들어오면서 적극적인 발언을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프랑스와 독일이 주도하는 금융 거래세(일명 토빈세)에 대해 미국과 함께 강력히 반대하고 나서면서 갈등이 증폭되기도 했다. 유럽에서 금융거래세의 신설은 국제 금융의 중심지인 런던시티에 상당한 타격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안은 특히 2011년 10~12월 사이에 유로권과 영국 사이에 첨예한 대립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럼에도 "영국은 유럽을, 유럽은 영국을 필요로 하는" 관계는 여전하며, 이는 영국의 대 유로권 수출 비중이 45~50%, 수입 비중이 35~40%에 이를 만큼 강한 무역 관계를 갖고 있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어쨌든 영국은 이미 선진국 가운데 유일하게 더블 딥에 들어가기 시작했고, 유로 지역은 올해 마이너스 성장이 확실시 될 만큼 공히 경제가 위축 국면에 들어가고 있는 상태다. 경기회복을 위한 공조가 절실한 상황이다.

1999년 1월 유로 지역 국가들은 유로라고 하는 새로운 공동 화폐를 탄생시켰다. 환율 안정에 따른 역내 금융시장의 통합, 역내 무역의 활성화 등으로 인한 회원국들의 경제 성장과 경제적 차이의 수렴을 기대하면서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았다. 아이켄그린이 표현했던 "하나의 시장 하나의 통화(One Market, One Money)"의 거대한 희망에 부풀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확히 10년 만에 유로의 위기가 시작될 것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새사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김병권 기자는 새사연 연구원입니다.



태그:#유로존, #유럽연합, #유로통화동맹, #유로존 위기, #유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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