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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식민지 시대를 연구하다 보면 너무도 처절하고 가슴 아픈 죽음이 많다. 민족과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을 발굴하다 보면 옷깃을 여미게 된다. 여기에 소개하는 애국지사인 신명균의 경우도 그렇다.


신명균(申明均,1889-1940, 호는 주산(珠山))은 한말과 일제시대에 저명한 국어학자와 교육자였지만, 일제말기 자살로 삶을 마감하였기에 그의 행적이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지기 전인 1940년 양력 11월 20일 그는 자결하였다. 조선어신문조차 없어진 일제말기라는 상황과 국어학자들의 무관심 때문에 일제에 항거한 그의 고결한 삶과 투쟁은 해방 뒤 지금까지 묻히게 되었다.

 

평산 신씨 종친회 방문하였으나 찾기 어려워

 

그의 후손도 살기가 어려워서 그랬는지, 신명균에 대해 독립유공자로 신청도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필자는 그의 삶과 업적을 연구한 당사자로서 반드시 복권시켜 드리려고 한다. 평산 신씨 종친회를 방문하여 그에 대해 알아보았으나, 찾기가 어렵다는 대답만 확인하였다.

 

이 글을 읽는 독자 가운데 신명균의 직계 후손이나 친척 분들이 계시면 저에게 쪽지를 보내주기를 바란다. 신명균의 공적에 대해 대한민국에서 정당하게 평가하여, 그의 후손이라도 그를 대신하여 포상을 받도록 필자가 도와주려고 한다.


신명균은 서울 출신으로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육자의 삶을 시작하면서 한글 연구와 보급 활동을 하였다.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할 무렵인 1911년 그는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을 만나 한글을 배우면서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 동기생으로 최현배, 권덕규, 김두봉, 이병기, 장지영 등이 있었다. 1913년 3월에서 1914년 4월까지 신명균은 조선어강습원 초등과 강사로써 활약하였다.


그는 1914년에서 1922년까지 8년간 뚝섬공립보통학교에서 교원으로 있었다. 1927년에는 보성전문학교에서도 조선어를 강의하였다. 이후 1930년에서 1934년까지 동덕여고보에서 근무하면서 조선어과목을 가르쳤다.


주시경 사후 그는 동료들과 조선어연구회, 조선어학회를 조직하여 스승 주시경의 유지를 계승하였다. 1920년대에 들어가 그의 한글 연구는 조선어연구회의 조직(1921)과 함께 맞춤법과 한자음 표기에 집중하였다. 아울러 조선어사전편찬회(1929)에서 사전편찬의 상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조선어연구회의 월례회에 참여하였고, 한글 강연과 동인지 <한글>을 발행하는 등 한글 보급 운동을 적극적으로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업적 때문에 1930년에 동아일보는 우리말글 공로자 가운데 한 분으로 선정하여 소개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가 신명균은 조선어학회에서 한글의 통일과 보급에 중추적인 활동을 하였다. 조선어학회의 핵심인물로 이극로, 최현배, 이윤재 그리고 신명균을 들 수 있다. 1대 간사장 이극로의 뒤를 이어 2대 간사장을 그가 맡았다. 일제에 맞선 그의 언어독립투쟁은 조선어학회사건 예심종결결정문에도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신명균은 조선어학회가 추진한 한글맞춤법 통일안 제정위원으로서, 이의 완성을 위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관여하였다.

 

조선어학회 한글 맞춤법 통일안 대중에게 보급...<조선어철자법>편저로

 

맞춤법 통일안의 내용을 바탕으로 그는 우리말 문법책인 <조선어문법>(1933, 총98쪽)이라는 책을 발행하였다. 아울러 그는 조선어학회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대중들에게 보급하고자 <조선어철자법>(중앙인서관, 1934. 총77쪽)을 편저로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조선어학회가 만든 한글 철자법을 널리 배울 것을 강조하였다.

 

조선어학회의 철자법 통일안이 조선총독부측의 언문철자법 보다 과학적이고 실용적이며 완벽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후에도 그는 후배 국어학자인 정열모와 우리말본을 함께 짓자고 약속했다고 한다. 그가 지으려고 한 우리말 문법책은 독립국가에서 사용되는 <국어문법>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조선어학회가 추진하던 우리말의 표준어 제정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표준어 사정위원으로 활동하여 표준어의 제정에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작업은 민족어의 규범을 수립하는 일이었다. 아울러 그도 한글강연과 강습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조선어학회의 기관지 <한글>을 1932년에서 1934년까지 편집하고 간행하는 업적도 남겼다. <한글>지의 원고를 조선총독부의 도서과에 제출하여 검열을 받아야 했는데, 일제는 자신들을 비판하는 내용이 있으면 붉은 잉크가 사용된 펜으로 지우거나 고치도록 쓰고서 되돌려 주었다. 검열을 받은 원고를 고쳐 인쇄하여 다시 납본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고통을 그는 묵묵히 이겨내었다. 평소에 그는 후배 국어학자인 정열모에게 "왜놈 망하는 것 보고야 말겠다고 말끝마다" 하였다고 한다.(정열모, 「네분을 생각함」, <한글>, 1946, 5, 63쪽.)


이처럼 그는 일제시대에 합법적 공간을 이용하여 19년 동안 한글운동이라는 문화투쟁을 전개하였다. 조선어학회의 한글운동은 우리민족의 말과 민족문자인 한글을 연구·정리·보존하여 민족과 민족성을 영구적으로 유지하려는 운동이었기에, 이 운동은 항일투쟁이요 언어독립운동이었다. 이 운동에 그가 핵심인물로 활동하였던 것이다.


한편으로 <조선역사>(1931)라는 우리나라 역사책을 저술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신명균은 한국의 최근세사를 대원군의 집권 이후부터 기술하면서 을사늑약 이후 의병과 애국지사들의 저항을 높게 평가하였다. 특히 이등박문을 사살한 안중근의 의거 및 총리대신 이완용을 칼로 찌른 이재명의 의거를 자세히 기술하였다. 송병준, 이용구 등 매국노에 대해서도 신랄히 비판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1930년대 초반 동덕여고 교원시절에는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인 이관술과 함께 학생들의 동맹휴학투쟁을 지원해주었다. 맹휴투쟁을 이끌었던 이효정은 필자에게 동덕여고보 1학년 때는 이윤재, 2학년 때는 백남규, 3·4학년 때는 신명균으로부터 조선어 교육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이관술과 신명균 교사는 민족에 대한 인식이 다른 교사와 달랐다. 이관술과 신명균 선생이 동맹휴학을 지원해주었다. 특히 신명균 교사는 인정스럽고 감명 깊었다. 조선어 과목 시간에 교과서에 없는 문인의 글을 신명균 선생이 이효정 자신에게 등사해서 가지고 오라고 해서 그것을 가지고 수업하기도 하였다. 신명균과 이윤재 선생을 존경한다"라고 증언하여 주었다.(「필자와 이효정님(96세, 1912년생)과의 대화」(2008, 5, 19, 오후 5시 30-6시 30분)

 
이효정 "신명균 교사는 인정스럽고 감명 깊었다"
 

이효정은 2006년 8월 15일 광복절날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건국포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1933년 서울 종연방직 제사공장 파업활동 및 노동조합에 가담하여 반제운동을 하였고, 1935년 모교인 동덕여고에 항일격문을 배포하고 항일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년 1개월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전시파쇼체제기인 1940년에 신명균은 사회주의자인 박헌영·김태준과도 만나 반제투쟁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신명균과 김태준, 두 사람의 관계는 1930년대 중반 이후 <조선문학전집>을 간행하면서 밀접해졌다. <가사집>(1936), <소설집>1(1936), <소설집>2(1937)을 신명균이 편(編)하고 김태준이 교열을 맡았다. 그가 한국의 고전문학작품을 편찬함은 한국 민족의 문화를 영구히 보전하고자 함에 있었던 것이다. 한글 고전의 간행을 통해 민족정신을 고취하고자 한 그의 숨은 의도가 엿보인다.

이상과 같이 가장 비타협적으로 일제에 항거한 신명균이 끝까지 버티지 않고 '왜 자결했는가?'라는 의문이 들을 것이다. 그 의문을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그가 자결로 일제에 항거할 수밖에 없었던 요인으로 첫째, 신명균이 이사·상무이사로 17년간 활동한 조선교육협회를 일제가 1938년 4월 2일 강제로 해산시킨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교육협회는 고학생에게 기숙을 무료로 제공하여 주었고, 전국을 순회하며 교육 강연도 개최하였다. 또한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교육에 치중하여 전조선 문맹의 퇴치를 목적으로 하고 이미 설치된 노동야학이나 농민학원 등에 교과서를 편찬하여 준 사회단체였다.
 
둘째, 조선어학회의 간판을 교체하도록 일제가 강요하는데 가장 분개하였다고 한다. 한글운동을 전개하던 조선어학회에 대해서도 일제는 1930년대 말엽 국민정신총동원연맹에 가맹하라고 압박하였다. 이 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조선어학회도 해산이 불가피하였다. 당시 조선어학회는 외래어표기법의 통일과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마무리 중이었다.
 
이 사업의 완성을 위해 조선어학회는 1939년 2월 6일 임시총회를 열어 국민정신총동원연맹에 들어가기로 하였다. 그래서 조선어학회의 간판도 '국민총력조선어학회연맹'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간판의 교체도 용납할 수 없었던 신명균은 자결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소설가 한설야는 이렇게 서술하였다.
 
"학회도 여러 가지 부득이한 사정으로 마침내 간판을 떼지 않으면 안되었다. 안민(신명균을 지칭 : 필자)씨는 그때도 그대로 서울에 남아 있었으나 그때부터 모진 신경쇠약에 걸려 오래도록 고생하였다. 그가 그전 학회 집으로 찾아가서 목을 메려다가 그 집 사람들에게 들켜 경찰에까지 갔다가 나온 것도 그때였다."(한설야, 「두견」, <인문평론>, 1941, 4, 163-164쪽.)
 
죽음으로 일제에 저항한 신명균의 민족애를 계승하여 이극로 등이 조선어사전 편찬을 완성시켰다.
 

한설야는 신명균에 대한 당대의 평가를 ① 손에 책을 놓지 않는 금세의 군자 ② 백이숙제 같은 양반 ③ 청빈한 선비 ④ 결곡한 지조를 가진 사람 ⑤ 서울 교육계의 의표(儀表)로 기술하였다. 이로써 우리는 신명균의 삶과 업적이 당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기에, 후배 지식인인 한설야에게 소설의 주인공으로 기술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셋째로, 일제의 창씨개명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자결을 실천하였던 것이다. 1940년에 접어들자 일제는 창씨개명을 강요하였다. 같은 해 2월부터 8월 10일까지 신고하도록 다그쳤다. 조선민중의 징병·징용을 손쉽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횡포에 항의하여 죽음을 선택한 인사도 있었다. 이들 인사 가운데 신명균도 들어갔다.

 

"일제가 한국 민족의 언어와 민족문자인 한글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더 나아가 성과 이름까지 못쓰게 하여 한국민족을 영구히 말살하였기에, 신명균의 비분은 말할 수 없었다. 이것이 그가 자결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조건이었다.

 

1942년 10월 일제가 탄압한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지기 전인 1940년 양력 11월 20일 그는 자결(51세)하였다. 필자는 최근 그의 활동을 연구하다가 새로운 자료를 접할 수 있었다. 이에 학계에 소개한 바가 있다."(박용규, 「일제시대 한글운동에서의 신명균의 위상」, <민족문학사연구>38호, 민족문학사학회, 2008, 12.)

 

그의 죽음에 대해 우파든 좌파든 모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관술(李觀述, 1902-1950)은 "연전(年前) 일제의 모욕적인 창씨제도에 반항하여 자살해버린 신명균씨 선생이 있었다. 그는 일생을 양심적 민족주의자로서 마쳤거니와 또 내가 안 단 하나의 철저한 반일적 민족주의자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맹휴투쟁에 있어 신 선생은 사상의 차이를 조금도 느낄 수 없는 진정한 협동자이었고, 열렬한 반일투쟁의 지도자이었다."(이관술, 「반제투쟁의 회상」(상), <현대일보>, 1946, 4, 17.)

 

죽기 하루 전날 신명균은 후배 작가인 홍구(洪九,1908-?)에게 "조선어사전편찬을 속히 해야겠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와 대화를 나눈 작가 홍구는 신명균이 참으로 피눈물이 나는 자결을 결심하였다.

 

"선생은 젊은 세대를 사랑할 줄 아시었다. 또한 나아가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실 줄도 아시었다. 우리는 사부같이 대하며 동무같이 대하였다.

 

선생의 결백과 질소(質素)함과 강한 의지에 우리는 배움도 많았다. 선생의 강직함은 날로 날로 빈한만 갖다드리었으나 조금도 굴함이 없었다. 일본제국주의 야만적 정치는 조선으로 하여금 영원한 노예화를 목적으로 언어와 성명을 박탈하였다. 그때 선생의 비분은 말할 수 없었다. 이것이 선생이 자결하시든 직전의 사회적 사건(事件)이었다."(홍구, 「주산선생(珠汕先生)」, <신건설>, 1945, 12.)

 

김오성(金午星, 1908-?)도 "씨(이관술 : 필자)의 맹휴투쟁을 이해해주고 협력해준 사람은 저 민족적 치욕이던 창씨제도에 반항하여 자살해버린 양심적 민족주의자 신명균씨 단일인이었다고 한다."(김오성, 「이관술론」, <지도자군상>제1권, 대성출판사, 1946, 168쪽.)라고 기술하였다.

 

신명균이 서거한 얼마 후에 전해서 들은 내용을 이헌구(1905-1982)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면서, 그가 민족적 지조를 고수하려고 자결하였다고 기술하였다.    

 

"1940년 8월 10일을 기하여 창씨개명의 마지막 마감하는 날이 되기도 했다. 그 사이에 신사참배도 있었고 지원병제도 있었고 그리고 머리를 빡빡 깎고 소위 국민복을 강제착용시키는 전시체제를 마련해갔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숨 막힐 듯한 나날이 지나갔다. 모두 허수아비 아니면 산송장으로 살아가야 할 이 백의민족! 이렇게 신선생의 생각은 외골수로만 몰아쳐졌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드디어 1941년 어느 날 자결하고 말았다."(이헌구, 「환산과 신명균」, <사상계>, 1965, 1, 295-296쪽.)

 

을사늑약에 항거 자결한 조병세·민영환 포상...그의 공적도 뒤지지 않아

 

우리민족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던 일제에 항거하고자 그는 자결하였던 것이다. 유서를 남기지는 않았지만, 그의 죽음이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다. 그래서 당대의 여러 사람은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반항하는 차원에서 그가 자결하였다고 평가하였던 것이다.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자결한 조병세와 민영환은 각각 1962년에 '대한민국장'에 포상되었다. 신명균의 공적도 이들에 뒤지지 않는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조선어학회를 이끌어간 이극로는 신명균에 대해 "조선어학회의 초기부터 중진으로서 여러 학교에 계시는 한편 출판사에 관계하여 한글의 정리와 보급을 위해 몸을 바치신 분이다. 신 선생의 성품이 강직하고 굳센 분이라 무슨 일이나 뜻한 일을 끝까지 이루는 실행가이다. 그의 공로는 후세의 학도들에게 남김이 많을 것이다."(이극로, 「이미 세상을 떠난 조선어학자들」, <경향신문>, 1946, 10, 9.) 라고 높게 평가하였다.

 

신명균은 비타협 민족주의자로서 한평생을 살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민족국가에서 사용할 국어문법과 철자법의 완성을 위해 헌신하였다. 우리나라를 강탈하여 말과 글과 이름과 성명까지 박탈한 일제에 항거한 애국지사 신명균에 대해 이제라도 정부는 제대로 평가해 주기를 바란다.


태그:#신명균, #조선어학회, #이관술, #조선어문법, #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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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한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과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와 한글학회 연구위원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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