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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각시탈>의 기획 의도를 설명하는 드라마 홈페이지.
 MBC <각시탈>의 기획 의도를 설명하는 드라마 홈페이지.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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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말부터 방영되고 있는 KBS <각시탈>은 꼭 쾌걸 조로 같은 드라마다. 각시탈을 쓴 히어로가 출현해서 일본제국주의자들과 그 앞잡이들을 처단하고 사라지는 내용이다.
각시탈의 등장에 대한 드라마 속 서민들의 반응은 '통쾌' 그 자체다. 그는 일제의 억압에 신음하는 조선 서민들에게 구세주 같은 존재다.

<각시탈>을 보면서, 내심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일제 식민통치 덕분에 한국이 근대화되었다고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논리대로라면, 드라마 속 서민들은 각시탈을 냉담하게 대해야 마땅하다. 일본 덕분에 근대의 광명을 본 백성들이라면, 각시탈 앞에서 열광할 리가 없는 것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일본이 한국에서 철도도 연장하고 공장도 세운 것을 높게 평가한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외국을 점령한 뒤 그 정도 투자도 하지 않은 나라는 없었다. 정복지를 자기 입맛에 맞게 개조하려면, 그 정도의 노력은 당연한 일이다.

백성들, 왜 각시탈 앞에서 열광할까

기원전 108년, 중국은 이 땅에 한사군을 설치했다. 네 개의 군(郡) 중에서 임둔군과 진번군은 설치 26년 만인 기원전 82년에 철폐되고 말았다. 낙랑군과 현도군도 한민족 토착세력에게 실질적 통치권을 내준 채 상징적 지배에 만족해야 했다. 그만큼 한민족의 저항은 매우 거셌다.   

한민족이 중국의 '식민통치'를 거부한 것은 왜일까? 일본처럼 철도도 안 늘려주고 공장도 안 세워줬기 때문일까? 일본이 36년간 한국에서 했던 일. 그 정도는 중국도 하고 갔다. 한사군에 도로도 뚫고 성곽도 축조했던 것이다. 도로를 뚫은 것은 중국 관리나 군대가 신속히 왕래할 수 있도록 함과 동시에 한사군의 물자를 안정적으로 추출하기 위해서였다. 성곽을 세운 것은 '중국 총독부'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일들이 한민족을 위한 것이었다면, 한민족이 한사군을 몰아내기 위해 그처럼 격렬히 싸웠을 리가 없다. 이런 일들이 중국의 이익을 위한 것임을 알았기에 목숨을 걸고 투쟁했던 것이다. 이런 일은 한사군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똑같이 일어났다. 중국은 자국 군대가 점령하는 곳마다 도로를 뚫고 성곽을 신축했다.

이렇듯, 어느 나라든지 간에 남의 땅을 점령하면 어느 정도는 손을 보기 마련이다. 이런 사실을 무시한 채, 일제가 철도를 늘리고 공장을 세운 사실 등을 근거로 그들의 식민통치를 미화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침략행위를 죄다 미화해야 할 것이다.

떼강도가 남의 집을 점거한 뒤 자기네 편의를 위해 집안 곳곳을 손보았다면, 이것이 과연 집주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가? 잘 고치든 못 고치든 간에, 남의 집을 맘대로 고친다는 것 자체가 재산권 침해인 것이다.  

각시탈을 출현을 환영하는 조선 서민들.
 각시탈을 출현을 환영하는 조선 서민들.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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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36년이 한국인들에게 이로웠는지 해로웠는지를 판단하는 최선의 방법은, 당시의 한국인들이 일제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렸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일본이 한국을 삼킨 지 '불과' 9년 만인 1919년, 전 세계가 깜짝 놀랄 만한 일이 발생했다. 맨손에 태극기만 든 한국인들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일본 Go Home!"을 외쳤다. 식민통치를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다. 식민당국이 총칼을 휘두르는데도, 이 운동은 수개월간 전국 방방곡곡에서 계속됐다.

그 9년간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그렇게 했을까? 그 9년간 서민생활이 조금이라도 개선됐다면, 유관순 같은 어린 소녀들이 목숨 걸고 총칼에 대항할 수 있었을까? 어린 소녀들까지 분노를 느낄 정도였다면, 일본이 얼마나 악질적이었는지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먹고사는 데 지장 없는데도 개혁이나 혁명을 꿈꾸는 지식인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서민들이 개혁이나 혁명을 꿈꾼다면, 그것은 거의 다 먹고사는 문제 때문이다. 표면적 구호가 어떻든 간에 서민들이 태극기나 촛불 같은 비폭력적 도구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오는 것은 대개 다 그런 이유 때문이다. 1919년 당시의 한국인들도 일본 밑에서는 도저히 먹고살 길이 없어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3·1운동 이후에는 사정이 달라졌을까? 대답은 명확하다. 일제 36년간 한국인들의 삶이 조금이라도 개선됐다면, 1945년 8월에 온 나라 백성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그토록 목청껏 만세를 부를 수 있었을까? 당시 일본은 미국에만 항복했을 뿐, 여전히 한반도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한국인들이 일본의 패망을 보고 감격에 겨워 거리로 뛰쳐나온 것은 그만큼 일본이 싫었기 때문이다.

일본이 인심을 얻지 못한 것은 그들이 한국인의 생활수준을 개선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이 일본의 덕을 조금이라도 봤다면, 해방 70년이 다 된 지금까지도 대부분의 한국인이 '일본' 하면 치를 떠는 이런 현상이 과연 생길 수 있을까? 일제 36년의 성적표를 작성하는 데 이보다 더 확실한 참고자료가 어디에 또 있을까?

<목포의 눈물>, <목포의 환희>가 될 수 없었던 이유

목포항. 사진은 일제에 강점되기 이전의 모습.
 목포항. 사진은 일제에 강점되기 이전의 모습.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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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한국인의 행복을 증진시키지 못했다는 점은 목포 사람들의 태도에서도 잘 드러난다. 목포는 군산과 더불어, 일본이 심혈을 기울인 중점 도시였다.

일본은 군산을 통해서는 한국의 쌀을 착취하고, 목포를 통해서는 한국의 면화를 착취했다. 그것을 기반으로 일본은 산업을 발달시키고 세계적 강국으로 성장했다. 목포는 이 같은 목적을 위해 일본이 전략적으로 육성한 도시였다.

일본이 목포를 전략적으로 육성했지만, 그것이 목포 사람들에게 득이 되었을까? 만약 목포 사람들에게 떡고물이라도 좀 떨어졌다면, <목포의 눈물> 같은 노래가 과연 나올 수 있었을까?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으로 시작하는 <목포의 눈물>은 설움과 원한의 노래다.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란 표현은 일본 밑에서의 삶이 그만큼 원통하고 애달팠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총독부가 이 부분을 문제 삼아 금지곡 지정처분을 내린 것은, 이 곡에 담긴 '불온한 기운'을 자기들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1910년대 목포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면, 일본이 누구를 위해 목포를 개발했는지가 확연히 드러난다. 유달산 노적봉을 경계로 한쪽에는 무질서한 흙길에 초라한 초가집들이 늘어섰고 한쪽에는 반듯한 도로에 깔끔한 기와집들이 즐비하다. 어느 쪽이 조선인 거주지역이고 어느 쪽이 일본인 거주지역인지를 굳이 설명해야 할까.

인기 대중가요는 서민들의 정서를 반영한다. <목포의 눈물>이 인기를 끌었다는 것은 목포 사람들이 일제에 대해 한을 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일본제국주의가 목포 사람들의 삶을 개선시켰다면, <목포의 눈물>이 아니라 <목포의 환희>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노적봉 밑에서 원한을 품기는커녕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었을 것이다. 일본이 가장 공을 들인 목포에서도 반일감정이 강했다면, 여타 지역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일본 밑에서 고통 밖에 느낀 것이 없었다. 한국인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단지 이민족 지배자라 해서 미워한 게 아니라, 자신들에게 못되게 구니까 미워했던 것이다. 현대 한국인들이 각시탈 같은 존재에 대해 여전히 열광하는 것은, 그 시절의 고통이 DNA 속에서 아직도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그:#각시탈, #식민지 근대화론,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목포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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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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