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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강>의 표지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강>의 표지
ⓒ 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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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은 고등학교 시절 국사 시간에는 북학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문학 시간에는 <열하일기><호질><허생전> 등의 작가로서 접해왔다. 그래서 박지원이 나오는 시험 문제들을 볼 때마다 '아, 또 나왔네'라는 생각과 함께 다방면의 과목에서 등장하는 그를 보며, 박지원의 삶이 어떻기에 이렇게 후대까지 여러 방면에 영향을 미치는지 궁금하기도 했었다. 고등학교 때의 단순한 궁금증은 시간이 지나 잊히게 되었지만, 그 궁금증은 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을 접함으로써, 그리고 거기에 들뢰즈의 개념을 접목함으로써 풀릴 수 있었다.

'홈 패인 공간'과 박지원

국사 교과서에서 그림으로 봤던 약 300여 년 전의 인물인 박지원은 무섭고, 엄격하며 고지식한 인물의 전형일 거라고 생각한 나의 선입견 속에서 자랐다. 그런데 이것은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한 어리석음이었다. 고미숙이 전하는 박지원은 내 생각과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그의 삶은 유머의 연속이었다. 고지식한 인물이 아닌 유희 하는 인간, 호모루덴스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박지원은 조선 후기 권력의 핵심부인 노론 경화사족의 일원이었다. 명문가의 자손이었던 그는 처음에 중앙정계로 진출하여 세상을 경륜하고자 하는 조선 시대 사대부들의 코스를 그대로 밟아 나갔다. 여기서 들뢰즈의 개념을 인용하자면 이러한 입신양명의 길은 '홈 패인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홈 패인 공간은 말 그대로 홈이 패져있는 길이다. 어떤 사람이 한 길을 가면, 다음에 이어지는 사람들도 그 앞사람과 똑같은 길을 간다. 이런 식으로 어느 특정한 길이 파여진다. 그리고 이것은 짜인 방식대로만 살아가는 인간의 획일적인 성향을 나타내는 표식이 된다.

고을을 다스리는 그의 통치철학은 지극히 단순명료하다. 첫째, 비록 내일 당장 그만두고 떠날지라도 늘 1백 년 동안 있으면서 그 고을을 다스린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면,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해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어야 한다. 둘째, 그러나 "뜻에 맞지 않는 바가 있으면 헌신짝 버리듯 흔쾌히 그만두어야 한다." 요약하자면 머무름과 떠남에 집착과 주저함이 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 (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92p)

박지원도 홈 패인 공간 속에 흡수되려고 했지만, 웬일인지 그의 몸과 정신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로 인해 그는 불면증과 거식증을 동반하는 우울증에 걸리게 된다. 몸이 천성적으로 획일적이고 갇혀있는 삶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한 박지원의 방법 또한 주류에서 벗어나 있다. 명의를 찾아 몸을 의탁하는 것이 아니라 저잣거리에 떠도는 이야기들을 글로 옮기는 일을 하면서 병을 치료한다. 시정에 떠도는 유머를 통해 마음을 수양하는 것이다. 이런 연암의 유머애(愛)가 잘 드러나는 그의 저서가 있다.

'리좀'과 박지원

연암 박지원의 유머애(愛)와 유머본능이 가장 잘 드러나는 책이 바로 열하에서 다녀온 뒤 집필한 기행문집,<열하일기>이다. 한자투성이의 어렵고 재미없는 책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열하일기>는 사실 그렇지 않았다. 고미숙의 책에 발췌된 <열하일기>는 유머를 머금고 있는 문장들로 가득했다. 그 문장들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유머집을 보는 것처럼 웃음이 피실피실 새어나오곤 했다.

그런데 박지원의 문장에는 단순히 유머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연암의 문장은 어떤 한 가지로 수렴될 수 없는 '리좀'같은 것이다. 리좀 역시 들뢰즈의 개념으로 덩이줄기라는 뜻을 가진다. 이는 연암의 문체를 가장 잘 표현하는 개념인데, 뿌리라는 중심이 없기에 목적도 방향도 없이 접속하는 대상에 따라 자유롭게 변이하는 특성을 의미한다. 열하 여행을 통해 보고 들은 대상이 무엇이든 연암은 자신만의 스타일로 느낌을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유머가 녹아들면서 문장은 한결 부드러워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 그의 리좀은 독자의 뇌리에 강하게 박힌다.

고미숙, 박지원, 들뢰즈의 삼각 구도

'홈 패인 공간'과 '리좀'의 개념을 제시한 들뢰즈가 있고 그 개념과 같은 삶을 살았던 연암 박지원이 있다. 그리고 연암의 삶을 파헤쳐 들뢰즈의 개념과 연관 지어, 새로운 관점으로 연암을 바라보게 한 고미숙이 있다. 이 세 명이 형성하는 트라이앵글은 세 명 모두에게 서로 영향을 주고, 그 영향은 다시 우리에게 이 모든 개념을 아우르며 배울 수 있게 해준다. 그런 점에서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은 고미숙, 박지원, 들뢰즈 이 삼각 구도를 모두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책이다.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고미숙 지음, 그린비(2003)


태그:#열하일기, #박지원, #고미숙, #들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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