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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슈퍼맨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어디선가 나타나 우리를 구해 줄 거라 믿었다. 이 '슈퍼맨 신드롬'은 현실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안철수 교수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로 그렇다.

정치인은 물론 정당들도 나서 서민을 위해 일한다지만 팍팍해진 살림살이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세계 경제 대국 10위에 감춰진 현실은 초라하기만 하다. 계층 간 소득분배가 얼마나 공평하게 이루어졌는지를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1990년대 말 잠시 하락했다가 오늘날까지 꾸준히 증가한다.

그렇다면 안철수 교수는 기존 정치인들과 달리 우리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한 답은 <정치의 몰락> 저자 박성민 정치 컨설턴트의 말로 대신한다.

"안철수 현상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도래를 예고하는 상징일 뿐, 안철수 현상이 안철수 시대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정치의 몰락>은 프레시안 강양구 기자가 묻고, 박성민 정치 컨설턴트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짜인 책이다. 저자의 말대로 책 제목은 역설일 뿐이다. 안철수, 박원순 현상에서 보듯 우리는 지금 '87년 체제'처럼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느냐 하는 역사적인 전환기에 있다. 그러나 그 변화는 외부에서 인기인을 모셔오는 이벤트가 아닌 '제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게 이 책의 핵심이다.

정치의 몰락
 정치의 몰락
ⓒ 서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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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맨 신드롬'을 통해 나타나는 민심은 확실하다.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은 '대안'이 아니라는 얘기다. 한국개발연구원이 지난 2006년 발표한 '사회적 자본 실태 종합조사'를 보면 정당과 국회를 포함한 대의기관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을 드러낸다. 교육기관과 시민단체가 5.4점, 언론과 군대가 4.9점을 얻었으며, 이어 대기업 4.7점, 경찰 4.5점, 검찰 4.2점 등의 순이었다. 그러나 정당과 국회는 각각 3.3점과 3점에 불과했다. 그만큼 정당의 위기는 심각한 수준이다.

저자는 그 배경을 두고 한국 정당에는 '동지'는 없고, '동업'만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대통령 후보의 자격을 논할 때 당의 비전에 맞는지, 지지자의 이해관계를 떠안을 자격이 있는지는 뒷전이다. 오로지 당선 가능성만 생각한다. 대통령에만 당선되면 당에 소속된 국회의원, 관료, 직원들은 장, 차관을 비롯해 수많은 자리를 꿰찰 수 있기 때문이다.

정당이 '이익집합'으로 변질해 가는 사이 정치의 본질은 잊혀 간 지 오래다. 정치의 본질이 어젠다(Agenda)를 넌어젠다(Non-Agenda)로 바꿔 갈등을 해결하는 데 있지만, 한국 정치는 오히려 정반대다. 공직의 안정성을 위해 '임기'를 보장해 놓고선 정권이 바뀌면 임기를 지키려는 사람을 쫓아내고, 국회에서 최루탄을 던지는 등 '트러블메이커'를 자처한다.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다수와 소수의 이해관계는 대립하기 마련이고, 그것을 각각 대변하는 정치인들이 대화와 타협을 통해 갈등을 해소하는 과정이 중요하지만, 이는 무시되기 일쑤다. 대신 '다수결의 원칙'이 최선이라고 믿을 뿐이다. 끝날 줄 모르는 한미 FTA, 제주 강정마을 논란도 다수결을 내세운 정치의 부작용이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인가. 바로 '법과 제도'에 의한 비가역적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안철수 교수든 또 다른 누구든, 개인의 힘으로 변화를 만들어 내기란 어렵다. 즉 우리가 기다리는 슈퍼맨은 '인기'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구조적인 틀의 변화를 통해 이전의 시스템으로 되돌아가지 못하도록 패러다임을 바꿀 때 가능하다.

그래서 나온 게 '75% 민주주의'다. 저자는 "한국 사회에서는 적어도 75퍼센트 이상이 동의해야 승복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2008년 촛불 집회를 전후한 여론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71%(한국사회여론연구소 2008년 4월 28일 조사)로 높았던 게 대표적이다. 김영삼 대통령 취임 첫해 실시한 금융실명제도 마찬가지다. 기득권의 저항이 만만치 않은 파격적인 조치였지만, 역풍은 미미했다. 당시 국민의 78.6%가 찬성한 까닭이다.

지난 달 22일 치러진 프랑스 대선 1차 투표에서 사회당의 프랑수와 올랑드 후보와 대중운동연합(UMP)의 니콜라 사르코지가 각각 1위과 2위를 차지했다.
 지난 달 22일 치러진 프랑스 대선 1차 투표에서 사회당의 프랑수와 올랑드 후보와 대중운동연합(UMP)의 니콜라 사르코지가 각각 1위과 2위를 차지했다.
ⓒ CNN 방송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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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 위해 우선 40퍼센트짜리 대통령이 나올 수밖에 없는 현재의 대통령 선거를 고쳐야 한다. 프랑스의 '결선투표제'는 우리에게 본보기가 될 만하다. 결선투표제는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가 없으면 1, 2위 후보들을 두고 결선 투표를 한다. 프랑스가 투표를 두 번이나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한 것은 대다수가 '수긍'하는 대표를 만들기 위함이다.

이렇게 되면 결과를 놓고 연정 제안도 가능해진다. 가령, 지금 프랑스 대통령 결선에는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 후보와 니콜라스 사르코지가 올라갔지만 3위를 차지한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의 표도 무시할 수 없다. 3, 4위의 표를 가져오기 위해 이들은 정책 연대를 하는 등 손을 내밀 수밖에 없다. 저자는 "지금처럼 누구도 예측하지 못할 불확실한 선거 결과를 예상해서 '결과를 위한 연대'를 이끌어내는 데 불필요한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각자가 최선을 다한 다음에 그 결과를 가지고 연대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말한다.

국회의원 제도도 손질이 불가피하다. 한 지역구에서 1등만 선발하는 방식을 벗어나 제도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정당명부비례대표제의 확대가 75%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선거제도를 바꾸는 힘을 가진 국회의원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확대를 찬성할 리 없다. 따라서 저자는 "일정의 지역에서 복수의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87년 체제'가 성공했던 것은 학생, 시민, 노동자가 들고일어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런 변화의 압력 속에서 대타협을 했고, 그 결과물로 새로운 헌법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제도'가 중요하다. '75퍼센트 민주주의'를 달성하기 위한 제도 변화가 선행돼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가 슈퍼맨을 바라는 가장 큰 이유는 지금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희망'을 찾기 위한 것이었듯, 제도 변화가 선행된다면 지금이라도 슈퍼맨은 언제든 나타날 수 있다. 그러니 '슈퍼맨 신드롬'은 만화 속에나 나오는 얘기라고 슬퍼할 필요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책 뒷부분에 소개된 지식인 레이먼드 윌리엄스 얘기는 지금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새로운 가능성은.... 운이 좋다고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적극적으로 원해야 이뤄진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책임을 지고, 현실 세계에서 우리가 입증해야만 하는 것이다."


정치의 몰락 - 보수 시대의 종언과 새로운 권력의 탄생

박성민 지음, 강양구 인터뷰, 민음사(2012)


태그:#정치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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