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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2012 총대선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선거철만 되면 기묘한 일들이 벌어진다. 영국 작가 조지 엘리엇도 말했다.

"선거가 다가온다. 우주의 평화가 선포되고, 여우들은 진지하게 닭의 만수무강을 기원한다."

사람 사는 현실은 닭·여우 이야기보다 우습다. 기껏 뽑아 놨더니, 지난 4년간 뭐 하다가 이제 '앞으로 국민 마음을 헤아리겠다'느니, '환골탈태하겠다'느니 하는 것일까.

임기 다 끝난 마당에 '앞으로' 잘하겠다니, 이런 코미디가 또 있을까. 지금까지 잘 해왔어도 또 뽑을지 말지 고민할 판에, 못했으니 뽑아 달라는 것이다. 앞으로는 잘 하도록.

'뽑아주세요. 잘 할 때까지.'

정치인들의 몰염치가 되풀이되는 이유

15년간 사용해 온 한나라당 간판을 내리고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2월 16일 여의도 당사 입구에 새 당명 '새누리당' 현판을 걸고 있다.
 15년간 사용해 온 한나라당 간판을 내리고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2월 16일 여의도 당사 입구에 새 당명 '새누리당' 현판을 걸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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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들이 이런 몰염치를 되풀이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간단하다. 이런 짓이 통하기 때문이다. 임기중 유권자에게 코빼기 하나 안 비치고, 그들의 다급한 절규를 귀에서 윙윙거리는 '날파리' 소리만큼도 안 여겨도, 선거에 임박해 비장하게 고개를 숙이고 손을 내밀면 다시 표를 얻는 것이다.

이쯤 되면 처절한 참회극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서라도 임기중 말아먹는 게 필수일 것 같다. 그래야 '환골탈태'의 기회를 얻을 테니 말이다. 해볼 만한 장사 아닌가. 몇 년간 배를 두드리다가 다음 선거가 다가오면 몇 주 납작 엎드려 읍소하는 것이다.

게다가 요즘은 '환골탈태'가 좀 간편한가. 홍보회사에 의뢰해 로고와 상징색을 바꾸고, 당 이름은 공개모집하면 된다. 돈이 좀 들지만, 자기 돈인가. 역시 'CEO 대통령'을 둔 여당답게 전략도 기업스럽다. 영국계 석유회사 비피(BP)가 멕시코만 원유유출로 막대한 환경재앙을 입힌 후 회사 상징을 녹색 꽃모양으로 바꿨듯.

차이가 있다면, 비피는 로고를 바꾼 후에도 계속해서 책임추궁을 당하고 있고,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막대한 기업 이미지 손실을 입었다는 점이다. 한국의 정당은 새 당명과 로고만 바꿨을 뿐인데, 책임을 면하고 다음 선거에서도 '제1당'이 유력시된다고 한다. 범법자가 개명하고 옷 바꿔 입었다고 죄를 용서받는 꼴이다. 이러니 누가 임기중 유권자를 두려워하겠는가. 내가 당명 공모에 참여했다면 이런 이름을 제안했을 텐데.

'수박에 줄 긋는당.'

한국사회의 문제는 문제를 은폐한다는 점

무슨 생각을 갖고 계신 줄 안다. '그 밥에 그 나물이어서 뽑을 사람이 없다'는 생각 말이다. 이런 분노가 제대로 작동해서 아무도 안 뽑히면 좋겠는데, 현실이 어디 그런가. 어느 경우든 '똑같은 놈들' 가운데 하나가 뽑히니 문제다. 그래도 투표를 하면 내가 뽑은 사람이나 뽑지 않은 사람 가운데 한 명이 선출되지만, 포기하면 항상 내가 안 뽑은 사람이 승리한다.

이 글은 '다 똑같다'고 믿는 분을 위한 것이다.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면 선택이 쉽지 않을 것이고, 이런 분들이 겪을 혼란을 다소나마 풀어주고 싶었다. 물론 기권하는 방법이 있지만, 그건 위에서 설명한 '안 뽑은 놈만 뽑히는' 문제 이외에 또 다른 부작용을 낳는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기로 하고, 잠시 이번 총선이 갖는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 보자.

조현오 경찰청장이 9일 서울 미근동 경찰청에서 지난달 수원에서 발생한 20대 여성 살해사건 관련 유가족을 면담한 후 고개숙여 사죄하고 있다.
 조현오 경찰청장이 9일 서울 미근동 경찰청에서 지난달 수원에서 발생한 20대 여성 살해사건 관련 유가족을 면담한 후 고개숙여 사죄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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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를 망설이는 분들조차 느끼고 있듯, 현재 한국사회는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다. 나는 지난해 한국사회의 몰락('불행한 한국, 몰락하도록 놔둘 건가')에 대해 썼다. 사회과학자로서 모국의 파멸을 예견하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글에는 조금의 과장도 담겨있지 않다(이 판단에 동의했는지, 보수언론조차 같은 취지의 글을 써 달라고 부탁해 왔다). 그리고 그 우려는 나 자신도 놀랄 만큼 빠르게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최하위 행복지수에 최고의 자살률, 그리고 최저의 출산율. 끔찍한 사회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다. 또 하나의 재앙이 다가오고 있다. 바로 범죄다. 한국에서 범죄는 무서운 속도로 증가할 것이다."

최근 수원에서 일어난 20대 여성 살인사건이 한국사회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 책임자가 사표를 내거나 문책을 받을 거라고 하고, 이후 경험 많은 사람을 채용해 신고체계를 정비한다는 대안도 나왔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이 문제는 한국사회를 괴롭히고 있는 더 큰 문제와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총선 그리고 우리에게 다가올 '재앙'

최근 발생하는 범죄를 보면 '치안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서민들 사이에서 빈곤율이 늘고 있으며, 이들이 범죄에 노출될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치안 양극화'는 공교육의 몰락이나 철도, 공항 등 공공시설의 영리화와 같은 공공서비스 붕괴의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 부유층은 공권력의 더 큰 관심을 받을 뿐 아니라, 안전한 거주지, 감시카메라, 보안장치, 보안서비스 등을 구매함으로써 치안공백을 메울 수 있다. 하지만 서민들에게는 이런 사치가 허용되지 않는다.

사실 문제를 지적하자면 끝도 없다. 불법 사찰, 사회 양극화, 4대강 보와 다리의 안전, 식수원 오염, 고리 원자력 발전소 사고, 동시다발적 무역협정으로 인한 농업과 산업붕괴 대책, 막대한 국가부채와 가계부채를 보자. 이에 대한 정부여당의 대답은 정해져 있다.

'별문제 없다.'

민간인 불법 사찰의 '몸통'이라고 자처했던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이 지난 3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도착, 취재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민간인 불법 사찰의 '몸통'이라고 자처했던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이 지난 3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도착, 취재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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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들이 심각한 이유는 문제가 존재한다는 사실뿐 아니라, 이 문제에 대해 아무 것도 제대로 밝혀진 게 없다는 점이다. 이 문제들은 은폐될 때까지 은폐되다가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가서 한국사회를 집어삼킬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문제를 객관적으로 진단한 후 합리적인 대책을 세우는 것이다.

이번 총선에서 문제를 덮을 사람을 뽑는다면 한국사회는 재앙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1997년 외환위기를 생각해 보라. 파국 직전까지도 여당과 주류언론 그 어디에서도 경고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대답만 되풀이했을 뿐이다.

'별문제 없다.'

'다 똑같은 놈들'이라고?

지난달 28일(현지시간)부터 6일간 전 세계 공관에서 4.11총선 재외국민 투표가 진행된 가운데, 미국 뉴욕 한국총영사관 투표소에서 투표를 마감한 뒤, 투표함을 개봉해 투표용지가 담긴 회송용 봉투를 확인하고 있다.
 지난달 28일(현지시간)부터 6일간 전 세계 공관에서 4.11총선 재외국민 투표가 진행된 가운데, 미국 뉴욕 한국총영사관 투표소에서 투표를 마감한 뒤, 투표함을 개봉해 투표용지가 담긴 회송용 봉투를 확인하고 있다.
ⓒ 최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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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이든 야당이든 다 똑같다고 믿는 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 정말 '이 놈이나 저 놈이나' 다 똑같다면, '지난 번 뽑아준 놈'이 별로 잘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잘 하라고 뽑아놨는데, '뽑히지 않은 놈'과 별 차이가 없다는 건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선택은 정해져 있다. 둘 모두 긴장시키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뽑힌 놈이 확실히 낫지 않으면 언제든 교체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심어주는 것이다.

투표를 하든 안 하든, 그들이 당신 주머니에서 꼬박꼬박 월급을 빼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들에게 감사는 고사하고라도, 무시는 받지 말고 살아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당신이 투표해야 할 이유다.


태그:#4.11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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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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