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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채플린이 한 말이 있습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고. 저는 아직 인생을 멀리서 보지 못하기에 '아직까진' 비극 실수를 이야기 해볼까합니다. 비록 웃어 넘길 수 있는 실수는 아니지만요.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입니다. 저는 안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죠. 그러다 너무 시끄러워서 깼는데 문틈 사이로 거실에서 부모님께서 싸우고 계신 걸 보게 됐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제가 나서서 말려야 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두 분이 그렇게 화내시는 걸 본 적이 없어서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벌벌 떨면서 잠자는 척을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 두 분은 이혼하셨습니다. 졸지에 저와 여동생은 편부 가정에 속하게 됐습니다. 당시 제가 입은 상처는 꽤나 컸나 봅니다. '그때 내가 나서서 말렸으면 두 분이 이혼이란 선택은 피하지 않았을까'라는 죄책감이 생겼습니다. 그 죄책감은 제가 성인이 될 때까지 하나의 트라우마로 작용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제가 연애를 해보니 '어쩔 수 없는 것이었구나'라며 이해하게 됐고, 곧 극복했습니다. 아마도 제가 이혼가정 자녀 1세대쯤 될 것 같습니다. 당시에 이혼율이 올라간다고 뉴스에서 떠들어댔던 걸로 기억하니까요.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 1학년 때, 어느 날 집에 갔는데 모르는 아주머니 한 분이 저희 집에서 요리를 하고 계셨습니다. 너무 놀라서 "누구세요"라고 묻고 싶었는데, 갑자기 택배가 와서, 누구냐고 묻기도 전에 택배아저씨 앞에서 그분과 친한 척을 했습니다.

처음엔 몇 번 오셔서 요리해주시고 저녁에 집에 돌아가곤 하셨는데, 어느 날부터 집에서 주무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아빠께서 앞으로 그분을 '새엄마'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얼마 뒤에는 '엄마'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

그분은 '아빠의 법'으로 일순간 '엄마'가 되셨습니다. 저와 제 동생의 생각은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저와 동생은 그 분을 그냥 '아빠의 부인'으로 생각했습니다. 저희도 그분을 그리 좋아하지 않으니 그 분도 저희를 안 좋아했지요. 여기서부터는 조금 예민하니까, 말하지 않겠습니다.

자퇴한 나, 엄마는 눈물을 보이셨다

이제 본격적으로 제 실수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저는 고2 때 자퇴했습니다. 당시에 반년에 한 번 엄마를 뵐 수 있었는데, 엄마는 늘 "엄마 없다고 막 나가지 않고 바르게 커 줘서 고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뿐인 아들놈이 뒤통수를 치는 일을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비록 같이 살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엄마인데…, 못난 아들놈이 '허락'이 아니라 '통보'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학교를 자퇴했다고 말씀드렸을 때 엄마는 화를 내시긴커녕 뜻대로 하라며 지지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집으로 돌아갈 때, 결국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제가 자퇴를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습니다. 자퇴를 결심하기 1년 전인 고1 때. 토요일이었습니다. 친구들은 먼저 노래방에서 놀고 있었고, 저는 일이 있어서 조금 늦게 갔습니다. 그런데 들어가니 친구들 표정이 안 좋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봤습니다.

노래방 벽을 의도치 않게 툭툭 쳤는데, 옆방에 있던 다른 학교 일진들이 와서 욕을 하고 때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혼자 화가 난 저는 옆방 문을 확 열고 뭐하는 짓이냐고 소리쳤습니다. 그런데 소리치고 보니 그 방에 6명이나 있었습니다.

'망했다.'

타인을 의심하기 시작하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중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중
ⓒ 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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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전 노래방 밖으로 끌려갔습니다. 6명이서 저를 둘러쌌지요. 협박하고 침 뱉고, 툭툭 건들고…. 어휴. 그래도 친구들이 도와줄 거라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친구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살려줘요!, 살려주세요!"라고 큰소리를 지르며 도망쳤습니다. 세상에. 아무도 도와주지 않더군요. 결국 저는 일진들에게 잡혀 산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러고는 죽어라 맞았습니다. 그러다 노래방에 같이 있던 여자애들이 가장 싸움 잘하는 친구를 전화로 불러서 저를 그 자리에서 구출해냈습니다.

저는 그날 만신창이가 됐습니다. 안와골절이라고 눈을 맞아서 얼굴뼈에 금이 가고, 어금니랑 앞니가 나갔습니다. 실명할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말에 겁먹어서 울기도 하고, 수술에 문제가 생겨서 2차 수술을 했습니다. 앞니는 사기(도자기)로 가치를 맞추고, 어금니는 금니로 씌웠습니다. 제가 이 정도까지 됐으니 밖에서도 난리가 났습니다. 저희 아빠는 고소하겠다고 화를 내셨고, 그 6명은 가증스러운 눈빛으로 저희 집 현관문 앞에서 무릎 꿇고 있었습니다. 그 학생들의 부모님들은 저희 집에 찾아와서 합의 보자고 사정사정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어요. 학교에 돌아왔더니 전교생이 저를 주목했고, 좋은 소문, 나쁜 소문들이 돌았습니다. 결정적으로 가해 학생들이 매일 하굣길에 교문 앞에 서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차마 때리지는 못하고, 매일 저희 집 앞까지 따라왔습니다. "고소하지 말고 합의 보자"고 하면서요. 하지만 그 아이들도 지치는지 한 1주일 정도 지나니 포기하더군요. 아빠는 끝내 합의보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일을 엄마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저를 보면 욕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돼버렸습니다. 학교에 있으면 평소처럼 지내기는 하는데 밤이 돼 하루 일을 생각하면 '그때 누가 내 욕을 했을 거야'라며 불안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명문으로 가는' 학교에서 생긴 불만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중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중
ⓒ 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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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고등학교 2학년으로 올라가면서 학교에 불만이 생겼습니다. 당시 학교 홍보 문구는 '명문'이 아니라 '명문으로 가는'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선생님들 의욕이 넘쳤습니다. '야자'는 분명 야간자율학습인데 야간강제학습을 시키는 것은 기본이었습니다. 담임선생님께서는 학급 분위기가 어수선하다고 학교 뒷산에 애들을 집합시킨 후 엎드려뻗쳐 한 상태에서 몽둥이로 때리곤 했습니다. 얼마나 맞았는지 바지가 허벅지에 눌어붙어 떼지지 않았습니다.

또 한 번은 반 1등 학생이 어쩌다 보니 담임선생님 과목 중간고사를 잘 못 봤습니다. 그래서 담임선생님은 학생을 '명문'으로 보내기 위해 반 학생들 전부 수행평가 점수를 2점씩 올려주셨습니다. 그 학생이 내신 '수'를 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죠. 결국 그 아이는 S대 갔습니다. 저는 그때 학교에 대한 불만을 랩으로 풀었습니다.

"나중에 꼭 위대한 래퍼가 되리 … 랩은 시(詩)다. 그래서 나는 엉터리 시인(Poetaster)에서 줄인 PoeTa다 … 내 랩은 가리온의 정신처럼 한국말로만 가사를 쓰고, 에픽하이처럼 사회비판을 담아내겠다."

노래를 작곡하고, 가사를 쓰고 녹음하고. 이런 오글거림으로 견뎌냈습니다. 적고 보니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되더군요. 결국 못 견디고 고등학교 2학년 2학기 개학하는 날 자퇴서를 냈습니다. 속이 후련할 줄 알았는데 학교 계단을 내려오는데 눈물이 났습니다.

학교를 나오면 좀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제 불만은 더 심해졌습니다. 그리고 결국 은둔형 외톨이가 됐습니다. 게임하고 잠자고, 일어나서 게임하고 잠자고…. 오후 5시 이전에는 나가지도 않았습니다. 왠지 사람들이 '자퇴생'이라고 수근 댈 것 같아서 말입니다. 버스를 탈 때도 현금을 냈습니다. 교통카드 결제할 때 '청소년입니다'라는 알림음이 듣기 싫어서 말이죠.

학교, 집에서 시달리던 나... 탈출을 결심하다

영화 <완득이> 중
 영화 <완득이> 중
ⓒ 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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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폭행으로 후유증이 생기고, 학교와 가정에서 진절머리가 난 저는 탈출을 감행했습니다. 집안사람들 몰래 박스를 구해서 짐을 싼 것이지요. 그리고, 그 짐을 친엄마 집에 가져다 놨습니다. 당시 엄마는 또 우셨습니다. 아, 물론 제가 맞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다섯 박스나 되는 짐을 매일 한 박스씩 옮겼습니다. 물론 오후 5시 이후에 나갔지요. 그러고는 마지막 다섯 번째 박스를 다 옮기고 난 후, 그날 저녁. 저는 아빠와 대판 싸우고 집을 나왔습니다(물론 친엄마께 가버릴 거라고 말은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온 것이 너무 큰 실수였습니다. 그 후 아빠와 사이가 소원해져 5년 동안 연락도 하지않고 지냈습니다. 아빠를 다시 뵌 것은 할아버지 장례식 때문이었습니다. 서로 쌓인 것들이 너무 많아 쉽게 풀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라는 짐을 떠맡은 엄마는, 새 꿈으로 이제 막 시작한 곱창 가게를 접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학습지 교사를 시작하셨습니다. 매일 (차가 없어서) 양손에 3kg에 해당되는 가방을 들고 하루 종일 아이들 가르치고, 저녁에는 전단지를 돌립니다. 전단지를 돌리고 오시면 학생들 문제지를 채점해야 합니다. 그러면 시간이 어느덧 새벽 2시가 됩니다.

당시 저는 수능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가게를 판 돈으로 어머니는 저를 재수종합반에 보내셨습니다. 공부하고 집에 와서 인터넷강의를 듣고 나면 대략 새벽 2시가 됐습니다. 단칸방에서 두 모자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검정고시에는 붙었는데 대학입시에는 떨어졌습니다. 이유를 생각해 보니 학원에 좋아하는 누나가 있었는데 그 누나한테 빠져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엄마는 체력의 한계로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여동생도 살기 싫다고 집을 뛰쳐나왔습니다.

그렇게 셋이 된 저희는 외가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해 명절. 처음으로 젊은이들이 왜 명절 때 집에 있기 싫어하는지 그 이유를 깨닫게 됐습니다. 친척 한 분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기적인 놈아! 네가 막무가내로 와서 네 엄마 인생 망쳤다."

저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엄마, 그때 실수 만회하기 위해 살겠습니다

그래도 시간이 흐르니 나름대로 잘살고 있습니다. 4년 전에 어떤 분이 제게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자퇴한 인간들은 사회 부적응자라서 안 돼, 상종할 가치가 없어. 자네처럼 성격 좋은 사람들이 학교 딱 나오고, 좋은 대학교 가고, 대기업 가는 거지."
"저, 아저씨…."
"왜?"
"저 검정고시 봤는데요."
"…."

대학교 1학년, 담당교수님을 처음 뵙던 날 제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넌 남들과 다르게 자라서 글 쓰면 좋은 글이 되겠다. 한번 글 가져와 봐"라고요. 기뻤습니다. 그러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고, 하나씩 되돌리는 중입니다. 그렇게 4년이 지났습니다.

항상 엄마가 눈에 아른거려 한 번도 그날 제 선택이 옳았다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살기 위해서 너무 많은 것을 빼앗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빠와 소원해져버린 것 역시 죄책감이 생깁니다. 살기 위해 발버둥 쳤는데 그게 이런 결과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냥 '실수'일 뿐, 평생의 실수로 만들고 싶진 않습니다. 그게 지금 제가 사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태그:#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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