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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제수씨, 그리고 조카들
 어머니와 제수씨, 그리고 조카들
ⓒ 조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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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한 배에서 나온 형제라도 서로 먹고살기 바빠서 평소에는 데면데면하게 지내다가 부모님 생신이나 형 아우 생일 때 만나보는 것이 고작이다. 그것도 가까운 형제들 얘기지, 사촌만 넘어서도 집안 어른들 칠순잔치나 큰 행사 아니면 어림없는 일이다. 그래도 추석이 있고 설이 있어 사촌에 육촌까지 일 년에 두 번은 의무적(?)으로 얼굴을 마주하고 그간의 안부를 물으며 술이라도 한잔 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그런데 솔직히 나는 설날만 되면 무섭다. 친조카들만 여섯에다가 외면할 수 없는 일가의 조카들이 아홉이니 세뱃돈을 만 원씩만 잡아도 15만 원이다. 게다가 수입원이 없는 부모님께서 조카들에게 내어주시는 세뱃돈까지 큰아들인 내 주머니에서 나가야 될 형편이니 어머니의 용돈까지 합하면 세뱃돈으로만 50만 원이 훌쩍 넘게 지출된다. 사정이 이러하니 어찌 설 명절이 무섭지 않겠는가?

"홍대 클럽 안 가본 사람, 큰아버지랑 친하게 지낼 생각 마"

작년에 조카들에게 선물한 시집
 작년에 조카들에게 선물한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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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조에 계시는 시인께 사인을 부탁드렸다
 미조에 계시는 시인께 사인을 부탁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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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도 참으로 무서운 게 있으니 큰아버지인 나를 향해 흘기는 조카들의 눈이다. 그리고 조카들 옆에서 무언으로 바라보는 제수씨들의 가재 눈이 무섭다.

몇 해 전부터 조카들에게 세뱃돈 대신 도서상품권을 줬으니 조카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다. 아니 그렇다고 제수씨들까지 가재 눈을 하고서, 그것도 명절날 아침부터 집안에서는 장손이요, 애들한테는 큰아버지인 나를 홀대해야만 되겠느냐 말이지.

작년에는 시집(詩集)에 어렵사리 시인의 사인을 받아서 세뱃돈 대신 선물했다가, 그 가재 눈을 견디다 못해 빳빳한 만 원짜리 두 장씩을 다시 돌리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관련기사 : <세뱃돈 받은 조카들 "큰아버지, 그러시면 안 되죠">).

물론 나도 잘못이 있기는 있다. 대학에 다니는 조카들에게 "홍대 클럽을 가봤느냐?"는 둥, "홍대 클럽 한 번도 안 가본 사람은 나하고 친하게 지낼 생각 마라"는 둥, 공부도 좋지만 노는 것도 큰 공부라며 홍대 클럽이 무슨 청춘의 심볼인 양 찬양했다.

실제로 미용 공부를 하는 한 조카 녀석이 이러한 큰아버지 핑계를 대며 요즘 홍대 클럽에 푹 빠져 있기도 하다. 암튼, 제수씨들의 눈에는 어린 조카들한테 술이나 가르치고 홍대 클럽을 찬양하며 조카들을 풍류의 길(?)로 인도하는 큰아버지가 못마땅할 수도 있겠다.

조카들에게 세뱃돈 대신 '시집' 선물한 까닭

조카와 함께 봉평 이효석 문학관 가는 길에
 조카와 함께 봉평 이효석 문학관 가는 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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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중학교에 다니는 조카가 자기는 이다음에 크면 큰아버지처럼 살겠다며 주민등록증이 나오면 제일 먼저 2종소형(250cc 이상 오토바이) 면허증부터 취득하겠단다. 그리고 기타도 배우고 아코디언도 배우겠단다. 그래서 큰아버지처럼 시집 한 권 뒷주머니에 꽂고, 오토바이에 기타를 싣고 산으로 들로 다니며 멋지게 살겠단다.

이 말을 들은 아우는 빙그레 웃으며 "그래, 꼭 그렇게 멋지게 살아라" 했는데, 아마도 제수씨께 몇 대 쥐어터진 모양이다. 제수씨 사람 참 좋게 봤는데…. 그래도 나를 닮고 싶어하는 조카가 있다는 게 속으로는 은근히 좋았다.

그러나 제수씨들은 오해하지 마시라. 나처럼 조카들을 사랑하는 사람도 없으니. 세상 어떤 큰아버지가 명절날 조카들과 극장에 가고 노래방을 다니며 그 비위를 다 맞추어주겠는가? 풍류를 제대로 즐길 줄 아는 큰아버지 둔 것을 자자손손 자랑으로 여기지는 못할망정 그리하면 내가 많이 섭섭하다오.

어찌 되었든 제수씨들이 보아도 나는 그리 넉넉한 사람도 아니요 고상한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시집 살 돈으로 세뱃돈을 좀 더 두둑하게 주었으면 하는 조카들의 바람과는 달리 조카들에게 눈총까지 받아가면서 해마다 시집을 선물하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학문의 근본목적은 인격양성이지 기술습득이 아니다. 지금의 고등학교는 대학을 들어가기 위한 기관이 되어버렸고, 대학은 직장을 구하기 위한 기술습득이 우선이요, 물질과 부만을 쫒는 주구(走狗)를 길러내는 기관이 되어버렸다. 도대체 '인격을 완성하는 도량'인 대학의 근본 자세는 어디로 갔을까?

이렇게 학교에서 부족한 공부, 즉 조카들의 올바른 인격형성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해서 설이고 추석이고 시집을 한 권씩 선물하는데, 사실은 그 비용이 만만치 않다.

설 명절이면 꼭 말다툼 하는 우리 부부... 세뱃돈 때문에 

식구가 많다보니 세배하는 데만도 30분이 넘게 걸린다
 식구가 많다보니 세배하는 데만도 30분이 넘게 걸린다
ⓒ 조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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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는 설 명절 전에 한 차례씩 말다툼 하는 것이 관례화되었는데, 바로 이 세뱃돈 문제 때문이다. 아내의 말로는 도대체 손해도 이만저만이 아니란다. 아우들은 애가 셋씩이고 우리는 둘인데 그나마 큰 딸은 세뱃돈 받을 나이가 지났으니 내가 봐도 한참 밑지는 장사(?)인 것은 분명하다.

또한 수입원이 없는 부모님께서 조카들에게 내어주시는 세뱃돈까지 큰아들인 내 주머니에서 나가야 될 형편이니 아내를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거기에 처조카들 여섯에 작은 딸과 동갑내기인 사촌 여동생들까지 합하면 그야말로 아내의 입에서 "억" 소리가 절로 나올 지경이다. 그러나 어쩌랴? 큰아버지 몫이 있고 큰엄마 몫이 있는 것을.

그래도 아내에게 참으로 고마운 것이, 며칠 전 딸 둘을 앉혀놓고 하는 소리를 엿들었는데 "너희들은 이다음에 어차피 형제 있는 집으로 시집갈 거라면 큰아들에게 시집가라"며 부추기고 있는 게 아닌가. 퇴근길에 동무들과 마신 술이 확 깨면서 숨을 죽이고 들어보니 "큰며느리 하는 일이 해도 해도 공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지만, 시부모님하고 부대끼며 사는 재미도 있고 시부모님하고 살면 여러 가지 좋은 점도 많다"고 했다.

제일 좋은 점이 자식을 많이 키워본 시어머니가 반은 소아과 의사이니 애들은 거저 키운단다. 그리고 며느리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시어머니 용돈 많이 드리면 그 돈도 결국은 손자손녀를 위해서 쓰니 이다음에 시집가더라도 알아서 잘하란다.

그날 밤 아내에게 팔베개를 해주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

"당신 말이야, 이다음에 당신과 내가 죽어 다시 태어나면…."
"태어나면 뭐?"
"나를 봐도 모르는 체하고 지나가."
"왜?"
"지금까지 그렇게 당하고 살면서 뭘 왜야. 나 같은 남자 만나지 말라는 얘기야."
"풋."
"다음 생에는 돈도 잘 벌어다주고 더 멋진 남자 만나서 살아."
"그러고 싶은데 내가 못 본체 해도 당신이 쫓아다니면 넘어갈 것 같은데?"
"쯧쯧, 그렇게 얘길 해도 못 알아들으니…. 그렇다면 당신 복이 그만큼인 거겠지."

이번 설에는 큰아버지 시 외워오는 조카에게 혜택을

팔씨름 해서 이기는 사람한테는 큰아버지가 용돈을 두둑하게 준다
 팔씨름 해서 이기는 사람한테는 큰아버지가 용돈을 두둑하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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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고마운 아내와 이번 설에도 세뱃돈 때문에 다투기는 싫다. 아무래도 이번 설의 세뱃돈 관리는 아내에게 맡겨야겠다. 나도 이제는 조카 녀석들의 그 가재 눈도 싫거니와, 시인들을 찾아다니며 조카들 이름으로 일일이 사인 받기도 한두 번이지 민망한 일이다. 그리고 나는 "우리 큰아버지 최고예요!"라는 공치사도 필요한 속물이기 때문이다.

암튼 이번 설은 세뱃돈 때문에 아내하고 티격태격할 일 없어 홀가분한 마음이다. 바라고 바라건대 이번 설만큼은 풍요롭지는 못해도 세뱃돈 가지고 큰아버지인 나나 어린 조카들이나 서로 얼굴 붉히는 일 없었으면 참 좋겠다. 

이번 설에는 큰아버지가 지은 시를 한 편씩 외워오는 조카들에게는 많은 혜택이 있음을 사전에 공지했으니 녀석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그래도 자타가 공인하는 멋쟁이 큰아버지의 조카라면 누구의 시가 되었든 시 한 수쯤은 멋들어지게 낭송할 줄도 알아야 되지 않겠는가 말이지.

명자꽃

장독대 너머 곱게 피운 명자꽃
오며가며 예쁘다 곱다 한껏 추어줬더니
배시시 웃으며 화대(花代) 내놓으라 눈을 흘기네

- 조카들을 무한 사랑하는 큰아버지 지음

봄이면 장독대에 피어나는 명자꽃. 어머니가 애지중지하시는 명자꽃나무다.
 봄이면 장독대에 피어나는 명자꽃. 어머니가 애지중지하시는 명자꽃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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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자꽃
 명자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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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세뱃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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