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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셋돈을 빼서 여행을 떠난 부부가 있었다. 처음에는 1년만 여행을 하자, 고 했단다. 하지만 여행이라는 게 묘한 중독성이 있다. 그게 2년으로 늘어나더니 결국 이 부부는 967일 동안 길 위에 머물렀다. 그동안 47개국을 돌아다녔고, 돌아와서 그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 세상에 내놓았다. 기억하시는가, 책 제목을.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그들이 돌아왔다. 물론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다. 그들이 다시 세상에 '여행기'를 내놓은 것이다.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세상을 967일간이나 돌아다니고도 다시 여행을 떠나고 싶을까, 반문하는 이들이 있겠지만 떠나본 사람들은 안다. 길 위에 머물 때는 기이하게도 향수병에 시달리지만, 막상 집으로 돌아오면 다시 길이 그리워지는 생활이 반복된다는 것을.

한국에 돌아온 뒤, 여행 후유증으로 나름대로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는 이들 부부는 여러 가지 일을 겪은 뒤, 제주도에 정착했다. 제주도가 한 때 여행에 빠져 세상을 떠돌아다니던 이들이 가장 정착하고 싶어 하는 땅이라는 사실을 이들 부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나 보다. 그 섬에 가면 그런 사람들을 쉬이 만날 수 있다.

여행자의 유전자는 결코 잠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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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곳에 정착하면 자연적으로 일상이 시작된다. 그들도 그랬다. 일상이 찾아오고 더불어 관계가 생겨났단다. 하지만 이들의 피에는 여행자의 유전자가 새겨져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스스로 최면을 걸어 일상에 안주했다고 생각하더라도 여행자의 유전자는 결코 잠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짐을 꾸린다. 그리고 다시 길 위로 나섰다.

967일이나 세상을 떠돌아다니고도 가고 싶은 나라가 있느냐, 고 묻지 마시라. 미지의 세계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아서 가고 싶지만, 한 번 가본 나라는 추억으로 남아 다시 찾게 되는 법이다. 두 번 갔다고 다시 가고 싶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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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그들이 택한 여행지는 라오스였다. <뉴욕타임스>가 꼭 가봐야 할 나라 1위로 선정했다는 나라, 라오스. 그 나라를 작가는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많은 나라'였다고 술회한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처럼 볼거리가 많은 것도 아니고, 필리핀처럼 바다에 누워 휴양할 만한 곳도 못 된다. 그렇다고 베트남이나 태국처럼 해산물이 싸다거나 먹을거리가 넘치는 곳도 아니었다. - 서문에서

이 대목에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나라가 여행자를, 그것도 '여행의 고수'를 유혹하는 건 당연하다. 한껏 여행의 맛을 즐길 수 있으면서, 세상을 자유롭게 바라볼 수 있는 편안함이 그곳에 있을 테니까.

김향미·양학용, 이들 부부가 생각하는 여행은 4년이라는 공백 기간이 있었음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엄밀한 의미에서 달라졌다고 할 수 있겠다. 세상을 바라보는,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이 이전보다 더 깊어졌으므로.

책 제목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이들의 여행은 속도를 지향하지 않는다. 시속 4킬로미터라면 그건 아주 천천히, 주변을 아주 찬찬히 둘러보면서 걷는 것을 의미한다. 뒷짐을 지고 짐짓 여유를 부리면서 걷는 속도가 시속 4킬로미터이기 때문이다. 돌아다니다가 누군가 말을 걸면 멈춰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아이들이 모여 노는 것을 기웃거리고, 사원에서 낮잠을 즐기는 스님을 훔쳐보기도 하는 속도. 그래, 여행은 이렇게 해야 한다.

그러니 이들 부부가 시속 4킬로미터의 여행을 가장 좋아할 수밖에 없다. 여행 고수가 달리 여행 고수이겠는가.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많은 나라' 라오스

그런 여행을 하기 가장 알맞은 나라가 바로 라오스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많은 나라'에서 라오스에서 할 수 있는 여행이란다. 여유로움이 한껏 넘치는 여행이 아닐 수 없다. 대신 이런 여행은 자칫하면 볼거리는 하나도 없고 그저 피곤하기만한 여행이 될 수 있으므로, 마음의 여유는 반드시 지니고 떠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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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는 이제 마법에 걸린 듯 골목골목을 쏘다닌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아버지와 어린 두 아들이 황톳빛 강물 위에 배를 띄우고 고기를 잡고 있다. 한 녀석은 고기잡이보다는 둥그렇게 파문이 되어 퍼져 나가는 물결 만들기에 더 흥미를 가진 모양이다. 그리고 깡마른 남자가 골목 어귀에서 옥수수를 팔고 있던 모녀를 오토바이 뒷좌석에 태우고 있다.

맞은편에선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도 두 꼬마를 앞세우고 자전거 투어 중인 금빛 머리의 여성 여행자가 나를 보며 지나간다. 우산을 쓰고 집으로 향하는 꼬마 스님들이 귀엽다. 툭툭에 탄 어느 커플 여행자는 운전사를 대신해서 호객을 하고 있다. 아마도 그들의 목적지는 버스터미널일 테고 네 명이 차지 않는 한 툭툭은 달릴 수 없다고 운전사가 말했을 것이다. 더위에 지친 커플 여행자는 이참에 툭툭 호객을 전담하는 조수로 전격 나섰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모든 풍경들이, 아주 느리게 펼쳐졌다. 시간이 멈춘 듯이 흘러가고 있었다. 마치 정지한 장면들을 앞에 두고 누군가 소곤소곤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 같았다. 그날 하루, 시간이 멈춘 루앙프라방의 골목길에서 보낸 한나절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 본문에서

이번 여행에서도 이들 부부는 여행지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이전 여행기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에서 967일간이나 세상을 떠돈 이들이 '여행은 친구를 만나는 것'이라는 정의를 내렸지만, 이번 라오스 여행은 그것에서 두어 걸음 더 나아가 여행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니 '바쁜 마음도 쉬어가는 라오스 여행기'라는 부제를 붙였을 게다.

전셋돈 빼서 떠난 967일간의 세계여행

이 책, 나의 여행본능을 무지하게 자극했다. 유명한 온갖 여행지를 소개하는 내용이었다면 한 번 쓰윽 훑어보고 내던졌을지도 모른다. 그런 정보야 인터넷에서 쉽게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따뜻한 사람의 온기가 물씬 풍겨나는 여행 이야기 덕분에 나는 새롭게 떠날 여행지로 '라오스'를 찜했다. 가까운 미래에 배낭을 꾸려 나도 이들 부부처럼 라오스로 '바쁜 마음도 쉬어가는' 여행을 떠나리라. 같이 가시고 싶으신 분, 연락 주시라. 그 전에 이 책을 먼저 읽으시라, 권한다.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 바쁜 마음도 쉬어 가는 라오스 여행기

김향미.양학용 지음, 좋은생각(2011)


태그:#라오스, #양학용, #김향미,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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