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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16일 명동성당 재개발 현장에서 공개된 '근대식 배수로'의 모습. 배수로의 시작점으로 물을 모아 관을 통해 흘러가도록 구조화 되었다.
 지난 12월 16일 명동성당 재개발 현장에서 공개된 '근대식 배수로'의 모습. 배수로의 시작점으로 물을 모아 관을 통해 흘러가도록 구조화 되었다.
ⓒ 김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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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명동성당 재개발공사 발굴현장에서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놀라운 유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날 처음 현장이 공개되면서 생생하게 드러난 유구가 기자들을 놀라게 했다. 기자들은 '근대식 하수로'라고 하여 물내려가는 길 정도로 생각하고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날 나타난 것은 우리나라가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도시 지하기반시설을 어떻게 발전시켰는지, 당시 개화파에 의하여 주도된 도시정비 사업의 실상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었다. 여기에 명동성당이 조선 후기 명문 가문인 윤정현(尹定鉉·1793(정조17)~1874(고종11))의 집터로 추정되는 유구도 나왔다.

이날 공개되면서 '근대식 배수관로'로 이름 붙여진 유구는 1882년 일본에 망명 중이던 김옥균이 수신사로 방문한 박영효에게 써준 '치도략론(治道略論)'이 바탕이 되었고, 1895년에 박영효와 그의 후임 이채연이 '가가(假家)정리'란 이름으로 도시개량사업을 집행할 때 당시 조선교구 측이 직접 공사한 시설로 판단되는 도시기반시설이었다.

당시 명동성당은 이미 1890년에 주교관 건물을 완성하였고 1892년부터 성당 본당 건물을 짓기 시작했으며 1895년에는 공사가 상당 부분 진행된 상태였다. 이 때 주변에서는 일본공사관 측이 일본 거류민을 위한 배수로 공사와 도로확장 공사를 진행하였고 성당 측에서도 동일한 시기에 맞추어 배수관로 공사를 시행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명동성당 측은 용산 '왜고개'에서 벽돌을 구워 건물을 짓고 있었는데 이날 드러난 '근대식 배수관로'에는 같은 벽돌이 사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더구나 조선식의 전통적인 공법인 홍예형(아치형)으로 배수관로를 만들고 바닥에는 박석(얇은 돌)을 깔아 배수로의 안전을 도모했다. 이와 같은 유구는 우리나라 근대화과정의 선진화된 토목기술, 건축기술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보기 힘든 유구로 판단되는 진귀한 근대의 증거물이 되었다.

고종이 하사한 청백리의 집터, 개발보다는 보존을

명동성당이 자리잡은 터는 고종이 윤정현에게 하사한 집으로 60-70칸에 이르는 저택이었다. 윤정현이 황해도 관찰사, 함경도 관찰사, 병조판서 등 수많은 관직을 거쳐 오면서도 너무 청빈하게 살아 가난해진 그에게 고종이 하사한 집이었다. 이것을 그의 아들 윤태경이 조선교구 측에 매도한 것이었다('명동성당건축사' 기록).

실제로 국왕이 하사한 집을 10여년 밖에 지나지 않았고 국왕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팔아치웠는지 알 수 없으나 명동성당 측 기록은 그렇게 전하고 있다. 조선 후기의 쟁쟁한 문관인 윤정현(남양 윤씨)은 추사 김정희와 절친한 사이로 추사가 그의 호 '침계(梣溪)'를 글로 써주기도 했으며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黃草嶺眞興王巡狩碑)'는 김정희의 권유로 원위치를 찾아 세우기도 했다.

지난 19일 남원윤씨 후손들은 문중의 대종회 회장을 모시고 대전의 문화재청을 찾았다. 이들은 문화재청에 명동성당의 자리가 윤정현의 집터였음을 확인하고 이 집터를 영구히 보존할 수 있는 대책을 세워줄 것을 청원하고 이를 위해서 우선 공사를 중지하고 정밀한 조사와 전문가의 검토를 선행할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윤정현에게 써준 '침계(?溪)' <42.8×122.7cm>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윤정현에게 써준 '침계(?溪)' <42.8×122.7cm>
ⓒ 간송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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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들은 22일 명동성당 서울교구 사무국을 방문하여 명동성당 재개발 현장에서 발굴된 집터는 윤정현의 집터이며 윤정현의 부친은 윤행임으로 신유사옥 때 천주교 신자로 서학을 했다는 이유로 사약을 받고 40세에 순교한 천주교 순교자임을 밝혔다.

이들은 남원윤씨 21세 윤정현이 윤행임의 독자로 경학과 금석문에 능했으며, 과거급제 후 수많은 관직을 역임하다 81세에 돌아가셨다고 하면서, 아들이 없어 15세의 태경(1833 헌종 1년~1881 고종 18년)을 양자로 맞았다고 했다. 태경 또한 과거급제 후 의주부윤, 정주목사, 양주목사 등 관직을 지냈으나, 민생만 살피고 권신들에게 아부하지 않았으며, 서민들을 괴롭히던 토호세력을 배척하고 깨끗한 공직생활을 수행했기 때문에 가정형편이 어려웠다고 했다.

남원윤씨 대종회는 윤행임공은 1801년 신유년 천주교 박해 때 천주교를 신봉하고 왕실을 비난하는 벽보를 붙인 배후로 지목되어 사약을 받았으며 그러한 연유로 손자 태경이 조선교구의 매수에 응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이들은 명동성당 재개발에 대해 세간에는 상업적 건물을 짓고 임대하여 기업가와 같은 이윤을 추구한다는 곱지 않는 시선이 있음을 지적하고, 웅장한 건물을 짓기보다는 이 유구를 잘 보존하고 복원하여 신자와 내방객들에게 신유사옥이라는 천주교의 고난사를 보여주는 것이 높이 평가 받게 될 것이라고 진정했다.

덧붙이는 글 | 김란기 님은 '명동성당 문화재 올바른 보존대책 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기사는 천주교인권위원회 월간 소식지 <교회와 인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문화, #문화재, #명동성당, #순교,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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