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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시에 있는 '아메리칸 그리팅스' 카드전문점. '올마크(Hallmark)' 카드와 더불어 미국의 양대 축하카드 회사다.
 뉴욕시에 있는 '아메리칸 그리팅스' 카드전문점. '올마크(Hallmark)' 카드와 더불어 미국의 양대 축하카드 회사다.
ⓒ 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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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했을 때다. 난 첫 학기가 끝나기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공부도 공부지만, 학부생을 지도하는 강의조교 일이 만만치 않았던 탓이다.

영어도 서툰데다, 학생들을 대면할 때 겪는 사소한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기도 쉽지 않았다. 동료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더 힘들었을 것이다. 특히 같은 연구실을 쓰는 제니퍼는 모든 일에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었다. 이 고마운 친구에게 어떻게든 감사표시를 하고 싶었다.

'기말 모드'로 난장판이 된 기숙사 책상서랍을 뒤지다 보니, 한국에서 가져 온 노리개 장식이 굴러 나온다. 이걸 정성껏 포장해 그 친구에게 내밀었다. 제니퍼는 눈과 입을 최대치로 벌리고 호들갑을 떤다.

이 뉴저지 출신 학생은 "너무 예쁘고, 너무 고맙고, 너무 신난다"는 말로 시작해서, 작은 장식품 하나가 얼마나 많은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하나하나 일깨운 후 연구실을 나갔다. 제니퍼는 문을 닫기 전 다시 한 번 고개를 내밀고 "거실에 걸어놓을 생각"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나는 혼자 연구실에 얼빠진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무슨 폭풍이라도 지나간 기분이었다. 상대의 극적인 표정에 맞추기 위해 애쓴 탓에 얼굴 근육에 경련이 일었다. 역시 문화차이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말로 부족해서 카드... 까지?

다음날, 연구실에서 시험채점을 하고 있는데 눈 앞에 뭔가 불쑥 나타난다. 고개를 돌려보니 제니퍼가 뭔가를 내밀고 있었다. 손바닥 반만한 분홍 봉투였다. 그 애가 "선물 고마웠다"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면 나는 그 안에 뭐가 들어 있을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어제 그렇게 '진하게' 감사표시를 하고도 부족했나 보다. 무슨 할 말이 더 남았을까. 봉투 안에는 꽃이 그려진 카드가 들어 있었다. 카드를 펼쳐보니 접힌 면 왼쪽은 비어 있고, 오른쪽에는 "감사합니다"라고 인쇄된 글귀가 보인다. 그 밑에 제 이름만 달랑 써놓았다. 그게 전부였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거라는 짐작이 맞았던 모양이다.

일부러 이를 드러내며 "고맙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머리 속은 좀 복잡했다. 카드를 줄 필요도 없지만, 주려면 인사를 한두 줄 정도 써서 주는 게 제대로 된 성의표시 아닐까? 인쇄된 카드에 서명만 해서 주는 건 뭘까?

이후 '생일카드', '성탄카드', '이사축하 카드' (그렇다, 이사 축하카드도 있다) 등 여러 카드를 받아보며 깨닫게 된 건, 구입한 카드에 이름 한 자 달랑 써 보내는 미국인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물론 긴 인삿말을 쓰는 미국인들이 없는 것은 아니나, 대개는 자신의 마음을 대신하는 글귀가 적힌 카드를 사서 친필서명만 해 보내는 경우가 많다.

미국에서는 카드 전문점이 아니어도 어디서나 쉽게 축하카드를 살 수 있다. 사진은 식료품점 문구코너의 카드 진열대 일부.
 미국에서는 카드 전문점이 아니어도 어디서나 쉽게 축하카드를 살 수 있다. 사진은 식료품점 문구코너의 카드 진열대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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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선물한다고 가정해 보면, 미국인들의 이 기묘한 관습을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상대는 자신이 좋아하는 디자인에, 신체 치수를 정확히 기억해 준 것(혹은 한 사이즈 작게 기억해 준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할 것이다. 옷감을 사서 직접 바느질까지 해야만 정성은 아닌 것이다.

9조 원대의 미국 카드산업

미국 축하카드연합(Greeting Card Association)의 통계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매년 70억 장의 카드를 보낸다. 한 명이 20장 넘는 카드를 받는 것이다. 미국 10가구 중 9가구가 카드를 구입하고, 평균 30장의 카드를 산다. 미국인들은 이렇게 축하카드를 열심히 주고 받으며 축하카드 시장을 75억불(약 9조 원) 이상의 거대한 규모로 키워 놓았다.

미국 상점에는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마음을 대신하기 위해 수많은 종류의 카드가 준비돼 있다. 진열대에 어떤 카드가 꽂혀 있는지 보자. 카드 종류에는 성탄, 하누카, 발렌타인 처럼 절기에 따라 보내는 카드가 있고, 생일, 졸업, 연애, 이사, 결혼, 출산, 병문안, 은퇴 등 개인적 축하를 위한 카드가 있다. 물론 축하 카드는 미국이 아니어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미국 카드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축하의 구체성'이다.

카드는 대개 남자와 여자용 두 가지로 구분되고, 성별마다 관계의 종류와 친밀도, 연령대, 그리고 축하방식(진지, 유머, 종교 등) 등으로 나뉘어 수없이 많은 조합을 만들어낸다. 평상시 흔히 주고 받는 생일카드를 예로 들어보자.

아기 탄생을 축하하는 카드는 남아용과 여아용이 따로 있고, 심지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baby-to-be)를 위한 카드도 있다. 생일카드는 성장단계에 따라 18세, 21세, 30세, 40세, 50세 등 나이별로도 준비되어 있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사람들과 무수한 관계를 맺게 되는데, 카드회사는 이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아들과 딸을 위한 카드, 손자와 손녀를 위한 카드, 증손자와 증손녀를 위한 카드, 형제, 자매, 남매간에 주는 카드, 조카와 질녀에게 주는 카드, 사위와 며느리용 카드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끼리 주고 받는 생일카드에도 친구용와 애인용, 아내용과 남편용이 따로 있다.

인간관계는 언제나 '교환'을 전제로 하므로, 보낸 사람들이 나중에 되돌려 받을 카드도 준비되어 있다. 어머니용 카드와 아버지용 카드가 따로 있고, 할아버지, 할머니, 증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 카드가 별도로 마련된 것은 물론, 삼촌과 고모용,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용도 있다.

'추근대기 카드' '그냥 보내는 카드'... '늦은 생일카드'까지

이렇게 세분화된 축하 대상은 다채로운 축하방식과 결합해 카드 시장을 더욱 다양하게 만들어 준다. 예컨대 신앙 깊은 할아버지의 생일을 축하해 주고 싶은 손주가 있다면 '할아버지를 위한 종교적 생일(grandfather religious birthday)' 섹션을 찾으면 된다. 동생 생일을 장난스럽게 축하해 주고 싶은 형이라면 '형제를 위한 우스운 생일(brother funny birthday)'ㅡ섹션에서 마음에 드는 카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미국의 축하카드는 축하 대상과 방식에 따라 고도로 세분화 돼 있으나, 대개 한두 단계 더 '미세조정' 과정을 거친다. 예를 들면, 조카 중에서도 특별히 어린 조카를 위한 '어린 조카 생일(young nephew birthday)' 카드가 있고, 우스운 축하카드 중에도 '두 사람 이상이 함께 보내는 우스운 생일카드(funny birthday from us)'가 있다.

'재미로 보내는 카드', '추근대기 카드,' '병문안 카드,' '위로 카드.'
 '재미로 보내는 카드', '추근대기 카드,' '병문안 카드,' '위로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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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생일축하 카드.' 생일을 기억하지 못한 미안함을 웃음으로 달래주는 글귀가 보인다. 앞에는 '생일 잊어서 미안. 내가 단기기억에 문제가 있어서...'라고 씌어 있고, 안에는 '생일 제때 기억해줘 봐야 나이만 더 빨리 더 먹는 거지. 늦은 생일 축하해'라고 인쇄되어 있다.
 '뒤늦은 생일축하 카드.' 생일을 기억하지 못한 미안함을 웃음으로 달래주는 글귀가 보인다. 앞에는 '생일 잊어서 미안. 내가 단기기억에 문제가 있어서...'라고 씌어 있고, 안에는 '생일 제때 기억해줘 봐야 나이만 더 빨리 더 먹는 거지. 늦은 생일 축하해'라고 인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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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친구를 위로하고 싶으면 '병문안(get well)'카드를 보내면 되고, 생일을 까마득히 잊은 경우는 '늦은 생일카드(belated birthday)'가 있다. 애인에게 장난을 걸고 싶다면 '추근대기(just flirting)' 카드가 유용할 것이다. 특별히 축하나 위로할 일이 없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냥 재미로 보내는 카드(just for fun)'가 있으니 말이다.

이처럼 미국에서는 매우 특별한 날과 전혀 특별하지 않은 날 모두에 어울리는 카드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다양하다 해도, 대량생산되는 상품이 개인의 섬세한 필요를 충족시킬 수는 없는 모양이다. "살 카드가 마땅치 않다"고 불평하는 미국인들을 보면 말이다. 물론 이처럼 까다로운 소비자를 위한 아무 축하 내용도 담기지 않은 '백지 카드(blank)'가 준비되어 있다.

미국 카드의 역사

미국인들에게 축하카드는 빼놓을 수 없는 삶의 일부다. 하지만 미국인들이 카드를 사서 주고받는 관습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카드를 인쇄해 상품으로 팔기 시작한 게 19세기니 말이다.

물론 종이에 쓴 신년 인사를 주고 받는 관습은 그보다 훨씬 이전인 고대 중국과 이집트로 거슬러 올라간다. 달력과 종이가 발명된 곳에서 신년 축하카드가 시작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축하카드가 제대로 된 산업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했다. 인쇄기술의 발전과 우편제도의 확립이다.

미국의 경우, 1856년 독일출신 인쇄공 루이스 프랑(Louis Prang)이 1856년에 보스턴에 작은 인쇄소를 차린 게 계기였다. 프랑의 인쇄기술은 아주 뛰어나서, 미국은 물론 인쇄산업이 훨씬 발달한 영국에까지 고객을 확보할 정도였다. 그리고 개업 후 20년 뒤인 1875년부터 대중을 위한 크리스마스 카드를 본격적으로 제작 판매하기 시작한다. 미국 카드산업은 19세기 후반에야 비로소 시작된 셈이다.

'미국 축하 카드의 아버지'라 불리는 루이스 프랑과 그가 1886년에 제작한 크리스마스 카드.
 '미국 축하 카드의 아버지'라 불리는 루이스 프랑과 그가 1886년에 제작한 크리스마스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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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화된 카드는 인쇄기술의 발전과 우편제도의 개혁을 통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19세기 중반 이후 일어난 우편요금과 배달체계의 혁신이 큰 역할을 했다. 1847년에 미국 최초로 공인우표가 발행되었고, 거리에 따라 차등 부과되던 우편요금(무게 1온스 기준 500km까지 5센트, 그 이상 10센트)이 1851년에 3센트로 통일되어 요금부담을 덜 수 있게 된 것이다.

우편물을 부치기 위해 우체국을 찾아야 했던 불편을 없애기 위해 1850년대 후반부터는 거리에 우편함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아울러 일부 도시에서만 시행되던 주택배달제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그 전에는 우편물을 받을 때에도 우체국까지 가야 했었다.

이처럼 카드 문화는 생산기술과 보급제도의 발전에 힘입어 미국인들의 일상을 파고 들었다.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요인이 있다. 생각해 보자. 직접 만들어 전해주던 카드가 왜 사서 부치는 물건으로 바뀌게 되었는지 말이다. 교통과 통신수단이 발달로 인해 대인관계의 폭이 넓어졌고, 무엇보다 카드를 일일이 쓰기 어려울 만큼 바빠졌기 때문이다.

효율에 지배받게 된 관계

카드가 대량생산되기 시작한 시기는 미국이 본격적인 산업화와 상업화의 길로 들어선 때이기도 하다. 미국은 19세기 중반에 헌법을 개정해 기업에게 자연인의 권리를 부여하는데(이른바 '법인' corporate personhood), 이는 사회의 자본주의적 변화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미국 카드의 특성은 축하 대상과 방식이 세밀하게 분류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진 속 카드 진열대에 카드가 아들, 딸, 형제, 자매, 조카, 질녀, 이모, 할아버지, 할머니, 아내, 어머니 등으로 구분되어 꽂혀 있다.
 미국 카드의 특성은 축하 대상과 방식이 세밀하게 분류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진 속 카드 진열대에 카드가 아들, 딸, 형제, 자매, 조카, 질녀, 이모, 할아버지, 할머니, 아내, 어머니 등으로 구분되어 꽂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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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 써서 건네주던 카드를 사서 뿌리게 되었다는 사실은 인간관계 또한 자본주의적 '효율'의 틀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한 사람에게 투자할 시간을 두 명, 세 명에게 '분산투자'하는 것이 '사회자본'을 넓히는 현대적 교류양식이 된 것이다. 미국 코미디언 제리 사인펠드는 카드를 사서 교환하는 미국인들의 관습을 이렇게 조롱했다.

"우습게도, 우리는 생판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써 놓은 글귀를 돈 주고 사서 부치면서 그게 마음을 대신 전해 주기를 바란다. 결국 이러는 셈이다. '그래, 내가 쓴 건 아냐. 하지만 거기에 뭐가 적혀 있든 그게 내 마음이니 그리 알아.' 그럴 바에야 카드 하나로 모든 축하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건 어떨까? '생일, 성탄 및 결혼기념일 축하하고, 출산 축하하며, 온갖 경사도 축하드리는 동시에 삼가명복을 빕니다. 사무실 전원 일동."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이 좀 바쁜가. 인삿말이 인쇄된 카드를 사서 부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마음을 대신할' 카드를 골라야 하고, 봉투에 주소도 쓰고 우표도 붙여서 우체통에 넣어야 한다. 전화, 팩스, 이메일 등 인사할 수 있는 길은 여럿인데 왜 굳이 귀찮은 일을 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귀찮음'은 카드문화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그만한 부담을 감수했다는 것을 상대에게 과시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의 카드는 가격도 꽤 비싸다. 재질과 가공방법에 따라 1불 미만에서 10불까지 다양하지만, 대개 2~5불의 가격대를 형성한다.

그런 이유로, 인터넷이 도입된 지 15년이 지난 현재에도 전자카드(e-cards)는 미국에서 별로 인기가 없다. 교환되는 카드 전체에서 1%미만이다. 이용자가 조금씩 늘고 있기는 하나, 전자카드는 손쉽고 싸다는 점에서 성의표시용으로 적절한 수단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저널리스트 스튜어트 리븐워스의 말이 이 점을 잘 말해준다.

"전자 성탄카드를 보내는 것은 전자 성탄 쿠키를 보내는 거나 마찬가지다."

늘 연결된, 넓은 관계의 패러독스

'둘이서 한 명에게 보내는 카드.'
 '둘이서 한 명에게 보내는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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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굳건히 유지되어 온 카드 교환문화는 최근 들어 변화조짐을 보이고 있다. 조금씩이나마 꾸준히 성장해 온 성탄카드 매출이 2009년 들어 처음으로 줄었기 때문이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 2010년 12월 9일 자 보도에 따르면, 크리스마스 카드는 2005년 이래로 성장세가 둔화되다가 2009년에 0.4% 감소했다. 아주 미약한 감소세지만, 이는 현대인의 삶에 대해 많은 점을 말해 준다.
종이카드의 매출 감소는 한 가지 원인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경제위기 속의 팍팍한 살림이나 환경의식 강화로 인한 종이소비 경계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원인은 소통방식의 변화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종이에 글을 쓰기보다 자판으로 입력하는 방식으로 소통한다. 문자 메시지, 페이스북, 트위터에서는 문법과 어법 등의 격식이 일상적으로 파괴된다. 이런 '구어적 글쓰기'에 익숙한 세대에게 종이카드에 서명을 하고 주소를 쓰는 건 부담스러울 만큼 격식 차린 소통행위가 된다.

2010년 12월 21일 자 <뉴욕타임스>는 "많은 젊은이들이 이메일 쓰기조차 고통스러워 한다"고 지적한다. 이메일의 문제점은 로그인 하고, 제목을 붙이고, 본문을 완성한 후 이름을 쓰고 정중하게 작별인사를 하지만, 답장은 아예 안 오거나 한참 후에 온다는 점이다. 실제로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메일 사용량은 점차 줄고 있다.

하지만 이메일을 싫어하고 카드를 안 보내는 게 게으름이나 인내심 부족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축하카드를 보내는 것은 '연례행사'에 가깝다. 그동안 못 만난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을 카드를 통해 '속죄'함으로써 관계를 회복하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통해 언제 어디서든 연결된 사람들에게 이런 '속죄'는 필요치 않다. 점심으로 뭘 먹었네 시시콜콜 보고하고, 지금 어느 카페에서 죽치고 앉았다며 지겹게 면상 찍어 올리는 '페친'과 '트친'에게 안부는 무슨 얼어죽을 안부란 말인가.

흥미로운 것은, 19세기에 상품화된 카드가 '관계의 확장'을 의미하는 징표였다면, 보내지 않기 시작한 카드 역시 '관계의 확장'을 의미하는 징표라는 점이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친구와 너무 많은 시간 교류하는 가운데, 그 누구와 어느 때도 교류하지 않게 된 건 아닐까.


태그:#성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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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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