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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간 다른 세상에 갔다 온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신기했다.  색다른 경험이었다. 특히 고윤희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짜릿한 첫 키스를 한 다음 날, 난 고윤희와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눈을 마주치는 순간 옆에 있는 인호에게 어제 일을 들킬 것만 같았다. 고윤희는 그런 나를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응시 하곤 했다. 

인호에게 '정말 사귀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 안에서만 뱅뱅 돌 뿐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어쨌든 인호가 고윤희를 좋아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한 듯했다. 비록 감성이 지배하는 밤이었고 만취 상태였다고는 하지만 난 인호가 좋아하는 여자와 키스를 한 것이다. 그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인호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마지막 날 본 '억' 소리 나는 통장도 자꾸 떠올랐다. 직장 다니면서 받던 월급은 고작 73만 원이었다. 아침밥도 못 먹고 출근해서 하루 종일 기계 소리 들으면서 일하고 저녁이면 상사들 비위 맞추느라 좋아하지도 않는 소주를 들이부으면서 받은 월급이었다. 내 마음은 이미 화려해 보이는 양재동 사무실에 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일하는 건 그리 힘들지 않았지만 회사 안에 있는 사람들과 부대끼는 게 너무 힘들어서 직장을 그만두고 쉬고 있는 중이었다. 기계를 만지는 사람들에게 있는 '쟁이 근성'이 날 숨 막히게 했다.

알고 나면 별 기술도 아닌데, 가르쳐주는 데 그렇게 인색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 알량한 대학을 나온 게 죄였다. 대학 나온 놈이 그것도 모르느냐는 식이었다. 노골적으로 '요즘 대학에서는 뭘 가르치냐'고 타박하는 상사도 있었다. 

의심하는 눈초리도 날 힘들게 했다. 혹시 직원들을 선동해서 노조를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닌가 하고 감시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는 노동조합이 없었다. 대학 다닐 때 쓴 글을 어떻게 입수해서 읽었는지 관리 부장은 가끔 나를 불러서 "너희들이 우리나라를 위해서 한 게 뭐가 있다고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길거리에서 돌멩이 던지느냐"고 따지듯 훈계했다. 그 이후 나를 요주의 인물로 찍어 놓았는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약속했던 3일간의 교육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며칠 동안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고윤희와 있었던 그날 밤 일을 만취 상태에서 일어난 해프닝으로 덮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는 실수로. 하지만 내 몸은 그날 밤 그 부드러운 감촉을 너무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날, 삐삐가 한 통 왔다. 고윤희였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만으로도 난 들뜨고 있었다.

"상범 씨 여기 신림동인데 잠시 차 한잔 할 수 있을까요? 긴히 할 얘기가 있어서요"
"어쩐 일로 신림동 까지…. 그냥 전화로 얘기하면 안 될까요? 선약이 있어서요."
"잠깐만 얘기 하면 돼요…. 상범씨 너무하신다. 여자가 남자 집 근처까지 찾아 왔는데…."
"알았어요. 약속 미뤄볼게요."

찢어진 청바지에 분홍색 운동화, 몸에 착 달라붙는 흰색 티셔츠에 노란색 모자를 쓰고 있었다. 새내기 대학생처럼 어려 보였다. 나보다 한 살 더 많다는 게 도저히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주문 안 하셨지요. 이 집 커피 맛있는데 한잔 하실래요?"
"상범씨 우리 커피 보다는 칵테일 한잔 하지요. 이 집 분위기를 보니 커피보다는 아무래도 칵테일 한잔 해야 할 것 같아요."

자주 가던 음악카페 '집시'였다. 음악다방이나 음악카페가 거의 다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 집에만은 끈질기게 DJ박스가 있었고 잘생긴 DJ가 손님들 신청곡을 재미있는 사연과 함께 틀어줬다. 가끔은 아마추어 가수가 나와서 통기타를 치며 노래도 불렀다.

칵테일로 시작된 술은 맥주로 그 다음엔 소주로 이어졌다. 다시 감성이 지배하는 시간이 온 것이다. 난 인호와 정말 사귀는 게 아니냐고 몇 번을 물었다. 그녀는 그때마다 아니라고 그저 친구 동생일 뿐이라고 대답했다.

그날 밤 난 양재동에 있는 사무실에 출근하겠다고 그녀와 약속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집요하게 설득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나와 함께 일하고 싶다"고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 던졌을 뿐이다. 이미 내 마음이 화려해 보이는 사무실로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아침, 난 그녀와 손을 잡고 여관에서 함께 걸어나왔다. 처음이라고 하자 고윤희는 깜짝 놀랐다. 그 나이 먹도록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몇 번을 물었다. 그녀는 능수능란했다. 지칠 사이도 주지 않고 몇 번을 몰아쳐서 절정에 이르게 했다. 고윤희 몸이 뱀처럼 내 몸을 감았다 풀 때마다 난 쾌락의 끝을 맛볼 수 있었다.


태그:#하얀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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