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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26일부터 30일까지 부산 벡스코에서 개최된 제10차 아시아태평양 에이즈대회(ICAAP)에서 참여자들이 한미FTA 반대시위를 벌이고 있다.
▲ 제10차 아시아태평양 에이즈대회 2011년 8월 26일부터 30일까지 부산 벡스코에서 개최된 제10차 아시아태평양 에이즈대회(ICAAP)에서 참여자들이 한미FTA 반대시위를 벌이고 있다.
ⓒ 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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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FTA 비준안이 한나라당에 의해 날치기로 통과되고 있을 무렵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저녁에 예정되어 있던 HIV/AIDS 관련 회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12월 1일 '세계 에이즈의 날'에 맞춰 진행될 기자회견도 기획해야 했고, 올 한 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에이즈 10대 뉴스'를 논의해야 했기 때문에 뉴스를 검색해볼 시간조차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함께 활동하고 있는 동료들로부터 문자가 도착하기 시작했고, 그 어떤 논의보다 한미FTA 비준 무효 투쟁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너나할 것 없이 여의도 국회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HIV/AIDS 감염인들과 함께 '생명은 상품이 아니다'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다시 거리로 나갔다.

한미FTA 비준안이 통과된 다음 날인 23일 보건복지부는 한미FTA 발효로 시행되는 의약품 허가특허 연계제도와 약값 부담 증가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제약업계의 손실은 있겠지만 3년이라는 유예기간 동안 제약업계의 경쟁력을 강화시키면 큰 무리가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국내 제약업계의 주식은 보기 좋게 떨어졌고 3년이라는 유예기간이 무색할 정도로 복제약 생산에 의존하고 있는 제약업계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모든 언론에서 국내 제약업계의 이윤이 줄어들까 걱정하고 있지만 문제는 제약업계가 아니라 치솟는 약값과 건강을 지금 당장 걱정해야 하는 환자들이다.

사실 나의 상식으로는 생명과 직결되어 있는 의약품에 특허가 있다는 사실이 잘 납득되지 않는다. 그리고 특허 때문에 값싼 약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은 더더욱 이해할 수가 없다. 값싼 복제약을 만들어 더 많은 곳에 보급할 수 있다면 가난 때문에 아파도 치료받을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약값에 대한 건강보험 부담률 부담도 낮아질 것이고, 이를 통해 우리와 같은 국민들이 납부하는 보험료와 세금을 제약회사 주머니가 아니라 건강보험 보장성을 확대하는 데 사용할 수 있고 보험료 인상률을 줄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미FTA는 끔찍한 괴물처럼 모든 상식을 망쳐놓았다. 물론 이전부터 의약품에 대한 특허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한미FTA는 의약품 특허기간을 더 연장하여 이 기간이 끝나야만 값싼 복제약을 만들 수 있다. 약값을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제약회사가 '독립적 검토 기구'를 통해 약값이 마음이 안 든다고 이의를 제기하면 무로 돌아갈 수도 있다.

허가특허 연계제는 미국제약사뿐만 아니라 EU 등 모든 제약사에 적용되는 것이기에 결국 다국적 제약업계의 힘과 요구, 그들의 이윤에 따라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오리지널 약을 생산할 있는 제약업계만을 배부르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의약품에 의존하는 환자들에게 그 피해가 직접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오죽하면 미국의 다국적제약회사협회가 한미FTA를 환영하는 성명을 발표했겠는가! 

환자들에게 돌아올 피해 걱정... '한미FTA 괴물' 거부해야 하는 이유

내가 의약품에도 특허가 있고 특허로 인해 쉽게 복제약을 만들지 못한다는 말을 처음으로 들었던 시기는 2003년 HIV/AIDS인권연대 나누리+라는 단체를 처음으로 결성하면서부터다. 2001년 백혈병 환자들이 노바티스라는 다국적 제약회사의 횡포에 맞서 약값인하 투쟁을 벌이고 있을 때도 여러 경로를 통해 알고는 있었지만 당장 내가 아프지 않았기 때문에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내 주변에 에이즈 치료제를 처방받아 복용하고 있는 친구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진실을 알게 되었다. 정점을 찍었을 때는 함께 활동하던 에이즈 감염인이 1, 2차 치료제에 내성이 생기면서 3차 치료제 푸제온이라는 약이 필요했을 때다. 이 약은 그에게 생명과도 같았다. 목숨을 잃을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었다.

푸제온이라는 치료제는 보험등재까지 되었지만 로슈라는 다국적 제약회사는 자신의 이익 기준에 맞는 약값이 책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공급을 거부했다. 약이 필요한 환자의 생명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제약회사는 한국보다 더 큰 시장을 위해 가격인하 대신 무상공급이라는 편법을 썼다. 당시 특허청에 제기됐던 복제약 생산을 위한 강제실시 청구도 기각되었고 푸제온은 지금도 여전히 건강보험을 통해 공급되지 않고 있다. 

얼마 전부터는 나와 오랜 시간동안 함께 지내온 파트너가 에이즈 치료제 복용을 시작했다. 면역력이 저하되면서 치료제 복용을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부작용을 견디지 못해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약을 처방받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다행히 부작용이 심하지 않다. 하루 두 번 치료제를 복용한다. 한 번 병원에 가면 2~3개월에 해당하는 많은 약을 받아온다. 진료비 청구서를 보면 200만 원이 넘는 비용이 체크되어 있다. 아직까지는 건강보험공단과 정부의 약값 지원으로 부담없이 치료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한미FTA는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지금의 지원정책을 서서히 파괴할 것이다.

더불어 약의 독점이 강화돼 치료에 필요한 약이 존재해도 접근하지 못하는 환자들이 생겨날 가능성도 있다. 정부의 말처럼 당장은 우려하는 부분이 생기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다국적제약회사가 턱없이 높은 약값을 요구하고 이것이 정부에서 수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면 모든 부담은 국민에게, 환자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진료비 청구서에 적혀 있는 수백만 원의 약값을 환자가 직접 지불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의 파트너처럼 의료급여 대상자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높은 비용의 치료비를 지불하라는 것은 치료받지 말라는 말과 똑같은 이야기 아닌가.

이와 같은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한미FTA는 반드시 폐기되어야 한다. 평생 약 먹지 않고 안 아플 자신이 있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이 문제는 지금 당장 위기에 놓인 HIV/AIDS 감염인들뿐만 아니라 나의 문제가 될 수도 있다. 한미FTA는 우리의 삶과 건강을 송두리째 앗아갈 수도 있는 괴물이다. 우리의 미래와 건강을 함부로 거래할 수 없다는 당당하고 당연한 요구를 함께 했으면 한다.

덧붙이는 글 | 정욜씨는 HIV/AIDS인권연대 나누리+, 동성애자인권연대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태그:#한미FTA, #HIV/AIDS, #나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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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재단 사람,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한국HIV/AIDS감염인연합회 KNP+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무지개의 힘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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