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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에 앞서 감독의 얘기를 듣고 있는 선수들
▲ 피닉스 야구단 1 경기에 앞서 감독의 얘기를 듣고 있는 선수들
ⓒ 육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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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안구 피닉스. 아들이 뛰는 경기 안양시 리틀야구단 이름이다. 2010년 9월 창단해 얼마 전 조촐한 1주년 기념식도 치렀다. 피닉스 야구단은 그동안 전국대회만 10여 차례 출전했다. 아쉽게도 지금껏 단 1승을 거두지 못한 채 거의 모든 게임을 콜드게임으로 패했다. 지난여름 강원도 지역 신생팀을 만나 내심 첫 승을 기대했으나 폭우로 경기는 취소됐고 추첨 끝에 분패했다. 또 지난주엔 행운의 대진표로 2회전에 올랐으나 승패 기록과 무관한 부전승이었다.

어지간한 리틀야구단은 선수반과 취미반을 별도로 운영한다. 선수반은 말 그대로 대회 출전을 목표로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훈련한다. 반면 취미반은 야구 자체를 놀이로 즐기는 어린이 체육교실 분위기다. 그런데 피닉스 야구단은 전원이 선수반이면서 동시에 취미반이다. 저학년과 고학년으로 나누어 주말과 휴일에만 두 시간 정도 몸을 풀고 해산한다. 대회 때마다 멤버가 달라지고 주전도 따로 없다. 등록선수가 개인사정을 이유로 시합에 빠지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나름 승부욕이 강한 아들은 피닉스의 부진이 안타까운 모양이다. 매번 시합이 끝나면 경기내용을 곱씹으며 분을 삭이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열두 살 어린이에게 "세상에는 이기고 지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말하곤 한다. 아들은 야구보다 축구를 사랑하는 아빠의 훈수를 흘려들을 때가 많지만, 아빠가 한때 스포츠 기자로 야구장을 출입한 적도 있다는 사실에 눈빛을 반짝이곤 한다. 아들이 미끼를 물면 아빠는 전설의 야구부를 소개한다.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한 1982년. 인천을 연고로 탄생한 삼미 슈퍼스타즈는 전기리그 10승 30패, 후기리그 5승 35패라는 처참한 기록을 남겼다. 소설가 박민규는 그 믿기지 않는 패배의 역사 속에서 인생의 낙오자들이 도리어 무한경쟁 사회를 조롱하는 블랙 코미디를 끌어냈다. 아들은 비록 삼미 슈퍼스타즈라는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지만, 아빠의 얘기 속에서 "패하더라도 행복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발견하는 모양이다.

아빠는 28년간 무려 199연패를 당한 뒤 1승을 건져 올린 서울대 야구부도 알려주었다. 아들은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되묻지만, 아들이 소속된 피닉스도 현재까지는 유사한 길을 걷고 있다. 아빠는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에 나서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사람들에게 승패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도 곁들인다. 이 대목에서 아들은 고개를 젓고 아빠의 품을 멀찍이 벗어난다. 일단 경기장에 들어가면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게 아들의 생각이다.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고 아빠도 그렇게 살고 있다.

포수로 출전한 아들
▲ 피닉스 야구단 2 포수로 출전한 아들
ⓒ 육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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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LG트윈스의 열성팬이다. 8년째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지 못하는 팀에 실망한 나머지 밥을 굶기도 했다. 얼마 전엔 LG가 연장전 역전패를 당하자 "이런 야구가 어디 있느냐?"며 펑펑 울기까지 했는데, 따지고 보면 이 세상 도처에 지천으로 널린 게 그렇고 그런 '정글의 야구 게임'이다. 나는 우는 아들을 달래가며 LG의 전성시대를 자료화면으로 보여주고, 사람이든 야구든 좋을 때와 나쁠 때가 있기 마련이라고 일러주었다. 아들은 그날 밤 LG 트윈스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감독이 바로 지금의 서울대 야구부 이광환 감독이라는 사실에서 위안을 찾는 모습이었다.

아들은 이번 달부터 피닉스 야구단의 주전 포수가 되었다. 던지고 때리는 것만이 야구의 전부로 알았던 아들이 팀플레이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빠는 포수가 왜 '안방마님' 또는 '살림꾼'으로 불리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투수의 공을 받는 것도 포수요, 수비수와 작전을 짜는 것도 포수요, 그라운드 전체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것도 포수라고 했다. 역대 우승팀에는 모두 좋은 포수가 있었다는 야구의 불문율까지 제시하자 아들은 어깨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아들은 지난 일요일 처음 주전으로 출전한 전국대회에서 포수 마스크를 썼다. 3회까지는 그런대로 잘 버텨내더니 4회부터 무너져 또 다시 콜드게임으로 끝났다. 그날 피닉스는 단 한 개의 안타도 뽑아내지 못한 채 13대0으로 졌다. 아들은 9번 타자로 두 차례 타석에 들어서 볼넷 하나를 고르고 삼진 하나를 먹었다. 기가 죽을 만도 했으나 아들은 주눅 들지 않았다. 아들은 "덩치가 고등학생만한 투수의 공이 빠르긴 했지만 다음엔 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완패의 상처를 빠르게 털어내는 모습에서 삼미 슈퍼스타즈의 열정을, 그리고 서울대 야구부의 투혼을 살짝 엿보았다. 야구보다 축구를 사랑하는 내가 북까지 두드려가며 피닉스의 마지막 팬클럽을 자청하는 이유다.


태그:#리틀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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