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프랑스의 한 책방 안 모습.
 프랑스의 한 책방 안 모습.
ⓒ 한경미

관련사진보기


프랑스에서는 어디서나 책을 접할 수 있다. 도시이건 시골이건 새로 도착하는 기차역의 간이 서점을 비롯한 다양한 서점과 대형 문화상품 판매 공간, 대형 할인매장 등 프랑스인이 책을 접할 수 있는 장소는 부지기수다. 바로 이런 이유로, 전반적인 경제 침체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서적시장은 1년에 평균 3%의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의 서적시장이 늘 이렇게 활기찬 모습을 보인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 서적시장의 활성화에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은 도서정가제이다. 프랑스에서도 1970년대까지는 책이 다른 제품들처럼 자유경쟁 가격제도 아래 있었다. 그 결과 대형 서점의 마구잡이 할인 정책으로 작은 서점들이 위기에 몰렸다. 그러자 작은 서점 주인들과 소규모 출판사 운영자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1981년 미테랑 정부가 들어서면서 도서정가제 법안인 '랑법'이 채택되는데 이로써 작은 서점들도 살 방법이 마련되었다.

당시 도서정가제가 도입될 수 있었던 것은 '책은 다른 제품과 다른 문화상품'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프랑스에서는 문화 살리기 정책의 일환으로 도서정가제 법이 만들어졌다. 이 법이 채택되지 않았다면 작은 서점들이 거의 전멸했을 것이라는 게 서점상들의 하나같은 의견이다. 당시 정가제가 도입되지 않은 디스크의 경우 지금은 소규모 가게가 전멸한 사실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30년 전 만들어진 랑법, 작은 서점을 구하다

도서정가제 법이 순탄하게 정착한 것은 아니었다. 법 제정 직후 대형 문화상품 판매 공간과 대형 할인매장은 이 법에 저항했다. 자본력에 자신이 있던 이 업체들은 법을 무시하고 이전처럼 할인율을 20%까지 높였다. 그러자 프랑스 정부는 1982년 12월 도서정가제 법을 위반하면 벌금을 내게 하겠다고 한 데 이어, 1985년에는 처벌 강도를 높이는 방안을 발표했다. 위법 사례가 발생할수록 정부가 법을 더 강화하고 엄격히 적용한 것이다.

랑법 1조는 도서정가제 법을 모든 도서에 적용하고 서점상에게 5%의 할인을 허용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서점상은 보통 단골 고객에게 책값을 할인해주는데, 10권을 사면 5% 할인해주는 것이 통례이다.

랑법에는 도서정가제를 적용하지 않는 예외 조항도 있었다. 랑법 3조는 독서를 권장하는 의미에서 공공도서관이나 국가기관 혹은 기업 소속 도서실 등에 납품하는 책과 학습용 책에 한해 자유가격 제도를 허락했다.

그런데 1990년대 들어 이 예외 규정을 악용해 공공도서관에 들어가는 책의 할인율이 점점 높아졌다. 많은 서점이 높아진 할인율을 받아들이고 이윤을 줄여야 했다. 이를 거부하면 영업 실적이 저조해지는 일도 생겨났다. 1992~2003년 사이에 공공도서관 납품 서적의 할인율은 15.5%에서 18.5%로 높아졌다. 이 기간 중 공공도서관의 도서 구매가 2배로 늘었음에도 서점들이 이들 단체에 책을 판매해 버는 금액이 영업 실적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2%에서 19%로 하락하였다.

프랑스 정부는 이런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2003년 6월 공공도서관에 들어가는 책의 최고 할인율을 9%로 하도록 법을 개정했다. 이로써 상황이 조금 안정이 되는 듯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일부 지역 자치단체에서 고등학교 학습용 서적을 무료로 지급하는 일이 발생했다. 학습용 서적에도 최고 할인율 규정을 적용하자는 의견이 대두됐으나, 학습용 도서 출판사들이 '그렇게 하면 시장의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다'고 반발해 실행되지 못했다.

이밖에도 랑법에는 특별 할인 조항이 명시되어 있다. 발간된 지 2년이 지났고 서점에서 6개월 이상 보유하고 있는 책에 한해서는 서점상이 자유롭게 할인율을 정할 수 있게 한 것이다(랑법 5조). 그러나 한 서점상은 실제로는 이런 할인을 적용하는 서점이 거의 없다고 밝혔다. 발간된 지 2년 이상 된 책을 6개월 이상 보관하고 있는 서점상이 거의 없으며 그전에 이미 출판사에 책을 반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랑법 7조는 도서 판매 장소 이외에서 도서 할인 판매 광고를 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프랑스의 도서정가제 법은 많은 상인들에게 책 판매를 허용하였다. 판매구조가 서로 다른 상인들이 상점 한구석에 책을 갖다 놓고 파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격 경쟁이 필요 없기 때문에 자신의 가게에 적합한 책 선별 등 나름의 판매 전략만 갖추면 된다.

대형 문화상품 판매 공간 중 하나인 비르진(Virgin).
 대형 문화상품 판매 공간 중 하나인 비르진(Virgin).
ⓒ 한경미

관련사진보기


베스트셀러와 실용서 이외의 책들 살리려면 철저한 도서정가제가 필수

프랑스에서 책을 구매할 수 있는 곳은 크게 3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가 서점, 두 번째가 프낙(FNAC)이나 비르진(Virgin) 등의 대형 문화상품 판매 공간, 세 번째가 까르푸 등의 대형 할인매장이다. 여기에 인터넷 구매나 통신 판매 등을 포함하면 도서 구입 경로는 더욱 다양해진다.

프랑스인들이 책을 살 때 가장 많이 이용하는 장소인 서점은 전체 도서 판매의 17.7%(이하 2007년 TNS-Sofres 여론조사 자료)를 차지하고 있다. 발간된 지 오래되어 구하기 힘든 책이나 문학, 예술, 사회과학, 철학 등 전문 서적이 주로 서점에서 판매된다. 여기에 백화점 내 서점의 판매량(0.3%)과 신문상 및 '문방구 서점'의 판매량(6.4%)을 합하면 넓은 의미의 서점에서 판매되는 책은 전체 도서 판매량의 24.4%에 이른다.

프랑스인들의 두 번째 도서 구매 장소는 대형 문화상품 판매 공간으로 도서 판매량 중 21.2%가 이곳에서 팔린다. 프랑스에는 이런 장소가 400여 군데 되는데, 주로 신간이나 판매 실적이 좋은 책이 구비되어 있다. 파리의 프낙(FNAC)에는 10만여 권, 지방의 프낙에는 1만5000~5만여 권, 르클레르 문화 공간이나 지방의 비르진(Virgin) 같은 곳에는 2만~3만여 권이 구비되어 있다. 이런 대형 문화상품 판매 공간은 주로 CD, DVD, 도서 등을 취급하는데 이 중 책이 전체 판매실적의 20~35%를 차지한다.

프랑스인들이 책을 사는 세 번째 장소는 까르푸 같은 대형 할인매장이다. 이곳에는 대개 5000~2만여 권이 구비되어 있다. 주로 문고판, 청소년용 책, 사전류, 실용서 학습용 책이다.

프랑스 도서 판매량 중 공공 도서관이나 학교 등 단체에 파는 비율은 10%, 도서 할인 판매점(잘 팔리지 않아 출판사에서 할인을 결정한 책을 취급하는 곳인데, 출판사에서 할인을 결정하는 건 매우 드문 일이다)이나 중고서점은 1.4%에 해당한다.

또한 인터넷 도서 구매가 최근 급속하게 성장했다. 아마존, 알라파즈 등의 사이트를 통해 책을 산 실적이 2000년에는 프랑스 도서 판매량의 0.9%였으나 2007년에는 8%로 증가했다. 그러나 이것은 통신 판매만 하는 도서 판매망의 인터넷 구매도 포함한 수치로, 이를 제외하면 실제 인터넷을 통한 도서 구매율은 7%에 못 미친다. 인터넷 판매에도 도서정가제가 적용되기 때문에 굳이 인터넷으로 몰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긴 안목으로 보면, 책을 지속적으로 할인하는 시스템은 순환이 빠른 베스트셀러나 처세술 등의 실용서만 살아남게 하고 순환은 느리지만 영구적인 가치를 내재한 책들을 도태시킨다.

이와 달리 도서정가제가 법으로 규정된 프랑스에서 서적상들은 가격 경쟁에서 상당 부분 자유로워져, 발간된 지 오래된 책, 문학과 예술 등 전문 서적을 오랫동안 판매하는 등 자신만의 판매 전략을 구사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프랑스의 도서정가제 법은 작가, 출판인, 도서산업 종사자, 서점상, 독자 등 많은 이에게 환영 받는 시스템으로 정착했다. 프랑스처럼 도서정가제를 실시하는 나라는 여럿 있다. 한국서점조합연합회의 2005년 자료에 따르면, OECD 회원인 30개 국가 중 16개 나라가 도서정가제를 실시하고 있다.

한국도 이 16개 국가 중 하나이지만 한국의 도서정가제는 여러 가지 틈새가 많아 사실상 유명무실하다는 비판이 많다. 이와 달리 프랑스의 랑법은 도서정가제를 규정한 법률의 전형으로 꼽힌다. 랑법이 제정된 후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주요 국가들이 자국의 도서정가제를 법으로 규정한 것에서도 이 점은 잘 드러난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일반적으로 한 권의 책이 팔리면 작가에게 8%, 출판사에게 21%, 책 발행인에게 15%, 판매자에게 36%, 배달에 12%, 영업 활동에 8%가 돌아간다.

통신 판매를 위주로 하는 프랑스 로와지르(France Loisirs,. 프랑스 여가라는 뜻). 자체 판매망도 갖고 있다.
 통신 판매를 위주로 하는 프랑스 로와지르(France Loisirs,. 프랑스 여가라는 뜻). 자체 판매망도 갖고 있다.
ⓒ 한경미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한국서점조합연합회에서 발행하는 <서점신문>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도서정가제, #랑법, #프랑스, #책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번역가, 자유기고가, 시네아스트 활동 중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