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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의 반대에도 KBS가 24, 25일 이틀간에 걸쳐 '백선엽 특집방송'을 방영했습니다. 24일엔 제1부 '기억의 파편을 찾아서', 25일엔 제2부 '싸움의 능선을 넘어서'. 이틀간의 방송을 본 소감은 한마디로 말해 당초 시민사회의 우려를 사실로 입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KBS의 '백선엽 특집방송'은 백선엽의 공과를 균형 있게 다루기는커녕 일방적으로 그를 '전쟁영웅'으로 찬양하는 데 그쳤다는 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이번 프로에서 논란의 핵심인 그의 친일전력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에 그쳤습니다. 24일 방영된 제1편에서 백선엽이 지휘하던 제1사단의 평양 입성(1950년 10월 19일)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백선엽이 평양에서 자랐고 이후 만주군관학교 입학해 일본군 장교를 지냈으며, 이 전력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고 언급한 게 전부였습니다.

친일전력의 핵심이랄 수 있는 간도특설대 근무 경력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으며, 이어 곧바로 "민족주의자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활동했다"고 얼버무리고 넘어갔습니다.     

한국전쟁 61주년을 맞아 KBS가 지난 24~25일 이틀간에 걸쳐 2부작으로 방영한 '전쟁과 군인'에 출연한 백선엽씨.
▲ KBS의 '백선엽 특집방송' 한국전쟁 61주년을 맞아 KBS가 지난 24~25일 이틀간에 걸쳐 2부작으로 방영한 '전쟁과 군인'에 출연한 백선엽씨.
ⓒ KBS 화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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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 미화'의 결정판이랄 수 있는 이번 KBS의 특집방송은 최근 우리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이승만, 박정희 미화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이미 수 년 전부터 착착 준비돼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허물이나 비판요소는 덮어둔 채 동상 건립이나 각종 찬양행사, 기념비 건립 등이 그것입니다.

혹자는 '백선엽 미화'를 통해 박정희의 '친일'과 이승만의 '독재'를 흔히 희석시키려는 의도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군부를 중심으로 그간 진행된 백선엽 미화 작업의 실태가 이를 증명하고 있는 셈입니다.

백선엽은 이미 알려진 대로 만주 봉천군관학교 9기생 출신으로 독립군 토벌부대인 '간도특설대' 근무 중 해방을 맞았습니다. 귀국 후 미군정이 세운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후 한국군 장교로 변신했습니다. 1948년 '여순사건'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장으로 숙군(肅軍) 책임자였던 그는 박정희 구명운동에 앞장섰으며, 한국전쟁 때는 제1사단장으로 낙동강 전선의 다부동전투를 지휘하였습니다.

이같은 공로로 그는 불과 33세 때 한국군으로서는 첫 4성 장군에 올랐습니다. 이밖에도 그는 육군참모총장을 두 번이나 역임하였으며 한국군 현대화에 공로가 크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민간인 희생 불러온 '쥐잡기 작전'을 기념하는 공적비

백선엽을 기리는 첫 기념물은 전북 남원의 명물 광한루 경내에 들어섰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탄신 80회를 맞은 1955년 5월 15일 이승만의 지시로 이곳에 '공적비'를 세웠습니다. 그의 '공적'이란 한국전쟁 당시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토벌 공로를 일컫습니다. 1951년 말 미군은 지리산 빨치산 토벌임무를 백선엽 당시 1군단장에게 맡기고는 사령부 명칭을 그의 이름을 따 '백(白)야전전투사령부'로 불렀습니다.

당시 그가 붙인 작전명은 '쥐잡기 작전'(Operation Rat Kill)으로, 이는 지리산을 포위해 토끼몰이식으로 주민을 소개(疏開)하고 먹을 것을 없애 고사시키는 방식이었습니다. 이같은 무리한 작전으로 인해 무고한 민간인 다수를 희생시켰다는 증언이 최근 보도된 바 있습니다(그의 공적비는 1987년 6월 6일 토벌 현장인 지리산 뱀사골로 옮겨졌습니다).

빨치산 토벌 현장인 지리산 뱀사골에 있는 백선엽의 빨치산 토벌 공적비
▲ 백선엽의 '빨치산 토벌 공적비' 빨치산 토벌 현장인 지리산 뱀사골에 있는 백선엽의 빨치산 토벌 공적비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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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곳에는 백선엽 이외에도 2명의 토벌공로자 공적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전경사령관 신상묵, 경무관 최치환이 바로 그들입니다. 신상묵(辛相默)은 대구사범학교 5기생 출신으로 박정희의 1기 후배이며, 그 역시 박정희·백선엽처럼 교사 근무 중 일본군에 자원입대했습니다. 해방 후 신상묵은 1946년 국립경찰 양성 1기로 미군정 하의 경찰에 투신하였는데, 열린우리당 의장을 지낸 신기남 전 의원이 그의 아들입니다. 수 년 전 그의 친일행적이 말썽이 돼 신 의원이 당직에서 하차해야만 했습니다.

최치환(崔致煥)은 만주군관학교(滿洲軍官學校) 출신으로 그 역시 해방 후 경찰에 투신하여 서울시 경찰국장을 지냈습니다. 이들 3인 모두 친일전력이 있는 인물들입니다.

'다부동전투' 기리는 공적비가 두 개 더

백선엽의 대표적인 전공(戰功)은 6·25 61주년인 지난 25일 폭우로 무너져 내린 '호국의 다리(일명 왜관철교)' 일대에서의 '다부동전투'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휴전선을 남침한 북한군은 열세인 국군을 물리치고 3일 만인 6월 28일 수도 서울을, 7월 말 목포와 진주, 8월 초 김천과 포항을 파죽지세로 함락시켰습니다.

급기야 국군과 미군은 마산-왜관-영덕을 잇는 낙동강 방어선을 쳤는데, 이 가운데서도 칠곡 다부동은 전략상 가장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이에 북한군은 다부동 일대에 3개 사단, 약 21500명의 병력을 투입해 필사적인 공격을 펼쳤고, 이에 맞서 국군 제1사단은 화력의 열세에도 북한군의 '8월 총공세'를 저지하여 대구를 고수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9월 15일 맥아더 원수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의 보급로가 차단되고 동시에 낙동강방어선에서 국군과 미군의 총반격이 개시되면서 한때 적의 수중에 들어갔던 다부동을 탈환하였습니다. 이후 국군은 기세를 살려 북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데 이어 백선엽이 지휘하던 1사단은 10월 19일 평양에 입성하였습니다.

이 같은 국면전환은 다부동전투에서 북한군 3개 사단을 격멸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한국전쟁을 통틀어 가장 전투가 치열했던 다부동전투의 현장인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유학산(遊鶴山) 기슭에는 국군 제1사단의 전공을 기려 1981년 다부동전적비가 세워졌습니다.

다부동전투 당시 1사단이 머물렀던 칠곡 동명초등 교정에 세워진 백선엽 전적비(1973년 건립)
▲ 백선엽의 '다부동전투 전적비' 다부동전투 당시 1사단이 머물렀던 칠곡 동명초등 교정에 세워진 백선엽 전적비(1973년 건립)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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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는 별개로 칠곡군에는 백선엽의 전공을 기리는 기념비가 두 곳에 서 있습니다. 하나는 1973년 9월 칠곡군 유지들이 군내 동명면 소재 동명초등학교 교정에 세운 '백선엽 전적비'가 그것인데, 이곳은 당시 국군 1사단 사령부가 위치했던 곳입니다.

또 하나는 지난 1981년 다부동 전적지에 세운 백선엽 공적비가 그것인데 비석 전면에는 '대한민국 제1사단장 육군준장 백선엽 호국구민비(大韓民國第一師團長陸軍准將白善燁護國救民碑)'(높이 135㎝, 두께 16㎝, 너비 25㎝)라고 새겨져 있어 흔히 '호국구민비'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 비석은 당초 가산면 다부리 414-5번지에 있던 것을 지난 2003년 7월 '다부동전적기념관' 경내로 이전하였습니다.

이 두 기념비의 경우 그의 전공을 기린 것으로 크게 논란까지 될 것은 없어 보입니다.

'백선엽장군실' 비난... 구색 맞추려 '안중근장군실' 만들었다?

다부동전투 현장에 세워졌다가 지난 2003년 다부동전적기념관 경내로 옮겨진 '백선엽 호국구민비'
▲ 백선엽 '호국구민비' 다부동전투 현장에 세워졌다가 지난 2003년 다부동전적기념관 경내로 옮겨진 '백선엽 호국구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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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후부터 진행된 과도한 '백선엽 미화'입니다. 특히 미화의 양태나 방식도 다양할 뿐더러 최근까지도 지속적으로 추진돼오고 있어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미화 작업의 첫 테이프는 그의 친정이랄 수 있는 육군본부가 끊었습니다.
육군본부는 옛 참모총장 접견실을 개조한 후 이 방을 그의 이름을 따 '백선엽 장군실'로 명명한 후 2005년 3월 28일 개관식을 가졌습니다. 특정인물을 기념해 기념비나 동상을 세우는 경우는 더러 있었지만 정부기관의 청사 내에 특정인의 이름을 딴 방을 만드는 경우는 처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인지 '백선엽 장군실'은 따가운 비판에 직면했습니다. '백선엽 미화'라는 지적이 그것이었습니다.

이에 육군본부가 대안으로 내놓은 것이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였습니다. 육군본부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하루 앞둔 2010년 3월 25일 '안중근 장군실' 개관식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세간의 시선은 그리 곱지 않았습니다. 순서나 공적으로 봐도 안중근 의사가 당연히 먼저였어야 옳았는데 뒤늦게 안중근 장군실을 만든 것은 '구색맞추기'였다는 지적이 그것입니다.

백선엽장군실 개관식. 남재준 육군참모총장(왼쪽 두번째)과 백선엽 예비역장군(왼쪽 세번째)이 2005년 3월 28일 충남 계룡시 육군본부에서 열린 백선엽장군실(구 참모총장 접견실) 개관식에 참석, 테이프를 절단하고 있다
 백선엽장군실 개관식. 남재준 육군참모총장(왼쪽 두번째)과 백선엽 예비역장군(왼쪽 세번째)이 2005년 3월 28일 충남 계룡시 육군본부에서 열린 백선엽장군실(구 참모총장 접견실) 개관식에 참석, 테이프를 절단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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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육군 제1사단은 안중근장군실 개관 보름 전인 2010년 3월 9일 사단 사령부에서 또 하나의 백선엽 기념물을 제막했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1사단은 이날 사단 내 전진광장에서 백선엽 공적기념물 제막식을 가졌는데 그는 이날 제막식에는 백선엽도 참석했습니다. 기념물은 사단 약사와 6·25 전투경과를 기록한 1점, 백선엽의 공적을 새긴 1점 등 모두 10점의 기념석으로 구성돼 있는데, 그 가운데서 백선엽 기념물이 가장 돋보이는 편입니다.

군복 차림의 얼굴 사진과 함께 정면 한가운데에 배치했기 때문입니다. 1사단 측은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선배 전우들이 이룬 자랑스러운 부대 역사와 공적을 기리기 위해 기념물을 제작했다"고 하나 역대 사단장 가운데 그를 특별히 부각시킨 점은 '백선엽 미화작업'의 하나로 보기에 충분합니다.

지난해 3월 육군 제1사단 사령부에서 열린 '백선엽 기념공적물' 제막식에 참석한 백선엽씨(가운데 양복 차림)가 참가자들과 함께 합장한 모습
 지난해 3월 육군 제1사단 사령부에서 열린 '백선엽 기념공적물' 제막식에 참석한 백선엽씨(가운데 양복 차림)가 참가자들과 함께 합장한 모습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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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 '명예원수'로 추대한 국방부... '미화'의 극치

육군본부에 이어 이번에는 국방부가 본격적으로 나섰습니다. 지난해 국방부는 한국전쟁 60돌을 맞아 기념사업의 하나로 백선엽(예비역 대장)을 명예원수로 추대하는 방안을 추진했습니다. 원수(元帥)는 5성 장군, 즉 '별 다섯 개'를 단 장군을 말합니다.

'원수'는 한국전쟁 당시 연합군을 지휘한 맥아더 원수처럼 전시에나 볼 수 있는 계급이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현역 5성 계급의 지위는 극히 소수의 나라에만 존재하며, 우리보다 화력이나 병력수 면에서 규모가 큰 미군에도 원수 계급의 장성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국방부가 비록 '명예'를 붙였다고는 하나 그에게 '원수' 추대를 추진한 것은 '백선엽 미화'의 극치였다고 하겠습니다.

국방부는 지난해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백선엽 씨를 '명예원수'로 추대하려 했으나 군 원로 등 반대에 부닥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국방부는 지난해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백선엽 씨를 '명예원수'로 추대하려 했으나 군 원로 등 반대에 부닥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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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수는 반발을 불러오기 마련입니다. 그가 일제 때 만주국 중위로 복무하면서 간도특설대에서 항일유격활동을 진압했던 '친일행적'이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한 것입니다. 일반 국민들은 물론 심지어 일부 군 원로들도 그의 '명예원수' 추대를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국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인 광복군을 정신적 뿌리로 하고 있는데, 친일전력이 있는 그를 '명예원수'로 추대할 경우 건군이념을 정면으로 훼손하는 결과가 되는 셈이죠.한국전쟁 참전 군 원로들의 반발도 만만찮았습니다. 그들은 "백선엽 장군 혼자 싸운 게 아니라 전부 도와서 싸웠다. 혼자만 원수 자격이 있느냐"며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결국 국방부는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미흡하다"며 꼬리를 내리고 말았습니다. 

한편 충남대는 지난해 6월 9일 '창군 원로이자 6·25전쟁 영웅'인 백선엽에게 '명예 군사학박사' 학위를 수여했습니다. 국군 창설에 참여해 창군의 기초를 닦았고, 다부동전투와 평양 입성을 대표적 공적으로 들었습니다.

기업인도 받고 정치인도 더러 받는 명예박사니 굳이 이것까지를 토 달 필요는 없다고 치더라도 파주시에서 줄기차게 그의 동상 건립을 추진해온 점은 가벼이 보기 어렵습니다. 지난 역사 속에서 우리는 논란의 대상인 인물의 동상은 결국 철거되거나 두고두고 말썽이 돼온 사실을 수도 없이 많이 목격해 왔기 때문입니다.

파주시가 주도해서 세운 '6·25참전기념비'가 한국전쟁 발발 61주년인 지난 25일 임진각에서 제막됐습니다. 이 부조물에는 백선엽을 중심으로 그를 따르는 참전용사와 학도의용군들이 진격하는 장면이 새겨져 있어 백선엽이 이 기념비의 '포인트'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간 기념비 제막식이 있기까지 파주 지역사회에서 적잖은 잡음이 있었는데 이는 '백선엽 미화'를 둘러싼 논란이었습니다. 당초 파주시에서 세우려고 했던 것은 이같은 부조물이 아니라 백선엽의 동상 건립이었습니다. 그러나 지역 시민사회단체의 반발에 부닥치자 결국 동상 건립을 포기하였습니다.

파주시는 지난 25일 시민사회단체의 반대를 무릅쓰고 임진각에서 백선엽을 부각시킨 기념 부조물을 제막식을 가졌다.
▲ 동상 대신 건립된 '백선엽 부조물' 파주시는 지난 25일 시민사회단체의 반대를 무릅쓰고 임진각에서 백선엽을 부각시킨 기념 부조물을 제막식을 가졌다.
ⓒ 파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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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과'가 교차된 인물 미화 작업, 또 다른 논란 낳을 뿐

백선엽 동상 건립을 강력하게 추진해온 사람은 이인재(51) 파주시장. 그는 민주당 출신이지만 '안보에 관해서는 보수꼴통'을 자처하며 "어떤 이념과 논리도 국가안보보다 우선할 수 없다"고 주장해온 것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작년 7월 1일 부임한 이 시장이 백선엽 동상 건립을 구상하게 된 계기는 "6·25의 실상을 모르는 후대에게 안보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북한과 접경인 파주의 시장으로서 뭔가를 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접경지대의 단체장으로서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 시장은 백선엽에 대한 다각도의 판단은 부족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결국 반발을 사게 된 것입니다.

작년 11월 파주시는 이인재 시장 등 선양사업추진위원 20여 명이 참석해 선양비건립추진위원회 정관 및 선양비 시안을 확정한 후 관련 예산 2억여 원을 배정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유로에 '함께 지켜낸 대한민국. 6·25 전쟁영웅 백선엽 장군, 당신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글과 백선엽의 사진이 실린 대형 광고판을 내걸었습니다.

이 같은 소식이 전해지자 파주지역 10개 정당·시민사회단체는 '친일인사 백선엽 동상 건립 반대 파주시민대책위원회'를 결성해 반대운동에 나서 1인시위와 1만인 서명운동, 촛불문화제 등을 이어갔습니다. 결국 파주시는 항복하였고, 동상 대신 '6·25 전쟁영웅 백선엽 장군 기념 조형물'을 세운 것입니다. 

국민적 합의로 역사인물의 동상을 세우는 등의 작업은 민족사의 자긍심을 되찾고 후세교육 차원에서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공과(功過)가 교차된 인물의 동상 건립이나 미화작업은 또 다른 논란을 야기할 뿐입니다. 백선엽 미화 역시 그런 사안이라고 생각됩니다. 백선엽은 '전쟁영웅'이기 이전에 '친일반민족행위자'이기 때문입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백선엽 미화작업을 이제부터라도 관심 갖고 지켜볼 일입니다.


태그:#백선엽 , #전적비 공적비, #명예 군사학박사, #명예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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