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난 4월 25일, 홍콩 유력언론 봉황망(鳳凰網)은 <훙광쟈오(紅廣角)>를 출처로 중국현대사 인물 시중쉰(習仲勳)을 보도했다. 1979년 당시 광둥성장이던 시중쉰이 '눈물로 백성의 고충을 처리하다'는 내용이다. 혁명1세대인 수많은 중국 공산당 인물 중 유독 그의 이름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무얼까. 바로 2012년 차기 주석이 될 시진핑(習近平)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잡지 <훙광자오>의 제호는 원래 <광둥당사(廣東黨史)>였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이하 당 중앙)의 전권을 받고 성장이 된 시중쉰은 1970년대 말 광둥 주민들이 '홍콩으로 탈출'(偷渡)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선전(深圳) 당 간부들과 시중쉰은 논쟁을 벌인다. '사회주의 계급투쟁'과 '생계의 현실'을 놓고 언쟁한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시중쉰은 쉴 새 없이 홍콩으로 향하는 차량행렬을 본 후, 다음 회의에서 자기비판을 한다. 그리고, 탈출 실패로 수용소에 잡혀온 농민들을 보며 눈물을 흘린다. 탈출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하루빨리 경제성장을 추진해야 하며, 사회주의 정책에 얽매이지 않고 현실에 맞게 유연하게 해결해가야 한다는 것, 그것이 당 내 개혁파 시중쉰의 고충처리 방식이었다. 중국의 '경제특구(特區)'가 건설된 것이다.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광둥 선전 앞바다. (2007년 8월)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광둥 선전 앞바다. (2007년 8월)
ⓒ 최종명

관련사진보기


개혁개방 초기 선전은 그야말로 황무지였다. 지금은 홍콩 앞바다를 바라보며 24시간 수출입 하역으로 불빛이 꺼지지 않는 도시가 되었다. 지방정부의 수장으로 파견된 정치지도자가 '탈출'의 현실을 무시하고 계급투쟁만 견지했다면 큰 반발에 직면했을 것이다. 당 중앙이 좌경에 빠지지 않는 당내 개혁가 시중쉰에게 황제의 보검인 '상방보검(尚方寶劍)'을 하사한 것이 옳았다는 것을 <홍광쟈오>는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시중쉰(1913~2002)은 중국에서 공산당 원로 중 가장 존경 받는 인물이었다. 현 국가부주석 시진핑은 공산당 내 3개 파벌 중 하나인 '태자당(太子黨)', 즉 원로 2세 정치인의 대표주자다. 향후 차세대 중국을 이끌고 갈 국가지도자 시진핑. 행정가, 정치인으로서의 그의 역경과 성장과정에 앞서 가족사를 살펴 보는 일은 중국현대사와 관련해 의미가 있다. 시진핑은 아버지로부터 '피'와 '품성'은 물론, 정치적 후광까지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시중쉰
 시중쉰
ⓒ 봉황망

관련사진보기

시중쉰은 산시(陕西) 북부 푸핑(富平)현에서 태어났다. 산간변(陕甘邊) 혁명근거지에 있던 시중쉰은 1935년에 이르러 창정(長征)을 주도한 마오쩌둥과 만난다. 반혁명으로 수감 중이던 시중쉰은 마오쩌둥이 며칠만 더 늦게 옌안(延安)에 왔다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마오쩌둥은 22살의 젊은 나이에 홍군의 든든한 후방기지의 리더이던 시중쉰에게 큰 감명을 받았다. 이후 6년에 걸친 항일민족통일전선을 훌륭하게 수행한 시중쉰에게 친필로 '당의 이익이 최우선(黨的利益在第一位)'이라는 제자를 써주기도 했다.

이후에도 마오쩌둥은 시중쉰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 4차례에 걸친 찬사를 했다. 1945년 당 중앙은 33살이던 시중쉰을 중앙조직부 부부장 겸 시베이국(西北局)을 총괄하는 당 서기로 임명한다. 이 자리에서 마오쩌둥은 '그는 군중으로부터 검증된 군중 영수(他是從群眾中走出來的群眾領袖)'라고 발언한다.

1947년 장제스(蔣介石) 군대가 속전속결 전술로 진격해왔다. 시중쉰은 펑더화이(彭德懷)와 함께 곳곳에서 전투에서 승리한다. 시베이 홍군이 10배나 많고 장비까지 우수한 국민당 군대를 격퇴시킨 만큼 이 전투는 대첩으로 불린다. 토지개혁 정책에서도 '좌'편향에 빠지지 않고 업무를 훌륭히 수행해 당 중앙의 높은 신뢰를 받는다.

1952년 신중국 수립 후 마오쩌둥은 시중쉰의 시베이국 업무보고를 접한다. 토지개혁, 통일전선, 민족문제 등에 관한 보고를 읽던 마오쩌둥은 옆에 있던 보이보(薄一波)에게 시중쉰에 대한 평가를 해보라고 묻는다. 현 충칭시 서기이자 차세대 정치지도자인 보시라이(薄熙來)의 아버지 보이보는 '젊고 유망하다(年輕有為)'고 대답한다. 이 말은 옌안 시절 이미 마오쩌둥이 언급했던 말이기도 하다. 마오쩌둥은 곧바로 '루훠춘칭(爐火純青)'이라고 말한다. 도교에서 도사들이 수련을 해 극단의 경지에 오른다는 뜻을 빌려 시중쉰이 최고라고 표현한 것이다.

마오쩌둥의 시중쉰에 대한 최고 찬사는 바로 제갈량을 언급한 것이다. 신중국은 정부수립 초기 민족문제로 곤란을 겪었다. 시베이 지역은 티베트(짱)족, 후이족, 위그르족, 몽골족 등이 광범위하게 산재해 있었다. 특히, 칭하이 성 앙라(昂拉) 부락에 있던 티베트족(藏族) 지도자 샹첸(項謙)은 장제스 국민당의 '반공구국군' 사단장 탄청샹(譚呈祥) 부대를 규합해 신중국과 대립했다.

시중쉰은 좌파적 경향을 지양하고 민족화합을 통한 인민정부 수립을 견지했다. 또한, 국민당 잔당과 소수민족을 구분하고 지속적인 정치투쟁을 전개했다. 군사작전보다는 직접 당사자들을 만나 설득 공작을 병행한 것이다. 1950년 8월 샹첸은 투항했으며 인민정부에 '깊이 뉘우친다'는 발언을 함으로써 당시 전국 각지의 민족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고향에 세워진 마오쩌둥 조각상. (2007년 8월)
 고향에 세워진 마오쩌둥 조각상. (2007년 8월)
ⓒ 최종명

관련사진보기

그러나, 앙라 부락으로 돌아간 샹첸은 곧바로 배신을 한다. 1951년 9월 샹첸과의 정치협상이 결렬되자 모두 즉시 앙라를 소탕할 것을 결의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시중쉰은 군사 동원을 중지하고 인내심을 발휘한다. 결국 1952년 5월 반란군과의 전투 후 샹첸이 고립돼 있을 때에도 사람을 보내 진심으로 항복을 권유한다.

8월에 이르러 샹첸은 신이나 존경할 만한 인물에게 경의를 표하는 스카프인 하다(哈達)를 바치며 시중쉰의 손을 잡기에 이른다.

이 일은 당 중앙에 큰 힘이 됐다. 얼마 후 마오쩌둥은 시중쉰을 만난 자리에서 <삼국지연의>의 칠금맹획(七擒孟獲)을 비유하며 '당신은 제갈량보다 더 대단하다(你比諸葛亮還厲害)'고 칭찬한다.

1952년 가을 마오쩌둥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정적을 견제하기 위해 지방에 있던 5명의 서기들을 베이징으로 불러들인다. 시난국(西南局)에 있던 덩샤오핑(鄧小平)을 비롯해 화둥국(華東局)의 라오수스(饒漱石), 중난국(中南局)의 덩쯔후이(鄧子恢), 둥베이국(東北局)의 가오강(高崗)과 함께 베이징에 온 시중쉰은 당 중앙선전부장이자 정무원(지금의 국무원) 문화교육위원회 부주임이 된다. 젊은 당내 일꾼들을 요직에 배치했던 것이다. 마오쩌둥이 중앙정치무대로 시중쉰을 불러들인 것이다.

시중쉰이 베이징에 온 다음해 시진핑이 태어난다. 베이징으로 이름이 변하기까지 베이핑(北平)이라 불리던 곳에서 태어난 시진핑은 아버지의 검소하고 정의롭고 개혁적인 면모를 어릴 때부터 배우며 자랐다. 아이들에게 다정다감한 아버지였으며 딸들이 낡은 꽃신에 검은 칠을 해 신고 다녀야 할 정도로 소박한 생활을 가르쳤다.

홍콩에서 출간되고 번역된 <시진핑 평전>(2009, 넥서스, 우밍 지음, 송삼현 옮김)에는 시중쉰의 가계도가 나온다. 모두 3남 4녀다. 배 다른 형과 누나,  친 누나 둘과 남동생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친 누나 둘은 어머니 치신(齊心)의 성을 따서 치차오차오(齊橋橋), 치안안(齊安安)이라 개명했다. 치차오차오의 회고에 따르면 '시(習)는 매우 드문 성으로 이목을 끌기 쉬워 아버지는 어머니의 성을 따라 바꾸게 했다는 것이다. 시중쉰 역시 행정가로서, 정치인으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는 일은 가급적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중쉰은 혁명과 전쟁 속에서 성장했다. 약관의 나이에 신중국의 핵심간부가 될 정도로 마오쩌둥의 찬사를 받았다. 그렇지만 문화혁명 직전 '황제' 복귀를 노리던 마오쩌둥에 의해 돌연 파벌싸움의 희생양이 됐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감금과 감시 속에 살았다. 이 때문에 시중쉰의 아들 딸은 큰 고초를 겪게 된다.

9살이던 시진핑 역시 하루 아침에 온갖 난관에 봉착한다. 역경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오랫동안 아버지를 만나지도 못한다. 그렇지만 시진핑은 아버지의 실각으로 인해 자신의 정치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자양분을 얻게 된다. 바로 기층민들과 7년간의 동고동락을 하게 된 것이다.

시중쉰(오른쪽)과 두 아들. 왼쪽이 시진핑《시중쉰주정광둥(習仲勳主政廣東)》중. (중공당사출판사中共黨史出版社, 2007)
 시중쉰(오른쪽)과 두 아들. 왼쪽이 시진핑《시중쉰주정광둥(習仲勳主政廣東)》중. (중공당사출판사中共黨史出版社, 2007)
ⓒ 중공당사출판사

관련사진보기

시중쉰은 마오쩌둥의 사망과 사인방(四人幫)이 체포되고 나서야 복권돼 광둥에서 개혁개방을 주도하게 된다. 1980년 베이징으로 돌아온 시중쉰은 당 중앙서기처 서기가 된다. 다른 직함도 많지만 시진핑 역시 2007년부터 아버지 시중쉰처럼 중앙서기처 서기이다.

시중쉰은 보수파의 공격으로 실각한 후야오방(당시 총서기)을 정의롭게 변론하고 원칙 준수를 직언하다가 한직으로 밀려난다. <시진핑 평전>에 따르면, 오히려 이로 인해 '역사에서 아름다운 이름을 얻었고 당내외의 광범위한 찬사'를 받았기에 '시진핑에게 더 많은 정치적 자원'을 가져다 줬다고 평가한다.

시진핑은 다른 후보 군에 비해 아버지의 후광이 정치적 자산이 된 아주 드문 지도자라고 볼 수 있다. '피는 속일 수 없다'는 말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독재자의 자식'이 차기 대권 운운하는 것에 비하면 중국에 이런 지도자가 있다는 것이 신선해 보이기조차 한다. 허물도 있고 과오도 있는 것이 정치인이라면 시진핑 역시 장점이 많은 만큼 단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으로부터 존경 받는 아버지의 아들이니, 정치인으로서 큰 복이 아닐까 싶다.

시중쉰에 관한 회고나 언론보도는 언제나 '존경'이다. 중국 현대사 인물을 거론할 때도 늘 시중쉰은 저우언라이와 더불어 인기가 높다. 오랫동안 저우언라이의 비서를 맡은 경험도 시중쉰을 '선비'같은 이미지로 각인시킨다.

마오쩌둥은 '제갈량보다 더 대단하다'고 격려했지만 결국 정치적으로 이용해버렸다. 나중에는 '그런 적이 없다'고 속 보이는 발뺌까지 했다. 아들 시진핑이 국가주석이 된다면 아마도 삼국지보다 더 멋진 반전 드라마가 되지 않을까 싶다.

시진핑이 푸젠성장이던 2002년 5월 새벽, 시중쉰은 향년 89세로 조용히 여생을 마감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13억과의대화 www.youyue.co.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시중쉰, #시진핑, #중국공산당, #제갈량, #국가주석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중국발품취재를 통해 중국전문기자및 작가로 활동하며 중국 역사문화, 한류 및 중국대중문화 등 취재. 블로그 <13억과의 대화> 운영, 중국문화 입문서 『13억 인과의 대화』 (2014.7), 중국민중의 항쟁기록 『민,란』 (2015.11) 출간!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