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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벨이 울렸다. 텅 빈 집안을 돌고 돌아 다시 내 귀로 와닿았다. 그렇지 않아도 숙취로 지끈지끈한 머리가 진동하듯 아파왔다. 억지로 베개에 머리를 파묻으며 애써 무시했다. 도대체 누가 전화를 이리도 끈질기게 하는 것인지 벨소리는 끊어지지 않았다. 손을 더듬어 머리맡에 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하고 잠이 덜 깬 탁한 목소리로 말하니, 맞은편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자나?"
"어… 어제 술을 너무 마셔서."
"나와서 꽃 좀 팔지…."
"…싫다. 더 잘란다."
"그래, 알았다. 그래도 일어나서 밥은 먹어라."
"응."

전화를 끊었다. '꽃을 팔라니. 오늘 무슨 날인가?'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2월이다. 졸업식 시즌이라 전국 꽃집들이 학교 앞으로 모여드는 시기였다. 어머니께서는 꽃집을 하신다. 평소 흑자를 내는 것도 힘겨운 소매 꽃집이니 이런 대목에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으셨던 모양이다. 나갈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장사도 해본 적 없는데, 나가서 뭐해. 방해만 될 걸 뭐.' 다시 벌게진 눈을 감았다.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아까보다 숙취가 나아져 몇 번 울리기 전에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였다.

"좀 나와서 도와라."
"내가 나가서 뭐하노. 장사도 할 줄 모르는데."

나는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도 나와서 좀 도와라. 아니, 장남이나 돼서 엄마가 장사하는데 집에서 퍼질러 잠만 자고 있나? 당장 나온나!"

내가 뭐라 대꾸도 하기 전에 전화가 끊어졌다. 장사가 생각만큼 잘 되지 않으셨던지 내게 화를 내셨다. 나는 짜증을 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도대체 내가 가서 뭘 할 수 있다는 것인지, 어차피 어머니 옆에 가만히 서 있는 것이 다일 텐데 왜 자꾸 오라는 건지 답답하기만 했다.

어머니께서 꽃을 팔고 있는 대학교는 집에서 한 시간이나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거리였다. 그 많은 학교를 놔두고 왜 이렇게 먼 학교까지 와서 장사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억지로 나간다는 생각에 모든 상황이 짜증으로 다가왔다.

내 학비를 위해 어머니는 어떤 일을 하고 계셨나

그렇게 한참을 혼자 투덜거리며 졸업식을 하는 학교 근처에 도착했다. 정류장에 내려선 나는 한동안 멈춰 있었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학교를 찾지 못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학교가 어느 방향에 있는지 알기는 너무 쉬웠다.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학교 정문까지 꽃을 파는 사람들이 빼곡하게 줄지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도저히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어머니를 찾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어머니께서는 새벽부터 자리를 잘 잡은 탓에 정문 근처에 있다고 하셨다. 그 말이 내 가슴을 한 번 더 찔렀다.

나는 끝없이 이어진 꽃다발 길을 고개를 숙인 채 걸었다. 꽃다발 좀 보고 가시라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모두 어머니의 목소리 같았다. 꽃을 사려는 사람보다 꽃을 파는 사람들이 더 많은 이 지독한 상황에서 어머니께서는 누구를 위해 꽃을 팔고 계셨을까.

어제 마신 술이 원망스러웠다. 세상모르고 자고 있던 내가 싫었다. 타지에서 공부하는 내 학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어머니께서 어떤 일을 하고 계셨던지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던 철없는 내가 지독히도 미웠다.

"아들, 이제 왔어?"

두어 개는 팔렸을까 싶은 꽃다발 더미를 앞에 두신 어머니께서는 자고 있는 아들을 억지로 불러낸 것이 괜히 미안하셨던지 얼굴 가득 멋쩍은 미소를 띠고 계셨다. 나는 그 모습에 코끝이 찡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경상도 출신의 남자라는 핑계를 대기 이전에 이런 죄스러운 마음으로는 어떤 표현도 내 뱉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감정을 꾹 누르며 몇 개나 팔았느냐는 물음에 이제 막 세 개를 팔았다고 하셨다.

나는 꽃을 두어 개 품에 안고 내가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처음 해보는 장사라지만 꽃을 파는 것은 전혀 부끄럽거나 창피하지 않았다. 새벽부터 나오셔서 팔리지 않은 꽃다발을 보시며 긴 시간 호객을 하셨을 어머니의 고생을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던 내 자신이 더 부끄럽고 창피했다. 그날 나는 단 하나의 꽃다발도 팔지 못했다. 그러나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꽃 장사에 빠진 적이 없었다.

부모님 희생의 대가로 꿈을 이루려는 나

그날 일은 몇 년이 지난 현재까지 어머니에 대한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어머니께서 하셨을 고생이 얼마나 힘든 것이었고 또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과거의 나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누군가 가르쳐줘야만 아는 것이 있고, 배우지 않아도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 내가 겪었던 경험은 누군가 알려주지 않아도 당연히 느끼고 알아야 하는 것이었다. 내가 쓰는 모든 것이 누구의 고생으로 얻어진 것인지 매일, 매 순간마다 기억하고 생각해야 했다.

내가 불효자인 이유는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또 어머니의, 부모님의 희생을 강요하게 된다는 것이다. 누구의 희생으로 내가 현재를 살아가는지 직접 보고 느꼈지만, 나는 다시 한 번 부모님께 불효를 저지르고 있다.

나는… 취업 준비생이다. 그것도 전공을 버리고 뒤늦게 찾은 꿈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취업 준비생이다. 타지에 올라와, 부모님의 희생을 무언으로 강요하여 그 대가로 꿈을 이루려는 것이 지금의 나다.

언제 끝날지, 얼마나 더 희생을 강요해야 할지, 얼마나 만족할 수 있을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단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기 위해서 과거의 그날처럼 어머니를 대학교 졸업식에 내몰고 모른 체하는 것이 지금의 내 모습이다. 과거의 내가 무지에 의한 불효자였다면, 지금의 나는 부모의 희생을 강요하는 진정한 불효자다.

그래서 언제나 죄스럽고 부끄러운… 나는 불효자다.


태그:#불효자, #취업준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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