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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취재할 생각이 없었다. 5월에 은퇴를 앞둔 한국의 대법관이 이곳 버클리를 방문해 특강을 한다기에 예의상 들러볼 심산이었다. 그가 삼성 X파일 재판에 무죄 취지로 의견을 냈던 5인 대법관 중 한 명인 이홍훈 대법관이라기에 감사 인사라도 깍듯이 올리고 싶었을 뿐이었다.

강연장에는 60명 가량의 각국 법학자들과 연구자들로 가득했다. 이날(29일) 강연 제목은 '역동적 현대 한국과 대법원'. 그런데 배포된 강연 원고를 보니 이제 웬일인가? '한국사회의 도덕적 딜레마'를 설명하는 주된 판례로 '삼성 X파일' 사건이 거론돼 있었다.    

이 대법관은 '통신기술의 발달에 따라 언론자유도 신장됐지만 개인의 통신자유가 침해될 위험도 커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최근 삼성 X파일 재판에서 한국의 대법원은 공익에 입각한 언론자유보다 개인의 사생활을 중시하는 판결을 내렸다고 소개했다. 

이어지는 설명을 통해, 무죄 의견에 참여한 그의 소신을 간접적으로 헤아려볼 수 있었다. 그는 "공익이란 나라와 시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며, 보호될 수 있는 사생활의 범위와 영역 또한 변화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이나 가치 기준에 따라 공익이든 사생활이든 서로 다른 가치를 강조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판결 둘러싼 가치도 국민 정서와 함께 변해가고 있다"

좀 더 직접적인 입장이 듣고 싶어졌다. 이 대법관 스스로 삼성 X파일 사례를 밝힌 만큼, 강연 직후 나는 용기를 내어 질문을 던졌다.

"저는 삼성 X파일 사건의 피고인 MBC 이상호 기자입니다."

장내가 술렁였다. 참석자들은 이채로운 상황에 관심을 보이며 모두들 귀를 기울였다. 이 대법관에 대한 존경을 표한 뒤, 질문을 이어나갔다.

"대법원은 삼성 X파일 보도에 정당성이 부족하다면서, 그 이유인즉 '뇌물이 실제 전달되지 않고 단지 모의됐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테이프를 들어보면 이학수-홍석현 두 사람은 돈을 줬음을 되풀이해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대법원이 중대한 사실관계를 오인한 것은 아닌지요? 설사 그렇더라도 유죄 판단에 영향을 미칠 만한 사유는 아니라고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이 대법관은 뜻하지 않은 질문에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다가, 이내 능숙한 농담으로 답변을 시작했다.

"다수 의견에 가담했으면 제 입장이 어려웠겠군요. (장내 웃음) 이번 재판의 쟁점은 사실 관계보다는, 개인의 통신비밀보호의 범위와 한계 또 보도시 충돌의 문제의 한계가 쟁점이었습니다. 그 결과 공익성 여부를 판단하는 데 있어 논란이 제기된 것도 사실입니다. 대법관들이 깊이 있게 고려하고 토론했고, 의사결정 과정에 국민 정서도 감안했습니다. 다만 판결을 둘러싼 가치도 국민 정서와 함께 변해가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워낙 예민한 사안이다 보니, 노대법관은 극도로 말을 아꼈다. 그리고는 잠시 뒤,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이렇게 덧붙였다.

"제 개인적으로 소수의견에 가담한 이유는 민주주의 발전과정에서 언론의 역할이 중요한데, 언론보도를 하는 과정에서 취재 자체에 불법성이 없다면 보도를 제한하는 것은 민주주의 발전에 저해적인 요소가 되겠다. 미국(대법원)이 그런(언론자유) 쪽으로 방향을 설정한 것도 미국의 가치인 민주주의와 법치의 발전을 중시한 때문이라고 할 것인데, 우리 사회는 아직 그만큼 민주주의에 대한 추구와 이념이 약한 때문이 아니냐고 봅니다. 아무래도 사회질서나 분단된 상황의 영향이 크지 않을까 싶습니다."

강연이 끝났다. 복도에 나와 순서를 기다려 인사를 드렸다. 차라도 한잔 모시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이 대법관은 바쁜 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해 사라졌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www.leesangho.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상호 기자 트위터 : @leesanghoC



태그:#삼성, #X파일, #이상호, #이홍훈, #대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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