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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꿈은 시를 쓰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때는 정말 시를 쓰기도 했다고 한다. 허나 불행히도 난 15년 넘는 세월을 함께 하고도 그가 시를 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본인의 강력한 주장 때문이라도 마지못해 그가 한 때는 시인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뿐 여전히 미심쩍은 마음이다. 하긴 청년기 때는 누구나 시인이라고 괴테는 말했다.

내 남편인 그는 자신도 한때 시에 가슴앓이 하던 젊은 청춘이었음을 유난스런 절차로 내게 통고하였다. 핸드폰이 아직 일반화되지 않고 개인의 연락처들을 대부분 집으로 기재하던 시절, 휴일 날 집으로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거기 민이 선배집이죠? 저, 민이 선배님 좀 바꿔주세요. 전 후배 되는데요."

사근사근 어여쁜 여성의 목소리였다.

"아, 전화 잘못 거셨는데요."
"어머, 그래요? 죄송합니다. 264국에 OOOO번 아니에요?"
"번호는 맞는데… 저희 집엔 민이라는 사람 안 살아요."
"이상하다. 저번에도 이 번호로 분명 민이 선배랑 통화 했는데."

그러면서 아가씨는 민이 선배라는 분이 속한 단체라며 익숙한 단체 이름을 댔다. 그리고 민이라는 사람이 무슨 대학 출신에 무슨 소속의 동아리 활동을 주로 했다고 하는데 경력이 우리 남편과 거의 흡사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실명 확인 절차인 성명이 서로 맞질 않았다. 내 남편 이름은 '민'이라는 생소한 외자가 아닌 김중철(가운데자만 가명)이었던 것이다.

결혼 3년차에 집으로 걸려온 여자의 전화

영화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의 한 장면. 시는 고사하고, 남편이 책 한 권 읽는 걸 본 적이 없다.
 영화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의 한 장면. 시는 고사하고, 남편이 책 한 권 읽는 걸 본 적이 없다.
ⓒ 이손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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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이상하죠? 우리 남편 이름은 '김민'이 아닌데. 찾으시는 분이 저희 애 아빠랑 같은 단체의 다른 분인 거 같아요. 여긴 그, 김민이라는 분 댁 아니에요."

전화를 막 끊으려는데 그때까지 안방에서 진지한 자세로 텔레비전을 경청하고 있던 남편이 "뭐? 김민?"하면서 후다닥 거실로 뛰어 나오는 것이었다. 막 놓으려는 수화기를 내 손에서 낚아챈 그는 예의 사근사근 아가씨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윤희구나. 미안. 우리 집사람이 내 이름을 몰라서. 응 그래. 이번 행사건 때문에?"

남편이 후배라는 아가씨와 반갑게 통화를 하는 옆에서 나는 그야말로 어이가 없었다. 아니, 이상도 하지. 내 남편 이름은, 이름 끝 자인 '철'자를 항렬자로 위시해서 지은 '김 중철'이 분명하거늘. 뭐, 김민? 덕망 있는 문중 어르신이 항렬자를 따서 친히 지어주셨다는 이름 '김중철'.

그럼 내가 알고 있는 김중철은 뭐고 시방 본인이 그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김민'은 또 뭐야. 더군다나 여성 후배라는 이도 익숙한 이름을 부인인 나는 왜 결혼 3년이 넘도록 처음 듣는단 말인가. 도대체 무슨 사연이기에 내가 알고 있던 남편의 이름이 그 이름이 아닌 다름이라는 것인지.

"응, 그럼, 당연 가봐야지. 내 이번엔 시간 내서 꼭 들를게. 너희들 참말 고생 많다. 그래? 알았어, 알았어. 그래야지. 그럼, 못가더라도 후원금은 내 꼭 낼게. 그럼, 수고하고."

내 남편의 필명 '김민', 3년만에 알았다

졸지에 이름이 바뀐 남편으로 인해 어안이 벙벙한 마누라 옆에서 남편은 태연하게 통화를 하고 또, 못 지킬 게 뻔한 약속도 남발하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당신이, 어떻게 '김민'이야?"
"이 사람이 지금, 결혼 3년이 넘도록 남편 필명도 모른단 말이야?"
"필명? 당신한테 무슨 필명이 있어!"
"내가 왕년에 시 써서 상도 받고 그랬다고 했잖아. 우리 연애할 때랑 수도 없이 말했네. 정말 사람이 남편한테 너무 관심이 없어."

그러더니 당장 일어나서 작은방 책장으로 향했다. 책장 서랍 위에 손이 잘 안 닿는 높이에 몇 년째 먼지를 뒤집어쓰고 얹혀 있던 상패 두 개를 꺼내 들고 오더니 내 눈앞에 당당하게 들이대며 말했다.

"봐. 여기. '김민'이라고 똑똑히 보이지? 내 필명."

대저 거기엔 무슨 문학상 수상자로, 보느니 처음인 '김민'이라는 이름 두 글자가 자랑스럽게 새겨져 있었다.

"굳이 필명까지 쓴 건 좀 유난스럽다. 필명은, 그쪽으로 유명해진 다음에 지어도 늦지 않았을 텐데."
"당신은 꼭 나를 무시하고 그러는데 말이야. 이게 당시엔 그래도 의식 있는 사람들 사이에선 꽤 권위 있는 양대 문학상이었다 이거야."

책장 한편에 나란히 모셔져 있는 초록색 상패 두 개를 보긴 했지만 내겐 청소할 때마다 거치적거리는 쇳덩어리에 불과했다. 그러니 당연히 거기 새겨져 있는 필명 같은 게 보였을 리가 없었다. 알고 보니 내 남편 '김중철'은 문학의 꿈을 지병처럼 간직한 필명 '김민'이라는 거였다.

"끝까지 사람 무시해라, 난 언젠가 다시 쓴다, '시'!"

"근데 지금은 왜 책도 통 안 읽어?  책이라도 한줄 읽으면서 시를 씁네! 해야 내가 믿음이 갈 거 아냐."
"시라는 게 그렇게 꼭 폼 잡고 쓰는 건 줄 알아? 사람들은 이해 못하지만 말이야. 이 마음속엔 항상 시에 대한 욕구가 꿈틀거려. 지금은 처자식 딸린 몸 아냐. 잠시 꿈을 접고 있다뿐이지 마음속은 늘 쓰고 싶은 욕구로 괴롭단 말이야. 고통을 몰라, 당신은."
"그래 몰라서 미안. 근데 마음속에 시상이 번득인다는 사람이 그렇게 허구한 날 텔레비전 앞에서 히죽거리나?"

남편은 먼지 낀 상패를, 그 안에 새겨진 자신의 필명 '김민' 두 글자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본격적으로 회상에 젖기 시작했다.

"야, 그때 상금도 꽤 됐었지? 아마. 한 학기 등록금에 맞먹었으니까. 나 그만한 액수의 수표는 처음 만져봤다."
"맞다, 상금! 그래, 그 상금 어떻게 됐어? 큰돈이었다면, 설마 어디다 숨겨 놓거나 그런 거 아냐?"

"꼬불쳐 둘 새가 어디 있어. 배고픈 동지 후배들 몇날 며칠 술 사주고 다 썼지. 오히려 모자라더라. 내 돈이 더들어갔으니까. 아! 그땐 정말 폼 났다."
"그럼 그렇지. 그 돈을 여태까지 착실히 갖고 있을 사람이 아니지. 상금이라도 조금 내 만져라도 봤으면 바로 믿어줬을 텐데."

"그런 의미 있는 돈은 혼자 쓰는 게 아냐. 같이 나눠써야지."
"그래. 사근사근한 여자 후배들이랑 그 돈 오지게 다 나눠 쓰고 나한테는 빚만 져서 장가 왔구나. 상패 저리 치워, 먼지 날려."
"아, 함부로 치지 말란 말이야, 내 상패!"

"당신이 꼭 잘 써서 받은 것만은 아닐 거야. 당시 분위기가 이쪽 지방이 동정 받아 마땅한 시절이었잖아. 5·18 겪은 지도 얼마 안 됐고. 글고 시라는 거, 현란한 글자 몇 개 잘 배열하면 짐짓 그럴싸한 시 한편으로 둔갑되기도 하는 거잖아. 솔직히."
"아, 진짜. 하나는 소설이었다니까! 여기 봐. 제목도 있잖아, '제단을 향하여'."

"오우, 소설까지? 너무 무리했다 당신. 심사위원들 얼마나 괴로웠을까. 난삽한 시도 모자라 무지막지한 소설까지 들이댔으니."
"그래 끝까지 사람 무시해라. 난 언젠가 다시 쓴다. '시'!"

너무 잘 자고, 잘 먹는 남편... 대체 언제 고뇌하나

영화 <시>의 한 장면. 남편에게선 이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영화 <시>의 한 장면. 남편에게선 이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 파인하우스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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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연한 당시 다짐과는 달리 남편은 결혼 이후 15년 동안 단 한 번도 시라는 걸 써본 적이 없었다. 번득이는 시상을 어떻게 가슴으로 처리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활자화되어 보여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면서 말로는 언젠가는 꼭 시를 쓸 거라고 꿈처럼 말한다. 여전히 책은 단 한 권도 읽지 않는다.

시인이라면 으레 그러려니 싶은, 고뇌하는 모습은커녕 잠은 너무 잘 자고 식욕은 늘 왕성해서 괴롭고 텔레비전 시청도. 굳이 시인을 닮은 구석이 있다면 술을 무지 좋아한다는 것 정도. 술도, 술병에 떨어지는 별을 안고 쓰러져 울면서 마시는 것이 아니고 푸짐한 안주타령을 하면서 마신다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책을 꾸준히 한 권도 읽지 않는 것은, 본인 말로는 안 읽는 게 아니라 못 읽는 것이라고 한다.

"내가 시방 글이 눈에 들어 오냐? 월말까지 밀어 넣을 돈이 얼만데."
"꼭 그런 건 아니지. 도스토예프스키는 도박 빚에 늘 시달리면서도 근사한 장편을 연거푸 쏟아냈지. 체홉은 의사라는 직업에도 주옥같은 단편들을 얼마나 많이 썼게. 폴 엘뤼아르랑 르네 샤르 같은 시인들은 척박한 레지스탕스 활동 중에도 절창의 시를 뽑아 민중을 선도했고. 열거할라고 보니 끝도 없다."

"그럼 당신이 한번 써볼래? 그렇게 만만하면."
"그러게 내가 언제 시 쓴다고 설친 적 있어? 난 나 자신을 너무 잘 아니까 그런 무모한 꿈 안 키운다고요."

"난 쓸 거야 꼭. 이 고비 지나고 생활만 어느 정도 안정되면. 우선은 휴대용 노트북부터 하나 새로 장만하고."
"옛말에 '글 못하는 놈이 붓 고른다더니'. 시 하고 휴대용 노트북하고 무슨 상관이야? 연필이랑 종이만 있음 되지. 당장은 그것도 필요 없어 보이지만 말이야."
"그때그때 시상이 팍 떠오를 때, 그걸 빨리 기록할 휴대용 기기가 하난 있어야 한단 말이야. 말리지마."

그러더니 얼마 전 유행하는 '갤럭시 탭'이라는 휴대용 기계를 덥석 구입해 버렸다. 시상이 번득일 때마다 거기에 곧바로 메모를 하겠다더니, 구입한 날로부터 쓸데없는 어플만 잔뜩 받아 놓고 틈만 나면 콕 콕 찍으며 노느라 한동안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러면서도 말로는 여전히 꿈을 향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 꿈을 위해 산다고도 하고 그 꿈이 있어 살아간다고도 한다. 언젠가 '생활이 안정'되면 꼭 거창한 시를 쓸 것인데 그때는 자신의 진면목을 보게 될 거라나 뭐라나.

그러면서 오늘도 시립도서관으로 향했다. 읽을 책을 빌리러 간 것이 아니다. 마누라 책 빌리는데 운전사 노릇을 자청하여 간 것이다. 동반한 김에 개인 대출한도 5권을 추가한 마누라한테 자신의 대출증을 대여해 주는 유익한 도서보급 활동도 겸했다. '김중철' 명의로 시립도서관에서 발급받은 도서 대출증의 대출목록 도서들은 대부분 김중철 본인이 독서활동을 한 것이 아니다. 늘 대출한도에 허덕이는 '김중철'의 배우자 '정미경'에게 명의를 도용당한 것이 대부분이다.

시에서 사진으로 눈 돌렸지만, 또 자본이 문제로구나

보수·보강 작업을 마친 이순신 동상이 지난해 12월 23일 오전 서울 광화문 광장에 다시 설치되어 멋진 자태를 뽐내자 한 시민이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있다.
 보수·보강 작업을 마친 이순신 동상이 지난해 12월 23일 오전 서울 광화문 광장에 다시 설치되어 멋진 자태를 뽐내자 한 시민이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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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가 품은 꿈은 거창하게 '문학', 구체적인 장르는 '시'다. 인간 김중철은 항렬자를 따라 지은 자신의 호적상 이름을 뛰어 넘어 필명 '김민'으로 우뚝 설 날을 위하여 현재는 부득이하게 칼을 쥐고 있다. 그 칼로 열심히 현실적인 어려움을 타개해나가 언젠가는 기어이 붓을 들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결혼 15년이 넘도록 죽 지켜본 바에 의하면 그는 전혀 '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능력 밖의 꿈에 너무 무모하게 미래를 걸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울 지경이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다른 분야를 권해 보기 시작했다. 나의 애정 어린 충고에 동요되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능력 없음을 비로소 깨달았던지 요새는 그도 다른 데 눈을 돌리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바로 카메라다.

집에 있는 카메라를 밤새 분해해보고 사용설명서를 익히고 하면서 점점 더 많은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어차피 능력 밖의 불가능한 꿈에 좌절하느니 이제라도 다른 분야에 취미라도 갖게 되는 것이 그에겐 퍽 다행스런 변화였다.

그런데 카메라를 만지작거린 지 며칠이나 됐다고 남편은 또 연장 타령을 하기 시작했다. 카메라를 '본격적으로' 할라치면 새로운 망원렌즈를 비롯한 몇 가지 기기가 꼭 필요한데 그것도 당장 시급하다는 것이었다.

"그래? 얼마쯤 하는데?"
"음. 좀 비싸. 급한 대로 망원렌즈 하나만도 50~60은 줘야 해. 싼 게 그 정도고 전문가용으로 장만하려면 가격 차이가 어마어마하더라고. 난 아직 그럴 단계는 아니니까."
"뭐야? 뭐가 그렇게 비싸. 더군다나 당신은 취미로 하는 건데."
"꼭 취미만은 아냐. 알고 보니까 이 카메라를 가지고도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많더라. 그러려면 기기도 하나씩 차차 장만해야 할 거고."
"아, 못살겠네. 그냥 시 써라. 시!"

자본이 가장 적게 먹힌다는 예능활동 시. 그런데 그 자본이 가장 적게 먹히는 시는 현실을 안전하게 유지할 자본을 확보하지 못해 안달하는 사이 멀어져갔다. 그리고 꿈과는 약간 격이 다른 취미로 대체되었는데 거기에도 다시 '장비구입'이라는 자본문제가 발생했다. 가슴에 품은 꿈을 실현하는데도 아, 끊임없이 자본이 결부되는구나.


태그:#꿈, #시, #취미, #현실,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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