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정말 '돈' 때문에 힘들다고?"선거 때는 입는 옷부터 모든 것이 다르다. 그러나 취임만 하고 나면 한나라당 출신인지 민주당 출신인지 구분조차 하기 힘들어진다. 안타깝지만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다수 자치단체장들이 이끌어가는 '자치행정'의 현주소다.
정치와 행정은 다르다는 차이론, 단체장은 하고 싶어도 거대한 공무원 조직이 그를 포위해버린다는 현실론. 한나라당인지 민주당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는 '색깔 없는' 자치행정을 변호하는 논리의 기둥이다.
하지만 민선 5기를 맞이한 광주 광산구청이 걸어가는 길을 보면 두 논리가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방자치단체 최초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집단평가제를 통해 인사권을 조직에게 넘겼다. 매일매일 구청장의 동선과 발언까지 기록해서 공개하고 있다. 희망제작소 등이 참여하는 별도의 지원센터를 통해 민간단체를 지원한다. 공무원들에게 한 달에 한번 무조건 자기계발 출장을 가라고 권한다.
이상은 지난 7개월 동안 민선 5기 광주 광산구청이 시행한 주요 행정개혁 정책 중 일부다. 많은 지자체들이 선거 때 약속했던 개혁공약을 여전히 '검토 중' '계획 중'이란 관료정치 용어로 묵혀두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상황이다.
이 '사뭇 다른 상황'에 대해 민형배(50) 광산구청장은 "단체장의 철학과 가치, 의지가 매우 중요하다"는 말로 설명했다. 원론적인 답변일 수 있다. 그러나 체화된 철학과 가치는 살아 움직이는 정책으로 발현한다. 장담컨대 민 청장과의 인터뷰는 이를 입증한다. 아직도 '검토 중' '계획 중'인 지자체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민 청장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회조정비서관을 지냈다. 기자 출신으로 언론노조 운동을 했으며, 광주지역 시민단체인 참여자치21의 대표도 지냈다.
다음은 일문일답.
- 구청 비정규직 직원을 전국 최초로 정규직으로 전환했다."체화된 노동에 대한 정당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80년대 초반 위장취업 노동자로 일할 때부터 가진 노동에 대한, 인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자세다. 우리 구청에서 제일 먼저 출근하시는 분은 청소하는 분인데 새벽 4시30분에 출근하신다. 이분들 비롯해서 우리 구청의 비정규직 일을 하시는 분들 직급별, 직능별로 임금표 봤더니 최저임금 간신히 넘더라. 너무하지 않나. 노동과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싶었다."
- 그렇더라도 특별한 계기나 배경이 있었을 것 같다."첫 번째 배경은 청와대에서 사회조정비서관으로 일할 때 해결 못한 게 공공부문 비정규직 문제였다. 내게는 마음 속 빚으로 남은 문제였다. 두 번째는 지역적 배경인데 인권도시라는 광주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비정규직 문제라 생각했다. 강운태 광주시장도 잘했다고 칭찬했다. 세 번째는 나는 민주당원이기 때문에 민주당이 집권한 지자체는 한나라당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당 정책에 부합하면서 지자체가 먼저 할 수 있는 일이 비정규직 문제를 푸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 공공부문이건 민간부문이건 비정규직 해소만 거론하면 '돈' 문제를 얘기하는데. "정말 돈 때문에 안 된다고 보나? 지자체장이 갖고 있는 인사권과 채용권한이 있다. 인간의 영혼을 가장 성가시게 하는 공포가 해고 등 고용불안이다. 이 공포를 없애야 하질 않나.
사실 이번엔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만 전환하면 돈은 크게 들지 않는다. 퇴직금 적립금만 들어가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안된다. 이번에 돈이 들어간 이유는 임금을 올렸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한 사람당 약 1000만원 더 들어가더라. 이번 정규직 전환대상자 39명인데 모두 약 4억원이 들더라. 광산구청 인건비가 약 523억원인데 1%도 안되는 비율이다. 그런데 돈 때문에 힘들다고 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또 그렇게 재원이 어려우면 재원 마련하는 두 가지 방안이 있다. 하나는 일을 줄이는 것이다. 워크 다이어트라고 한다. 또 하나는 정규직 채용을 억제하면 된다. 이 두 가지가 맞물리면 기존의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할 수 있다. 기업 논리는 다르겠지만 우리는 이윤추구가 하는 곳이 아니다.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돈 문제는 걱정할 일이 아니다."
"인사권 조직에 돌려주겠다, 공무원들은 '활동가' 되어야"- 얼마 전 대규모 승진인사가 있었다. 인사권을 포기했다는 말이 돌 정도다."(웃으면서) 그래요? 그래서 아무도 날 찾아오지 않았나. 아무튼 인사는 단체장이 아닌 조직이 해야 한다는 것이 소신이다. 노무현 대통령께서 늘 말씀하시던 것처럼 인사는 적재적소(適材適所)가 아닌 적소적재(適所適材)로 해야 한다. 먼저 지위에 대해 분석하고, 거기에 맞는 사람을 보내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 이 조직 구성원들 잘 모른다. 그래서 제일 잘 아는 조직원에게 서로에 대한 세밀한 평가는 맡기고, 나는 원칙과 방향을 제시하면 된다. 이것이 이번에 실시한 '집단평가제'다. 모두 4개 요소, 10개 항목에 대해서 조직원들끼리 입체적 평가를 실시한다. 먼저 상급자의 평가를 받고, 팀장 이상은 부서운영계획서에 대한 평가를 받고, 같은 직렬과 직급 간 상호평가를 받고, 마지막으로 과원 전체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인사 때 청탁이 안 들어왔다. 인사를 굉장히 편하게 했다."
- 일반적인 경우 단체장은 인사를 통해 조직 장악력을 높여야 한다는 얘기가 있다."무엇을 위해 조직을 장악해야 하나. 자율성과 창의성이 대세인 시대다. 이번 인사도 내가 하지 않고 조직에게 그 권한을 돌린다고 여러번 얘기했다."
- 아주 오래된 질문이다. 선출직 단체장에게 공무원은 누구인가."공직자들은 적응력이 뛰어나고 착하다. 관건은 공직자에게 자율성 창의성을 주는 것인데 단체장의 의지가 중요하다. 그동안 지시일변도의 행정에서 꽉 차있는, 경직돼 있는 사고와 태도를 풀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창의성이 들어갈 여유를 주는 것이다. 한 사회의 흐름을 이끌어간 분들이 바로 공무원이다. 그동안 지시에 익숙해져 있었던 분들에게 자발성, 자기 주도성을 회복하게 해야 한다. 그러면 진정한 의미의 '동력'이 된다.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할 수 있는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며 사회흐름을 주도하는 동력.... 공직자의 소명의식은 공직은 그 자체로서 목적이고 목표이다. 이때 제일 중요한 것이 일하는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남들에게 공공서비스를 제공하고 밥 벌어먹고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러기 위해서 공무원들은 더 이상 관리자에 머무르면 안된다. 비정규직 정규직으로 전환하니까 일부에서 '시민운동 하듯 한다'고 하던데 맞다. 이제 공무원들은 자기가 구청장이 되고, 시민단체 활동가가 되어야 한다. 조정자·촉진자·네트워커가 돼야 한다. 근무하는 것이 아니라 활동해야 한다는 얘기다. 바로 이런 역할을 키우기 위해서 한 달에 한번 자기계발을 위한 출장을 보내고, 직원들끼리 런치토크를 해서 공부하고 있다. 업무나 상사 눈치보지 말고 최소한 한 달에 한번 자기만의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라는 얘기다. 여유가 생겨야 창의력도 생기지 않겠나."
- 전국 최초로 청장의 동선은 물론 발언까지 기록해서 공개하고 있는데.
"첫째는 숨겨야 할 일도 없고, 둘째는 공직사회에 비밀도 없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그것은 자기 규율, 자기점검의 의미가 있다. 업무추진비를 공개하는데 어떻게 기자접대하고 촌지를 주겠나.
또 내 동선과 발언을 다 공개해야 토론이 가능하다. 회의 시스템을 바꿔서 예전에 하던 훈시를 없애고, 대신 월 1~2회 전체 토론회를 한다.
인사문제부터 보고서 작성 방안까지 발표도 하고, 토론도 한다. 말 하려면 단상에 올라가는데, 올라가지 않았다. 공무원들과 토론하며 동료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역사 없는 사회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소소한 기록에서부터 시작한다. 작지만 굳건한 자기소명 의식이 곧 역사의식이다. 그래서 일일 구정기록을 남기는 것이다."
- '시민단체 길들이기·관변단체 몰아주기'라는 혹평을 받아온 민간단체지원사업을 민간에 이전했는데."'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다. 희망제작소 등 민간이 주도하는 '공익활동지원센터'가 이 사업을 운영할 것이다. 이 센터에서는 민간이 모든 공익활동을 지원하고 보조하고, 사회단체 보조금 등을 배분하고 활동내용 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이른바 '관변단체'라고 불리면서 몇몇 사회단체들이 '과잉 정치화'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그렇게 되면 본래 자리에서 멀어진다. 제자리에 놔두자는 것이다. 그래야 자생적으로 해결된다. 가만 보니 자원봉사센터가 또 하나의 조직이 되어버렸다. 자원봉사자를 잘 지원해서 자원봉사가 확대되도록 견인하기 위한 건데, 또 하나의 조직이 됐다.
사조직화, 정치조직화 돼선 안된다. 어떤 단체장들은 은근히 이런 조직들을 보조금 주며 자기조직으로 챙기려 하는데 그런 건 하수가 하는 것이다. 심한 표현으로 그렇게 해서 표가 되겠나. 단체가 자기성격과 역할에 맞게 지역사회에 좋은 결과를 내야 단체장인 나에게도 칭찬이 돌아올 것 아닌가."
-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구청장 동선 및 발언 일일공개 등 전국 최초로 하고 있는 일이 몇가지 있다. 직설적으로 묻겠다. 광산구청에선 가능하고 다른 지자체에서 가능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나."우리가 한 일에 대해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지만 다른 지자체와 결부해서 답변하긴 매우 곤란하다. 또 일을 추진할 때 늘 간부들에게 했던 말이 '조용히 합시다, 서둘러서 하지 맙시다, 튀지 맙시다'였다. 언론운동에 시민운동, 노무현 대통령 비서관 출신까지 했는데 젊은 사람이 정치하면서 '잘난 척 한다'는 평을 듣기 싫어서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고, 노동에 대해 정당한 예의를 지키는 것은 나의 가치와 신념의 기준 속에선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이 상식을 지키기 위해서 나는 단체장으로서 의지를 분명히 한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