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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책을 읽는 것이 내 직업의 중요부분이다. 그 중에서도 나는 요즘 교양과 관련된 책을 집중적으로 본다. 지난 20년 이상 법률가로 살아 왔고 나름대로는 한 분야에서 전문성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지난 몇 년 간 나는 매일같이 한계를 느껴왔다. 그 한계는 나의 전문영역을 떠받치는 교양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전문가인 척 해 온 내가 부끄럽다.

오늘에 와서야 진정한 전문가는 교양을 바탕으로 전문성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소박한 진리를 깨닫는다. 그렇지 않으면 표피적 전문성에 불과하다. 그래 가지고서야 그 전문성이 세상에 큰 기여를 하지 못한다.

교양이란 무엇인가. 나는 이것을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는 지식이라 생각한다. 개별 학문이 나무에 붙어 있는 수많은 잎과 같은 것이라면 교양은 그것들을 지탱해 주는 뿌리나 줄기다. 아무리 잎이 무성한들 뿌리나 줄기가 없는 나무를 생각할 수 없다.

공부를 하다 보면 이런 뿌리나 줄기를 알고자 하는 욕구가 늘어간다. 내 경우 법학, 그 중에서도 인권법을 연구한다. 도대체 인권이라는 인간의 사상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왜 그런 의식이 싹텄을까, 곰곰이 생각하면 의문투성이다. 그런 것도 모른 채 우리는 권리와 의무로 가득 찬 책들을 읽어간다. 모든 것을 건너 뛴 다음 종착역에 다다른 느낌이다.

나는 이런 공부 방법에 갈증을 느낀다. 인권법의 이면을 알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지 못하고서야 어찌 내가 인권과 그리고 이에 기초한 '법'을 안다하겠는가. 바로 이런 연유로 나는 내 자신에게 교양을 강조한다.

어떤 공부를 깊이 있게 하는 방법 중 최고 좋은 것는 교양서를 광범위하게 읽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온 역사, 철학, 문화, 예술, 과학과 관련된 교양서들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공부하는 것이 그들 교양과 연결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내 영혼 속에 있는 지혜의 근육이 부쩍 자라남을 느낀다.

베개로 삼을 만한 책, <생각의 역사>를 독파하다

<생각의 역사 1> 겉그림.
 <생각의 역사 1> 겉그림.
ⓒ 들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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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하는 피터 왓슨의 <생각의 역사 I>(남경태 옮김, 들녘)은 한 번 도전해 볼 만한 교양서다. 하지만 쉽지 않다. 엉덩이가 무거워야 이 책을 끝낼 수 있다.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이 책의 자매지라 할 수 있는 왓슨의 두 번째 책 <생각의 역사 II>(이광일 옮김, 들녘)까지 전부 읽는다면 나는 그 사람의 끈기를 무조건 인정할 것이다. 

<생각의 역사 I>이 1200쪽이 넘고 <생각의 역사 II>는 1300쪽이 넘는다. 그러니 두 책 전부 합쳐 무려 2500쪽이 넘는 셈이다. 글자 수를 생각한다면 300쪽짜리 책 10여권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나는 이 두 권의 책을 지난 2009년 겨울에 오기와 끈기로 읽었다. 3주간에 걸쳐 두 권의 책을 전부 독파했을 때의 뿌듯함은 마치 입시를 끝낸 수험생의 심정이었다.

이런 독서를 하게 된 데는 과거 내가 고시공부를 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것은 호사스런 독서다. 인내심도 필요하지만 생활에 바쁜 사람들이라면 이런 독서를 하고 싶어도 하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겐 책임이 있다. 이 책을 읽지 못한 사람들에게 소개할 책임 말이다.

내가 <생각의 역사 I>을 발견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2009년 11월 나는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국제인권 심포지엄에 참가했다. 심포지엄이 끝나고 돌아오기 전 잠시 시내관광을 하였다. 그때 조그만 서점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Ideas: A History of Thought and Invention, from Fire to Freud>라는 두툼한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언뜻 목차를 보고 몇 장을 넘겨보니 '야, 이것 대단한 교양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류사의 사상 및 발명의 역사라고나 할까. 거기에는 내가 그동안 알아 왔던, 알고 싶어 했던 온갖 철학, 예술, 문학, 과학이야기가 일목요연하게 설명되고 있었다. 일찍이 읽었던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와는 또 다른 감흥이었다(빌 브라이슨의 책은 자연과학에서 본 <거의 모든 것의 역사>이다).

그래서 한 권 사서 호텔에 돌아 와 한국의 지인에게 연락을 했다. 이 책이 번역되지 않았으면 나하고 공동으로 번역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그런데 한국 교양인들의 정보도 대단하다. 내가 발견하기 바로 몇 달 전에 한 출판사에서 이 책이 이미 번역되었던 것이다. 제대로 된 교양서 한 번 번역해서 나도 우리나라의 교양수준에 조금 기여를 하려던 목표는 좌절되었지만 대한민국의 교양 수준에 자부심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이 베개만한 책 한 권과 이 책에 이어지는 또 하나의 베개만한 책을 읽게 된 것이다(<생각의 역사 II>는 <생각의 역사 I>과는 완전히 별개인 책이나 '생각'의 역사라는 점에서 같은 주제를 다룬 책이다. 이 책은 20세기의 지성사이다).

피터 왓슨, 인류지성사를 탐사보도하다

생각의 역사를 쓴 피터 왓슨은 세칭 세계적인 석학은 아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어떤 석학보다도, 어떤 전문가보다도 교양적 측면에서는 독보적이라는 사실이다. 한 마디로 만물박사다.

그는 영국 출신의 교양 저널리스트다. 좌파 시사 주간지인 <뉴 소사이어티>에서 일했으며, 선데이타임스, 뉴욕타임스, 옵서버, 타임지 등에서도 일했다. 오랫동안 예술관련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현재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맥도날드 고고학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일한다.

이런 경력만 보아도 그가 어떤 특정 영역의 전문가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제너럴리스트'로 살아 왔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그랬기에 이런 책을 쓸 수 있으리라. 특정 영역의 전문가는 이런 책을 쓰기 어렵다. 왓슨은 저널리스트로 탐사보도를 많이 다뤄왔듯, 인류의 모든 지성사를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탐사보도한다는 태도로 이 책을 썼다.

우선 책의 전체 구성이다. 책은 크게 5부 36장으로 이루어졌다. 제1부는 인류의 탄생부터 도시문화를 만들기까지의 역사 속에서 발견되는 인간 상상력의 진화를 다룬다. 인간은 과연 어떻게 불을 발견하고 언어를 만들었을까, 인간의 종교적 심성의 기원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인간은 어떻게 도시를 만들게 되었을까, 등등의 문제에 대해 왓슨은 상상력을 발휘한다. 제2부는 영혼의 진화사이다. 이곳에서는 역사에 나타나는 대표적 종교, 특히 기독교의 탄생기원 등이 설명된다. 제3부는 유럽의 탄생이다. 여기에서는 유럽이 어떻게 동양을 능가하게 되었는가가 집중적으로 조명된다. 제4부는 유럽이 만든 경험주의적 실험정신의 진화과정을 추적한다. 대학과 학문의 발달, 과학혁명과 신세계의 발견 등이 바로 추적대상이다. 제5부는 산업혁명 이후 20세기 초반에 이르는 정신사를 다룬다. 계몽주의에 반발하는 낭만주의에서 비롯된 인간의 자아의식은 드디어 20세기 초 프로이드의 무의식 세계로 연결된다.

영혼, 유럽, 실험으로 만들어진 지성사

자, 사설은 이 정도에서 마치고 간단하게나마 이 책의 핵심에 들어가 보자. 1200쪽이 넘는 인류의 사상과 발명의 역사를 간단히 소개하기는 불가능하다. 다만 왓슨이 인류지성사를 탐사하면서 발견하고자 했던 인류의 '생각'(ideas)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왓슨은 서론에서 결론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역사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것이 무엇인가를 탐구한다. 그가 발견한 것이 바로 '영혼', '실험정신', '유럽의 관념'이다. 어쩌면 이 방대한 책은 이들 셋을 주인공으로 해서 역사를 종횡으로 이어 본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왓슨은 영혼이 역사에 끼친 영향력을 말한다. 영혼은 신이나 종교보다는 넓은 개념이다. 따라서 영혼을 반드시 종교적 측면에서 볼 필요는 없다. 이것은 인간의 육체를 초월한 정신세계를 말한다. 영혼과 관련되어 역사에 영향을 준 것은 인간의 내면지향에 대한 자각이다. 이것은 내세 관념으로 발전하여 종교와 관련을 맺는다.

또한 이것은 인간 내면에 대한 철학적 자각과도 관련이 있다. 인간의 내면화는 기원전 7~4세기에 팔레스타인, 인도, 중국, 그리스, 페르시아 등지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이 시기 이후 인류사에서는 인간의 내면에 관심을 갖고 진리를 찾고자 하는 노력이 종교와 철학을 통하여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다.

정신이 물질보다 우월하다는 플라톤적 관점이야말로 인간의 영혼 그리고 내세와 관련된 서양철학의 대표적 관념이다. 플라톤 이후의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는 말은 바로 이런 영혼사상의 영향이다. 이러한 탓에 서양사는 중세를 기독교 시대로 기록하였고, 근대에 들어서는 계몽주의에 맞서는 낭만주의의 물결이 휩쓸고 갔으며, 심리학의 '자아' 시대를 경험하였다. 나아가 20세기는 정신분석학의 '무의식'시대를 맞이했다.

실험정신의 역사와 유럽의 형성

둘째로 왓슨은 실험정신이 인류 역사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고 말한다. 왓슨은 이러한 정신을 유럽에서 발달한 경험주의적 과학정신에서 발견한다. 이것은 관찰, 실험, 추론에 입각한 과학적 사고방식이다.

<생각의 역사 2> 겉그림.
 <생각의 역사 2> 겉그림.
ⓒ 들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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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인류사에서 물질적 진보를 가능케 하였다. 의료의 혁신, 인쇄술과 이동수단의 발달, 산업화 등은 유럽사회를 성공적이면서도 번영하는 사회로 만들었고 이것은 나머지 세계를 바꾸어 갔다. 이와 같은 과학정신의 뿌리는 근대에 들어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서양의 경험주의적 철학이 그 배경이라 할 수 있다. 왓슨은 근대적 의미의 실험정신을 12세기 이후 서구문화에서 찾는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실험정신이 동양이 아닌 유럽에서 시작되었는가. 바로 그것을 왓슨은 유럽이라는 관념 형성에서 찾는다. 이 말은 유럽이라는 땅에서 탄생한 독특한 문화형식이 인류사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말이다.

통상 유럽이 동양을 뛰어 넘은 것은 15세기 르네상스 이후로 설명되지만 왓슨은 그것보다 앞선 11세기에서 13세기에 이르는 유럽의 변화에서 찾는다. 이 시기에 유럽은 다른 대륙에 비하여 높은 인구밀도 때문에 제한된 자원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효율성의 관념이 중요한 가치로 떠오른다.

그리고 기독교의 발달로 통합적 문화가 탄생하며 그 여파로 곳곳에서 대학이 성장한다. 특히 대학은 유럽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그것은 대학을 중심으로 기독교의 절대관념을 초월한 세속적 사고와 인간의 독자적 사고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더욱 이 시기에는 인간의 자아개념의 연장선에서 '개인'이 발견된다. 개인의 발견이야말로 서구사회가 다른 어떤 사회보다 급속한 발전을 해나가는 세속적 사고가 된다. 왓슨의 분석에 의하면 12세기까지만 해도 동양이나 이슬람 문명이 과학문명에 있어 서양을 능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지역의 학문은 국가적 통제를 받는 관학에 불과했다. 더욱 자유와 독자적 사고를 가능케 한 서구식 대학을 만들지 못한 것이 서구문명의 역전을 가져 온 원인이 되었다고 왓슨은 분석한다.

하지만 왓슨의 이와 같은 문명관에 대하여 조금은 반감을 갖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왓슨의 사고가 지극히 서구중심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왓슨의 이야기는 기독교와 과학기술이라는 두 개의 코드로 장식된 서구에 대한 찬사로 들릴 수 있다.

그가 아무리 동서를 넘나드는 교양을 자랑하지만 그 두꺼운 책에서 동양에 대한 배려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대작의 한계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그것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대단하다. 그 한계가 결코 이 책을 폄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의 간단한 소개를 끝내기 전에 이 책을 번역한 남경태 선생의 열정과 끈기에 찬사를 보낸다. 남 선생은 이 책 이외에도 <반룬의 예술사>등 명저를 번역한 출중한 번역가이다. 뿐만 아니라 지적탐구를 기반으로 본인이 직접 서양철학사 전반을 설명한 <철학>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런 이가 이 책을 번역하였기에 나는 누구보다도 믿고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출중한 능력의 소유자라 하더라도 이 방대한 책을 번역함에는 실수가 없을 수 없다. 아쉽게도 여러 곳에서 오역이 발견된다.

나는 이 책을 번역서와 원서를 동시에 비교하면서 그 부분들을 찾아보았다. 까다로운 독자를 만나면 이런 법이다. 언젠가 남 선생을 만나면 내가 발견한 오역 부분을 전달하고 싶다. 제2판에서는 보다 완성도 높은 책을 기대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자들이 이 베개만한 책을 읽어 주어야 하는데….

마지막 단상, 한국에도 피터 왓슨을 낼 순 없을까

마지막으로 단상을 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한 지식인이 인류의 전 역사를 통해 발견되는 인간의 사상과 발명을 이렇게 박학다식하게 정리할 수 있다는 사실에 전율을 느낀다. 그리고 생각하길 영국이라는 나라, 아니 서구의 지적 풍토가 부럽지 않을 수 없다.

근년에 읽은 책의 저자 중에서도 이런 지식의 만물박사들을 몇 명 꼽을 수가 있다. <이기적 유전자>의 리차드 도킨스, <통섭>의 에드워드 윌슨, <유러피언 드림>의 제러미 리프킨, 이들 모두가 전방위 지식인들이다. 특정 분야의 전문가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책을 읽다보면 모든 학문을 넘나든다. 한 마디로 르네상스인들이다.

이런 지식인들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전적으로 어릴 때부터 읽는 독서의 수준이 말해 준다. 우리와 같이 입시에 치여 학생들이 교양서 한 권 제대로 읽지 못하는 풍토에서는 죽었다 깨나도 이런 르네상스인들을 키워낼 수 없다. 그저 가끔 나오는 돌연변이를 기대할 수밖에.

수십 권의 교양명저를 번역하고 자신의 독자적 사상을 구축해가는 박홍규 교수(영남대) 정도가 거기에 해당할까. <생각의 역사>를 읽으면서 제2, 제3의 박홍규가 나올 수 있도록 우리 교육의 근본을 개혁하는 대결단이 필요함을 느낀다.

두말할 것 없이 교육개혁의 근본은 독서에서 출발해야 한다. 좋은 책을 꾸준히 읽는 버릇을 키우지 못하는 어떤 교육도 이 나라의 내일을 바꾸지 못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박찬운 기자는 한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인권법)이며 변호사다.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생각의 역사 1 - 불에서 프로이트까지

피터 왓슨 지음, 남경태 옮김, 들녘(2009)


태그:#생각의 역사, #피터 왓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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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로스쿨에서 인권법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30년 이상 법률가로 살아오면서(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역임) 여러 인권분야를 개척해 왔습니다. 인권법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오랜 기간 인문, 사회, 과학, 문화, 예술 등 여러 분야의 명저들을 독서해 왔고 틈나는 대로 여행을 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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